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1
리그베드에 도착한 우리는 상가가 즐비한 한 대로에서 내렸다·
정오가 아직 안 된 시각이라 조금은 느긋하게 돌아다녀도 될 것 같았다·
리리아는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리리아?”
“앗 네?”
나는 속효성 그리폰 포션의 재료 목록을 적은 종이를 리리아에게 건넸다·
“오늘까지 구해야 돼요· 못 구하면 같이 저녁밥 굶어야 해요·”
그녀는 목록을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좁은 도로엔 귀족 기사 주정뱅이 성직자 약초꾼 등등 그 외에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어깨가 닿을 거리에서 우릴 스쳐지나간다·
드문드문 내 또래의 소녀들도 보인다· 이들 대부분 화려한 치장을 하고 호위 기사를 몇 명씩 대동하고 있다·
그녀는 주변을 지나가는 여자아이들과 자신의 옷차림을 비교하고는 살짝 주늑이 들었다·
리리아는 그들에 비해 많이 수수한 차림이긴 했다·
행인들과 어깨가 살짝만 닿아도 그녀는 크게 움찔거렸다·
더군다나 몸이 마른 탓에 인파에 너무도 쉽게 밀려났다·
“괜찮아요?”
“네에···괘 괜찮아요·”
당초 계획은 그녀와 갈라져서 따로 재료를 구하는 것이었는데 그녀의 상태를 보니 그래선 안 될 것 같다·
이 많은 인파들 중에 이상한 사람이 없을 거란 보장도 없으니 그녀 혼자 활동하게 두기엔 조금 불안하다·
“리리아· 내 옷깃 잡아요·”
“네?”
“여기서 갈라지면 바로 미아되는 거니까 꽉 잡고 놓치면 안 돼요·”
“앗 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내 상의 끝자락을 잡았다·
나와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불안감에 몇 번씩 뒤따라오는 리리아를 돌아보았다· 툭 건드리면 그대로 파도에 쓸려나갈 것 같다·
“···꽉 잡아요·”
내 옷이 상할까 걱정하는 모양인지 그녀는 맥아리 없이 집게손가락만 걸치고 있다·
답답해진 나는 그녀의 손목을 덮석 붙잡았다·
이에 리리아가 움찔한다· 부담스러워도 어쩔 수 없다· 이러는 게 미아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낫다·
나는 그녀를 이끌고 거리를 나섰다·
***
실베린은 창가에 서서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북부에서 온 세 대의 마차가 저택 중정을 가르고 천천히 들어섰다· 이들은 실베린의 안부를 묻기 위한 것도 아니고 게일의 이터니아 입학식을 기념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니다·
이들은 부고를 전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다·
북부의 전통에 따라 실베린은 그들을 환대하지 않았다·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몇 번째일까·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이 꼴을 마주하기 싫어 먼 위젤까지 내려갔거늘· 북부는 잊을 만하면 불쑥 나타나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집사가 마중을 나와 북부의 사절들을 내부로 안내했다·
실베린은 커튼을 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잠시 후 아무런 장식이 달리지 않은 무채색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 응접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먼저 대기하고 있던 일곱 명의 사절들이 전부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표했다·
“대마법사 실베린 님을 뵙습니다·”
그녀는 감정 없는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어서 앉아요·”
실베린이 먼저 상석에 앉자 사절단의 대표이자 바리안느 변경백의 부관인 볼칸이 앞으로 나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실베린의 초점이 다소 흐릿해져 있었다·
북부의 일은 북부에서 끝내기 마련이었다· 그녀에게 직접 이렇게 부고를 전해야 할만큼 중요한 인물은 몇 없었다·
케드웬·
그가 실종되었단 소식은 이미 전해들은 바 있었다·
죽을 고비를 수십번이나 넘겨 불사신이란 별명이 붙은 인간이었다· 실베린을 포함한 북부인들 모두가 믿고 있었다· 케드웬이라면 분명 살아서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북부는 실베린의 수많은 전우를 삼킨 것처럼 케드웬의 목숨 또한 가져갔다·
북부란 그런 곳이다· 불세출의 천재 영웅 전설과 신화 속 주인공같은 인물들도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다·
응접실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실베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단순한 실종이 아니었군요·”
볼칸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팔랑카 분지 인근에서 케드웬님의 유해 일부를 발견했습니다·”
볼칸이 전하길 발견한 것은 왼쪽 손목과 오른팔· 기괴하게 뒤틀린 오른쪽 다리· 남은 유해는 아직 수색중이지만 마수가 들끓고 있는 곳이라 못찾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실낱같은 희망도 없어졌다· 전장에서 사지가 잘린 검사의 최후는 불보듯 뻔했다·
오랜 침묵 끝에 실베린은 돌연 일어서서 창가로 향했다· 그녀는 사절단을 등지고 힘겹게 말했다·
“저는 그 녀석이 졸업하는 것도 보고 결혼식에도 참석했었죠·”
케드웬의 죽음은 북부인들과 실베린 모두에게 큰 고통이었다·
그는 실베린의 이터니아 후배이자 북부전선을 함께 수호하던 전우였다·
그는 어릴적 마수에게 부모를 잃어 고아로 힘겹게 자랐고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덕에 이터니아에 입학한데다 마스터스 클래스까지 수료했던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전 대륙에서 오직 열명에게 허락된 소드마스터의 자리에 공석이 난다면 케드웬이 그 자리에 들어갔을 정도로 그는 최고의 실력자였다·
실베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끝이 보이질 않았다· 얼마나 더 가져가야 이 비극이 끝나는 걸까·
잔인한 운명이다· 자신의 부모을 앗아간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몸을 불사르던 청년은 부모와 똑같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케드웬님의 유서엔 실베린님께 전하는 부탁이 있었습니다·”
북부인들은 항상 그랬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전장에 나갈 나이가 되면 유서를 미리 적어두었다·
“이것들의 새 주인을 찾아 전해달라 당부하셨습니다·”
볼칸의 뒤에 있던 사절이 테이블에 기다란 목함을 올려두었다·
실베린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볼칸이 목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케드웬이 쓰던 검과 아티팩트가 들어 있었다·
“···부인이나 자식한테 주지 않고 왜 나한테?”
