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2
장년인이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지요·”
나는 정중하게 물었다·
“종달새 클럽이라는 게 대체 뭡니까?”
“필시 타지에서 온 분이시겠군요· 종달새 클럽은 리그베드에서 가장 전통이 깊고 명망 있는 사교회입니다·”
“가입 조건이 있습니까? 지금 가입할 수는 없는 겁니까?”
관리인이 약간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의지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 회원 분의 소개와 추천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적절한 심사도 거쳐야 하죠·”
주변에 있는 귀부인들이 내 얼굴을 흘끔흘끔 쳐다본다·
나는 리리아의 어깨에 올린 손을 살짝 늘어뜨렸다·
일전에 실베린이 빌려주었던 이터니아의 문장이 새겨진 반지가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다·
“회원이 아니라면 구경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겁니까?”
“회원 분들의 편의를 위해 다른 손님들은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나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들었죠 리리아? 어쩔 수 없네요· 옷은 다른 곳에서 사죠·”
“네에····”
나는 그녀를 달래듯이 말했다·
“에르제베트 님은 옷차림이 평범하다고 안 좋게 여기실 분이 아니에요·”
에르제베트를 언급하자 리리아나 관리인이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그야 무작정 내뱉은 말이니 이들이 알아들을리 없었다·
“···?”
“무도회를 준비할 때 찾아가보라고 소개받은 곳이 있거든요· 정 아쉬우면 어서 거기로 가요· 더 지체하면 교수님이 기다리실 거에요·”
관리인이 클럽 회원 말고도 다른 자격 요건을 언급하긴 했지만 나는 일부러 묻지 않았다·
확실치 않은 도박수를 던진 샘인데 이것이 내게는 최선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격 요건을 묻고 적합한지 확인해 달라 하는 건 옷가게에 머무르게 해 달라고 기어들어 가는 꼴이 된다·
대마법사의 제자가 되어서 모양 빠지게 그럴 순 없지·
나는 리리아를 데리고 문밖으로 나서서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는 툭 건드리면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위태위태했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욕심을 부려서····”
리리아는 자기 때문에 괜히 나까지 망신을 당하게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명예를 중요시하는 귀족 사회에선 문전박대를 당하는 건 꽤 수치스럽게 여겨질 일이지만 나는 귀족으로 살아온 게 아니니 크게 상처받을 것도 없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냥 구경하려고 갔었던 건가요? 아니면 정말 돈을 지불하고 구매하려 했던 건가요?”
그녀는 내게 면박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그게···그동안 일하면서 모은 걸로 살 수 있을 거라···생각했는데 정말 몰랐어요···죄송해요····”
“음 보여주세요· 얼마나 모았는지·”
리리아가 잠시 주저하더니 이내 품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두손으로 내게 건넸다·
나는 이를 받아들고 안을 살폈다·
은화가 제법 묵직하게 차 있다· 리리아의 나이를 생각하면 상당히 큰 액수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많이 부족하다· 나도 액세서리를 취급하며 생계를 유지한 적 있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입장객의 자격을 따지고 출입을 제한하는 류의 고급 상점은 가격이 몇 배로 프리미엄이 붙는다·
나는 주머니를 리리아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이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할 거예요· 힘들게 모은 돈이니까 더 가치 있는데 써요·”
“네에····”
“그리고 아직 끝난 거 아니에요· 어깨 피고 당당하게 걸어요· 그리고 누가 불러도 마차 문 열 때까지 절대 뒤돌아 보면 안돼요·”
***
두 남녀는 관리인이 뭐라 질문할 새도 없이 빠르게 나가 버렸다·
관리인 하비에겐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묘한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에르제베트?
너무도 당당하게 그 이름을 입에 올려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자격 요건이 못 미치는 이들 중에 모두가 알법한 귀족이나 고위 관료의 이름을 대며 친분을 과시하는 식의 꼬장을 부리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헌데 시퍼렇게 젊은 청년이 허세를 부리는 것치고는 과하지 않은가? 에르제베트라고?
이상하다·
굉장히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확신이 되었다·
자리로 돌아간 하비에게 한 귀부인이 다가와 물었다·
“좀 전에 그 청년은 누구죠?”
