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0
벽을 등지고 앞에는 실베린의 몸에 눌려 나는 샌드위치 꼴이 되었다·
실베린의 몸에선 항상 좋은 향기가 난다· 나는 일주일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데 괜찮으려나 모르겠다·
내가 몸을 버둥대면 그녀는 더 격하게 몸을 부볐다· 숨통이 점차 갑갑해진다·
“저···선생···님 숨이····”
“참아 삼분만· 아니 오분만·”
보기보다 힘이 세다· 이 가녀린 몸에서 대체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나는 실베린의 품 안에서 목을 위로 쑥 빼냈다· 그제야 간신히 호흡을 이어갈 수 있었다·
힘겹게 숨을 돌린 나는 실베린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입학시험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 궁금해요?”
“글쎄 보나마나 이 여자 저 여자 들쑤시고 다녔겠지·”
“····”
내 딴에는 조용히 있으려 노력하긴 했는데 돌이켜보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니어서 뭐라 대꾸할 수가 없다·
그나저나 이렇게 몇 분이 지난 것 같은데 실베린은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정말 오분을 채울 생각인가·
조금 숨이 갑갑한 것만 빼면 포근하고 좋았다· 이 지역이나 저택이나 내겐 아직 낯선 곳이지만 그녀에게 안기면 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실베린에게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과거를 돌아보았다·
미개척지에서부터 입학시험까지·
실베린을 만나고 모든 게 달라졌다· 마스터스 클래스와 입학시험에서 나름 좋은 성과를 내긴 했지만 자만할 수는 없다·
이 모든 건 실베린 덕이고 그녀가 없었으면 나는 결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었다·
아직 부족한 게 많고 내일 해가 뜨면 또 바쁘게 수련해야한다· 그래도 잠깐은 이런 안락함에 취하는 것도 괜찮겠지·
실베린은 내 마음을 읽어낸 건지 나지막이 말했다·
“고생했다 제자야·”
“선생님도요·”
누군가의 발소리가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실베린은 그제서야 구속을 풀고 뒤돌아서서 나와 몇 걸음 떨어졌다·
우리에게 다가온 사람은 바로 리리아였다·
그녀는 손에 기다란 빗자루를 들고 쭈뼛거리며 말했다·
“저어····”
실베린은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응· 왜?”
“말씀하신 중정 정리는 다 끝났어요· 그 다음은····”
“그만하면 됐어· 들어가 봐·”
“아···· 네! 알겠습니다·”
리리아는 빗자루를 두 손에 꼭 쥐고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멀어졌다· 아직도 실베린 앞에 서는 게 무서운 모양이다·
실베린은 여전히 나를 등지고 가만 서 있다· 손바닥으로 자신의 볼을 몇차례 눌러댈 뿐 별다른 말은 없다·
갑자기 적막해진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나는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 갑자기 웬 청소에요?”
실베린은 정원 관리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
“손님이 오기로 했거든·”
실베린의 거처를 찾아오는 손님이라면 내 머릿속엔 이터니아의 교감 같이 높은 사람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좋은 일 때문에 오는 건 아니야·”
***
나는 일주일 만에 따뜻한 물로 목욕을 했다· 그렇게 목욕을 마치고 방에서 쉬고 있던 차에 메이드들이 방에 들어왔다· 내게 아직 남아 있는 잔부상들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그 중에는 리리아도 껴 있었는데 그녀는 앞으로 계속 내 부상을 담당하게 될 거라고 알렸다·
메이드들이 치료에 전념하는 동안 나는 앞으로 할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입학시험을 치르면서 불편하거나 부족하다 느꼈던 것들이 제법 있었다·
일단 가면을 쓰고 말을 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바꾸는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검을 소환할 수 있는 시간도 늘리고 그리폰 포션의 효과도 복용 직후 바로 나타날 수 있도록 개조도 해야 했다·
거기에 앞으로 정령술도 조금씩 익혀야 하고· 할 일이 산더미다·
나는 부상 부위를 살피던 리리아에게 대뜸 물었다·
“리리아· 혹시 시간 남아요?”
“네 네? 왜요?”
“포션 관련해서 도움이 좀 필요해서요·”
리리아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도와야죠· 그게 제 일인걸요·”
“그게 다름이 아니라 리그베드에 같이 가야 할 것 같은데·”
리리아가 하던 일을 멈추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정말···요?”
“네·”
“물론이죠· 좋아요· 좋아요!”
리리아의 눈에 돌연 생기가 가득해졌다·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 묻지도 않고 무작정 좋다니· 바쁜 사람 붙잡고 귀찮게 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기우였나보다·
“놀러 가는거 아닌데 괜찮아요?”
리리아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
“상관없어요· 갈래요!”
종일 적막한 고성에 갇혀 있으니 리리아도 내심 답답했던 모양이다·
실베린의 허락은 이미 구해 둔 상태였다·
실베린이 이번에 맞이할 손님들은 북부 판테아 지역에서 오는 사절단이라고 했다· 바로 바리안느 가문과 관련된 이들이었다·
좋은 일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니라 했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실베린은 내가 그들과 엮이는 걸 넘어 접촉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사절단이 오는 날 리그베드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반쯤 내쫓기는 꼴이긴 했다·
한편으론 실베린이 이토록 민감하게 대할 정도로 안 좋은 일은 무엇인지 계속 신경 쓰였다· 아무래도 내가 있어 봐야 하나도 도움이 안 되니까 멀리 보내는 거겠지·
부상 치료를 마치고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나는 저녁 식사를 했다·
실베린은 식사는 하지 않았지만 나와 자리를 함께 했다·
나는 그녀에게 목소리 변형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그녀는 턱을 괴고 내가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지· 포션 아니면 마도구·”
나에겐 그나마 연금술이 익숙하니 포션이 좋지 않을까 싶었는데 실베린은 생각이 달랐다·
“너는 몸이 성장하는 시기잖니· 특히 예민한 부위에 포션으로 인위적으로 변형시키면 평생 이상한 목소리를 달고 살아야 할 수도 있어·”
“많이 안 좋은가요?”
