EP.5
해가 지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고 초원을 가로지르는 마차로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마부는 마차를 멈춰 세웠다·
“이 너머는 미개척지로 이어진다네· 이 앞을 건너려 했다가 변을 당한 마부들의 소식을 심심치 않게 들었다네· 나는 여기까지만 하겠네· 돈을 더 준대도 나는 못가· 내 아무리 늙어 보잘것 없어도 목숨 귀한 줄은 안다네·”
나는 짐을 챙기고 마차에서 내렸다·
“이만하면 됐습니다· 살펴가십쇼·”
“자네는 계속 갈 생각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나이에 무슨 딱한 사연인지는 모르겠다만 내 자네한테 아카테스 여신의 보살핌이 있길 빌겠네·”
“감사합니다·”
“이 앞 미개척지에는 구울들이 많으니 밤에는 몸을 숨기게· 밤에 시퍼런 빛이 보인다고 무작정 따라가지 말게나· 발광 구울은 등에서 빛을 내 사람을 유인한다네· 내가 해줄 말은 이것 뿐일세·”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마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쭉 이어진 마차로를 따라 걸었다·
나아갈수록 마차로는 점점 거칠어지고 잡초가 자라 발을 내디기 버거워졌다·
나는 본격적으로 야만의 땅에 진입하고 있었다·
마차로 인근에서 이따금씩 산산조각이 난 수레바퀴와 말의 썩은 시체를 마주했다· 폭발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썩은 살점들이 나무판자와 수레바퀴에 이리저리 걸려 있었다·
둥둥 떠다니는 파리와 악취 때문에 나는 코를 막았다·
나는 반쯤 자연의 일부가 된 마차로를 벗어나 나무가 무성한 숲지대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해가 지기 전에 몸을 숨길 거처를 마련해야 했다·
나는 숲과 초원의 경계면을 따라서 움직였다· 그러던 중 뿌리가 드러난 고목을 발견했다· 나무의 몸통 바로 아래의 뿌리 틈을 파보니 사람 하나가 들어갈만한 공간이 나왔다· 몸을 숨기기엔 충분해 보였다·
나는 그 인근에서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 그러고는 식사 흔적을 지우고 뿌리 아래로 들어갔다· 그리고 입구를 흙으로 막고 밤을 보냈다·
새벽엔 어느 네발 짐승의 둔탁하면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하나가 아니라 십여마리가량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나는 땅 밑에 있어서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그 네발 짐승의 울음 소리는 내 기억 속 존재하는 그 어떤 야생 동물의 것도 아니었다· 살면서 들어 본 가장 흉측하고 소름 끼치는 울음이었다·
동이 트자 나는 흙을 퍼내고 지상으로 나왔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마른 빵과 육포로 아침 식사를 했다·
두발로 걷는 사람과 따스한 스튜가 있는 도시에서 구울과 시체가 굴러다니는 미개척지로 제 발로 들어온 배짱이 어디서 나온 건지 나 자신도 의문이었다·
이미 뱃가죽을 뚫려 봐서 겁대가리를 상실한 건지도·
나는 또다시 별이 날아갔던 북서쪽 미개척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구울은 어찌보면 신비한 존재이기도 해요·”
아이들은 교단에 서 있는 사제의 말에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아이들도 구울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신비하다니? 그 구울이?’ 하는 표정이다· 아이들에게 신비는 꿈과 동심의 세계에서 사용하는 단어였다·
“구울은 원래 사람이었어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던 사람조차 죽고 나서 구울로 변모하면 완전히 다른 개체가 되죠·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데 등에는 가시가 나고 근력은 생전에 쓰던 것보다 네다섯배 이상 강력해져요· 잇몸에서는 두꺼운 송곳니가 새로 자라나죠· 인간으로서의 본능과 기억은 모두 사라지고 살아 있는 생물에게 강한 식욕을 느끼는 괴물이 돼요·”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사제가 말해보라는 손짓을 하자 그 아이는 서둘러 질문을 했다·
“왜 그런 거예요?”