“후대에 자신의 뜻을 뒤이을 사람을 찾아 이걸 전해주길 원하셨습니다· 후계를 찾는 일은 실베린님의 안목에 맡기겠다고요·”
“····”
그녀는 유품을 힘없는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케드웬의 죽음은 그 자체로도 괴로웠다·
그리고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한편으론 혼란스러웠다·
케드웬은 자신이 데리고 있는 한 소년을 떠올리게 했다·
케드웬과 그 소년이 연상될 때마다 가슴이 더욱 시려왔다·
그도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는 건 아닐까· 자신이 격랑 속으로 소년을 끌어들인 건 아닐까·
그녀는 한동안 그렇게 침묵을 유지하다 나지막이 말했다·
“도로 가져가세요· 마땅히 전해 줄 만한 사람은 없으니까·”
***
나는 약초더미를 한 손에 안고 리그베드 광장에 있는 분수대에 걸터앉았다· 곧이어 리리아도 나와 어깨를 붙이며 앉았다·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약초 목록을 확인했다· 필요한 건 대부분 구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나오질 않는 약초도 있었다·
“‘푸글리시의 눈물’은 끝까지 안 나오는군요·”
민담이나 전설에서 유래된 별칭같기도 하고· 아니면 정말 이름모를 마수의 눈물이라도 되는 걸까· 약초가게를 전부 뒤져도 다들 금시초문이라는 이야기만 전했다·
리리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제 생각엔 약초는 아닌 것 같아요·”
나도 비슷한 생각이긴 하다·
“나머지는 마도학자한테 물어보죠 뭐·”
우리는 광장 한쪽 구석에 대기하고 있던 마차로 다가가 구해온 약초들을 전부 실었다·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아 아직 노을이 지지도 않았다·
저번에 목검을 구하고 남은 돈을 이번에 고스란히 돌려받은데다 위젤 기사단에서 온 후원금까지 들어와 돈도 많고 시간도 남았지만 굳이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자 이제 다음 행선지로 가죠·”
이동하자는 말에 리리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저기····”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혹시 지금 떠나면 다시 광장으로 안 오나요?”
“음 아마도요·”
“저···이 근처에 가보고 싶은 곳이 하나 있는데 잠깐만 시간 내주실 수 있나요?”
“···?”
의문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본 그녀는 안절부절하며 말했다·
“정말 정말 잠깐이면 돼요···· 이잉 귀찮으시면 저 혼자 다녀올게요·”
쩔쩔매는 모습이 조금은 안쓰럽게 보인다· 그냥 가볍게 부탁해도 괜찮은데·
“안될 거 없죠· 같이 가요·”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네! 바로 가요· 이쪽이에요!”
나를 데리고 리리아가 향한 곳은 어느 큰 옷가게였다·
이게 뭐라고 그녀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활기가 가득해 있다·
그 모습을 보니 실소가 터져나왓다·
그럼 그렇지· 리리아 또한 남들과 똑같은 예쁜옷과 액세서리를 좋아하는 십대 소녀였다·
그녀는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옷이 진열된 한곳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전에 왔을 때부터 이미 눈여겨 본 옷이 있었던 것 같았다·
남성복도 있었지만 여성복을 주력으로 취급하는 것 같다· 나는 입구 쪽에서 잠시 기다렸다·
안에선 귀부인과 귀족 영애들이 진열된 옷을 구경하고 있었다·
관리인처럼 보이는 한 장년인이 뒷짐을 지고 허리를 빳빳히 세우고 리리아에게 다가섰다· 그러고는 조용히 리리아를 노려보았다·
리리아가 먼저 장년인에게 말했다·
“저어···이거 입어봐도 될까요?”
그녀가 고른 옷은 화려한 장식이 없는 보라색의 린넨 원피스 드레스였다· 일상적인 느낌이면서도 제법 고풍스러웠다·
장년인은 리리아의 차림새를 훑고는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아가씨 저희 가게는 종달새 클럽 회원이시거나 그에 준하는 고귀한 자격요건을 갖추신 분께만 의복을 제공드리고 있습니다·”
옷 사는 데에도 자격을 따지나· 좀 너무했다 싶은데·
이에 리리아가 잔뜩 주늑이 들고는 말했다·
“앗···· 네에····”
귀부인들이 슬쩍 리리아를 보고는 얼굴에 조소를 머금었다·
썩 보기좋은 모습은 아니다·
나는 뒷짐을 지고 걸어가 돌아서려는 리리아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막아섰다·
그리고는 장년인에게 물었다·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몇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