“응· 무엇보다 내가 허락 못해· 목소리는 마도구로 내뱉는 공기의 흐름을 바꿔 주는 정도로 충분할 거야·”
내 조건에 딱 맞춘 마도구를 찾기는 제법 힘들 것 같은데·
“그리고 네 가면에 그정도 인챈트는 있어· 다만 발현을 안 시킨 것뿐이지·”
“제 가면에요?”
“응· 촛불처럼 쉽게 키고 끄고 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네 필요에 따라 인챈트들을 어느정도 조정할 수는 있을거야·”
전혀 몰랐다· 내가 필요로 하는 기능은 이미 갖추고 있었구나·
“그럼···목소리 변형 말고 다른 인챈트도 있나요?”
“어려보이는 건 안되겠고 아마 더 늙어보이게 만드는 건 가능할거야·”
당장은 필요 없는 인챈트지만 앞으로 활용도가 무궁무진했다·
정말 치밀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구나· 내 가면은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물건이었다·
“그럼 그 인챈트를 활성화하려면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요?”
“음⋯·”
실베린은 검지로 자신의 입술을 툭툭 두드렸다·
잠깐 고민한 끝에 그녀는 집사를 불렀다·
“종이랑 펜 가져와·”
잠시 뒤 실베린은 집사에게 종이를 건네받고 간단하게 약도를 그려 내게 슥 밀었다·
“기다려 봐·”
그러고는 또 다른 한 장에다 글을 몇줄 적은 뒤 반으로 접었다·
그녀가 반으로 접은 종위 위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내자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녀의 손길이 지나간 곳엔 시커멓게 마법진이 그려졌다·
“이 편지도 가져가·”
나는 약도와 편지를 챙겨 품 안에 넣었다·
“네 가면은 에르제베트가 만든 거니까· 다루기 상당히 까다로울 거야· 아무한테나 보여줘서도 안 되는 거고·”
“네·”
“약도에 그려넣은 대로 찾아가· 단 내 소개로 왔다거나 내 제자라는 말은 하지 마·”
왜지· 그동안 실베린의 제자로 알려져서 불이익을 당한 적은 없었는데·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그녀는 내 시선을 슬쩍 피하곤 말했다·
“···그냥 하지 마· 에르제베트의 소개로 왔다고 해· 그 인간이라면 네 팔찌나 가면을 들이대면 바로 알아볼 거야·”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내가 허락도 없이 교감의 이름을 입에 올려도 되는 건가?
“···그래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지·”
실베린의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리고 혹시나 내 제자라는 걸 그 마도학자가 알게 된다면 그 편지를 전해줘·”
“혹시 들통나면 위험해질 수도 있는 건가요?”
나는 리리아를 데려가야 하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아니· 그러진 않을거야·”
추가적인 설명은 없다·
실베린이 이렇게까지 주의하는 이유가 뭐지· 앙숙이라도 되는 걸까· 괜히 더 궁금해진다·
그동안 실베린의 말을 들어서 손해를 보거나 변을 당한 적은 없었으니 그냥 믿고 따르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
그로부터 이틀 뒤 나는 리리아와 함께 아침 일찍 마차를 타고 리그베드로 향했다·
이번에는 가면을 쓰지 않았고 목검도 따로 가져오지 않았다·
입학생들의 대부분은 리그베드에서 머무르고 있었고 세실이나 릴리트 시온 등 내 가면을 알아보는 이들 또한 그곳에 머무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은 리리아를 끼고 있으니 괜히 그들과 엮이고 싶지는 않았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나는 잠시 리리아를 살폈다· 그녀는 긴장한 모양인지 주먹을 꽉 쥐고 자신의 허벅지를 누르고 앉아 있었다·
표정에서 왜인지 모를 결연함이 느껴진다·
“저···리리아·”
“예 예?”
“괜찮아요?”
그녀의 눈빛이 당황한 듯이 흔들렸다·
“앗· 아 저···긴장한 거 너무 티 났나요?”
“네·”
“저 큰 도시를 제대로 구경해 보는 건 처음이거든요····”
리리아는 전에 왔을 때 제대로 구경할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제 또래를 길에서 그렇게 많이 본 것도 처음이고···엄청 설레면서도 조금 무서워요·”
“금방 익숙해질 거에요·”
하기야 나도 처음 구경했을 때 신기하게 느껴졌었다· 평생 위젤 같은 조용한 곳에 살던 리리아한테도 생소한 경험일 거다·
“저보다 훨씬 어른이시네요·”
“····”
아니· 나도 다른 한편으로 긴장되기는 마찬가지다· 내 가면을 부탁할 사람 때문이다·
실베린이 하도 유명한 탓에 그 제자인 나도 이름이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 마도학자가 귀가 밝은 편이면 들킬 수밖에 없는데·
정말 선생님이랑 앙숙이면 어떡하지?
모르겠다· 일단 들이받고 난 다음에 생각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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