“음⋯구울은 어찌보면 비교적 흔한 마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아직도 그 이유를 몰라요· 몇 학자들은 죽음이 진화의 과정이라고도 하고 안식을 빼앗는 저주라고도 하고 의견이 분분하죠·”
그 말을 들은 한 아이가 소리쳤다·
“저는 구울이 되기 싫어요·”
그러자 사제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불타 죽으면 돼요·”
나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허억!”
꿈이다·
불쾌한 뒷맛이 남는 꿈이다· 어릴 적 로레일관에서 수업을 듣던 기억이 그대로 꿈에 나왔다· 다만 불타 죽으면 된다는 끔찍한 소리는 내 기억엔 없었다·
미개척지에서 야영을 한지 나흘 가까이 지났다· 흉흉한 분위기 때문인지 이상한 꿈을 꾸는 횟수가 늘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여러 차례 심호흡했다·
나는 손으로 내 상체를 덮고 있는 나뭇잎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이제 막 동이 트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 나는 주변에 기척이 있나 숨을 죽이고 귀 기울였다·
5분 정도 지나고 아무런 기척이 없는걸 확인한 나는 나뭇잎을 마저 치우고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정리하고 짐을 챙겼다·
내가 잠들었던 터 주변에 구울들의 흔적이 잔뜩 남아 있었다· 침을 꿀꺽 삼켰다· 구울들이 지나갈 때 잠꼬대라도 잘못 했으면 나는 그대로 죽은 목숨이었다·
잠자리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숲지대를 넘어가고 나니 드넓은 광야가 펼쳐졌다· 좋지 않았다· 이곳을 건너가야 했지만 너무 광할해서 야영시 몸을 숨기기 어려웠다· 물을 뜨기에도 마땅한 곳이 보이지도 않았다·
달리 방법이 없다· 좀 더 속도를 내는 수밖에·
나는 정오까지 계속 걷기만 했다·
물통을 체크했다· 물이 절반가량 남았는데 앞으로 얼마나 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햇볕에 땅이 달궈지고 아지랑이가 일자 나는 바위 옆 그늘에서 잠시 쉬었다·
정오를 넘기고 두어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마땅히 피할 곳이 없었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구름 때문에 햇빛이 가려져 점점 어두워졌고 비가 한방울씩 툭툭 떨어졌다·
한참을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를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비비고 그곳을 주시했다·
구울이었다· 햇빛이 사라지자 구울들이 땅굴에서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구울은 밤에만 활동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구울은 햇빛이 없으니 밖으로 조금씩 기어나왔다·
구름의 움직임을 보아하니 단순히 소나기는 아니었다·
나는 냅다 달렸다· 눈 앞에 보이는 작은 언덕을 넘어가 구울의 시야에서 사라질 작정이었다·
헌데 다른 방향에서도 구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구울의 땅굴이 하나가 아닌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이번엔 상당히 가까운 곳이었다·
구울이 다시 크게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나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나는 언덕 마루로 달려갔다· 곧이어 아래로 작은 오두막이 보였다· 달리 피할곳이 없었다· 나는 전속력으로 오두막을 향해 달려갔다·
내 뒤로 구울 십여마리가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오두막 내부로 들어가 문고리를 걸었다· 나를 뒤따라온 구울들이 문에 박치기를 해대기 시작했다· 나는 오두막 내부를 살폈다· 그곳은 창고로 쓰이는 곳이었다·
헌데 보관해 두는 물품들이 조금 이상했다· 기름을 잔뜩 먹인 횃불들과 석탄 화약 기름통이 한가득 정렬되어 있었다·
구울의 손이 문을 뚫고 나왔다· 내 몸을 탐하는 구울들이 무서운 기세로 문을 뜯어내고 있었다·
“젠장 젠장·”
그 때였다· 내 머릿속에 꿈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럼 불타 죽으면 돼요·’
나는 곧장 부싯돌을 꺼냈다· 그리고 횃불을 집어 불을 붙였다·
문이 모조리 뜯겨나가고 구울이 오두막 안으로 들이닥쳤다·
나는 활활 타는 횃불을 들어 구울을 위협했다·
효과가 있었다· 구울들이 불을 보고는 괴성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횃불을 휘두르며 문 앞으로 나섰다·
망할·
구울 수십마리가 순식간에 오두막을 포위해둔 상태였다· 구울들은 서너걸음 정도의 거리에서 날 보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한 두 방울 툭툭 떨어지던 비가 점점 많아졌다·
“안 돼···안 돼!”
횃불이 당장 꺼지지는 않았지만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다른 횃불을 들어 불을 붙였다· 설상가상이었다· 오두박이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았던 모양인지 빗물이 지붕을 뚫고 횃불과 석탄을 천천히 적시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밤을 절대 넘길 수 없었다·
구울들은 내 횃불을 쳐내려고 손을 휙휙 휘두르거나 날 덮치려고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간을 보고 있었다·
나는 한 팔로 횃물을 뭉텅이로 들어 옆구리에 끼고 망토로 젖지 않게 비를 가렸다· 그리고 오두막 밖으로 뛰쳐나왔다· 횃불의 빛이 닿지 않는 오두막 뒤편은 이미 구울들이 부셔버리고 있었다·
“젠장·”
아무런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부웅
북서쪽 언덕 너머로 둔탁한 충격파가 울렸다· 곧이어 소리가 들린 곳에서 새하얀 빛의 기둥이 하늘로 솟아 올랐다· 이를 본 구울들이 동요했다·
저 빛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나에겐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빛의 기둥을 향해 냅다 뛰었다·
구울들은 횃불 때문에 나를 덮치지는 않았지만 나를 따라오며 지속해서 포위망을 유지했다· 구울의 달리기 속도는 나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빨랐기에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언덕 능선 위로 올라가 건너편에 빛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뭐야 저건·”
그 너머엔 거대한 크레이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거대한 운석이 반쯤 파묻혀 있었다·
“⋯!”
그리고 그 돌덩이에 새하면 빛을 내며 발광하는 검이 꽂혀 있었다· 검을 둘러싼 강렬한 빛의 기둥이 하늘로 뻗고 있었다·
“⋯검이 있어?”
나는 크레이터 중심부로 온 힘을 다해 뛰어갔다·
구울들은 이전처럼 내게 가까이 붙어 추격하지 못했다· 검을 중심으로 뿜어져 나오는 빛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어느새 수십마리 정도의 구울은 소란을 틈타 수백으로 불어나 있었다· 구울들은 크레이터 안에서는 다소 움직임이 조심스러웠다· 포식자가 먹잇감을 노리며 몸을 낮추고 소리를 죽이는 것처럼 구울들은 느릿한 걸음으로 내 주변을 천천히 조여들었다·
전방위에서 구울들이 크레이터 내부를 그득하게 채워간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크레이터의 중심부에 이르렀다· 내가 검에 가까이 다가가자 빛의 기둥이 더욱 요동쳤다·
나는 검과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거리를 좁혔다·
내겐 다른 방법이 없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빛의 기둥 안에다 손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검 손잡이를 쥐고 뽑아 올렸다·
금속성 특유의 묵직함 없었다· 모양은 얇고 긴 롱소드와 비슷했다· 헌데 아무런 무게감이 없었다· 두 손으로 잡아야 할 것 같은 길이였지만 한손으로 들어도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나는 검을 들고 살폈다· 믿을 수 없었다· 이 검은 검신에서 손잡이까지 전부 빛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검을 손에 쥐자 하늘까지 뻗어 나던 빛의 기둥은 점차 사그라졌다·
내 주위를 둘러싼 구울 몇몇이 강하게 포효했다· 곧이어 늑대들처럼 구울들이 이를 따라 동시다발적으로 포효를 이어나갔다·
빛의 기둥이 사라지니 구울이 점점 포위망을 좁혀왔다· 검의 신비한 자태에 취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경계자세를 취했다· 한동안 구울과의 대치 상황이 지속되었다·
곧이어 맨 앞에서 침을 흘리던 한 놈이 몸을 던져 나를 덮치려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구울의 몸뚱이에 칼을 휘둘렀다·
철퍽!
살점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구울은 깔끔하게 상체가 세로로 두동강나고 바닥에 곤두박쳤다·
“이게 무슨⋯·”
구울을 벨 때 아무런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허공에 휘두른 것 같았는데 구울의 단단한 뼈와 육질이 두 동강 나버렸다· 경악할만한 절삭력이었다·
또 다른 한 마리가 내게 뛰어들었다· 나는 크게 반원을 그리며 검을 휘둘렀다·
부웅!
내가 검을 휘두른 궤적을 따라 하얀 빛의 충격파가 날아갔다· 그 충격파는 나를 덮쳐오던 구울 뿐만 아니라 날아가는 경로에 있는 모든 구울을 쓸어버렸다·
“뭐야 어떻게 한 거지?”
뒤통수에서 구울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곧장 뒤돌아서 다른 방향으로 칼을 휘둘렀다·
또다시 충격파가 그 경로의 모든 것을 쓸어버렸다·
입이 떡 벌어지는 위력이었다· 다만 충격파를 내면 내 몸의 기력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구울들이 내게 몸을 던지는 빈도가 점점 늘어났다· 빛을 경계하는 탓인지 주로 검이 잘 보이지 않는 내 등 뒤를 노렸다·
“젠장·”
나는 반사신경만으로 냅다 검을 휘둘렀지만 이정도로는 저 많은 구울을 막아내기엔 택도 없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검을 쥐고 시간이 지날수록 시야가 흐릿해지고 현기증이 일었다·
이 검은 내 정신력을 먹고 있었다· 나는 검에 점차 적응하면서 확신할 수 있었다·
내게 입을 벌리고 들이대는 구울을 또 한차례 베어내고는 나는 크게 휘청거렸다·
“···젠장·”
기회를 틈타 구울 세 마리가 동시에 내게 몸을 던졌다· 나는 뒤로 스텝을 밟으며 한 마리는 피하고 동시에 구울 두 마리의 머리를 베어버렸다·
그러고는 다시 자세를 잡고 남은 한 마리의 등에다 검을 밀어 넣었다·
구울의 등에서 썩은 피가 터져 나왔다·
조금 움직여도 에너지 소모가 엄청났다· 머리에서 피가 다 빠져나간 듯이 어지러워졌다· 정신력 소모가 심해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내 정신력에 반응하는 것 같았다· 검을 쥐고 오분도 채 안 지났는데 나는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조금만 더 버티자· 조금만····”
내가 정신을 못 차린 틈을 타 구울 하나가 튀어나와 손톱으로 내 옆구리를 베어냈다·
옆구리 살점을 마구잡이로 잡아 뜯은 듯한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나는 이를 악물고 날 공격한 구울의 주둥이에 검을 밀어 넣었다·
왼손으로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출혈의 여파로 나는 당장에라도 혼절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콰앙!
크레이터 한구석에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나는 깜짝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폭발의 여파로 귀가 먹먹해졌다·
구울들의 주의가 전부 폭발로 쏠렸다·
나는 폭발이 난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폭발이 일어난 곳엔 집채만한 시뻘건 불길과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그 주변엔 구울들이 폭발의 여파로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불길 속에서 사람의 실루엣이 일렁거렸다·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나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헛것은 아니었다· 불길이 점차 잠잠해지자 실루엣이 점점 선명해졌다· 연기 속에서 인영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바람이 불어 연기가 걷어나자 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큰 고깔모자와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붉은 머리카락· 허벅지 한쪽이 그대로 드러나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장신의 여자였다·
여자의 손 위엔 작은 화염 구체가 둥둥 떠 있었다·
여자는 구체를 믈수제비하듯 옆에다 던졌다·
구체가 떨어진 곳에서 강하게 바람이 일더니 순식간에 시뻘던 화염 소용돌이가 용솟음쳤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 나오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거대한 화염의 소용돌이가 크레이터를 가로지르며 굉음과 함께 구울들을 쓸어 버렸다·
개미떼처럼 바글바글하던 구울 군집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살면서 처음 마주하는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 같은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이 초월적인 힘이 단 한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일단 살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풀석 주저앉았다· 내 손에 쥔 검이 점점 빛을 잃고 희미해지고 있었다· 더는 의식을 유지할 수 없었다·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흙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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