“다시 올 일은 없을 겁니다· 불편하셨다면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부인·”
“뭔가 착오가 있었던 건 아니죠?”
하비가 눈을 좁히고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마법사의 제자가 이번에 이터니아에 입학한다더군요·”
“그건 저도 이미 들은 바 있습니다·”
“사교 활동에 비교적 호의적이고 무엇보다 상당한 미남이라더군요·”
“예· 그렇습니다만·”
사교계의 중심이 되는 건 언제나 과시를 즐기고 이것저것 떠들기 좋아하는 귀부인들이었다·
혼사가 급한 노총각이나 여자에 목마른 배나온 귀족들이 사교회에 자주 참석하긴 했지만 이들은 별로 환영받지도 않았고 주류가 될 수도 없었다·
어린 영애들 또한 주기적으로 새로 들이긴 해도 이들 또한 그리 환영받지는 못했다·
이들에게 영입 일순위가 되는 건 화제성이 짙은 젊고 유망한 남자였다·
이미 하비에게도 요주의 인물 리스트가 전해져 있었다·
앞서 언급한 대마법사의 제자는 모든 조건을 충족한 사교계 최대어였다· 이미 몇몇 사교회에서는 그와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쏟고 있었다·
“그러니까· 소문대로 갈색 머리였고· 굉장한 미남에다 이터니아의 반지를 끼고 있고···· 제가 잘못 본 건가요?”
“이터니아의 반지를 끼고 있었다고요?”
하비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네· 그리고 저 앞 광장에서 이터니아 교직원의 마차가 계속 대기하고 있던데····”
망치로 한 대 맞은 듯이 머리가 멍해지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니까 방금 문전박대를 당하고 나간 남자가 대마법사의 제자였다고?
대마법사· 제기랄 대마법사라니··! 에르제베트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 일을 이유로 들어 훗날 사교회 초대를 단박에 잘라낼 수도 있었다·
최악의 상황까지 가면 가게의 위신과 클럽과의 관계는····
***
등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잠시만요!”
리리아가 잠깐 움찔했지만 나는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계속 가요·”
리리아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쭈뼛거리며 내 말을 잠자코 따랐다·
우리는 다급한 요청을 무시하고 마차에 다가갔다·
나는 먼저 마차 문을 열고 리리아에게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그녀가 마차에 한 발을 올리자 뒤에서 또다시 누군가 소리쳤다·
“잠깐 기다려주십쇼!”
그제야 내가 리리아를 붙잡고 말했다·
“리리아 지금이에요·”
“네?”
“이제 뒤돌아봐요·”
나와 리리아가 동시에 몸을 돌렸다· 좀 전에 봤던 장년인과 두 명의 종업원이 황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마차 앞에 멈춰 선 그들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한편으론 기품을 유지하려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크흠···후 잠시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희는 오랜 기간 이터니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이터니아의 졸업생을 비롯해서 신입생 분들 모두를 아울러서 말이죠· 저희는 수십 년간 이터니아를 거쳐가시는 분들에게 최고의 의복을 제공해드렸습니다· 이터니아와 함께한 역사는 저희 가게의 오랜 자부심이 되었지요·”
“····”
장년인이 옆에 있는 종업원에게 손짓했다· 그러고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이건 결례를 범한 것에 대한 심심한 사과의 의미로 드리는 선물입니다·”
종업원이 내게 크고 납작한 검은 상자를 내게 건넸다·
“이러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아닙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저희 ‘암말과 아카시아꽃’을 찾아와주십쇼· 아무런 대가 없이 연미복을 맞춤 제작해드리겠습니다·”
내 반응이 영 마뜩잖은지 장년인은 더욱 열을 올렸다·
“저희 ‘암말과 아카시아꽃’은 리그베드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제단사들이 제국에서 공수해 온 최고급 옷감들로 의복을 제작합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데 더 좋은 곳은 찾지 못하실 겁니다·”
“다음에 확인해 보도록 하죠·”
“꼭 다시 뵐 수 있길 기원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리따우신 아가씨께도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그럼 바쁘신 듯하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장년인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종업원을 이끌고 떠났다·
리리아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시간이 멈춘듯 자리에 서 있었다·
“먼저 타요·”
그제서야 리리아가 뻣뻣한 움직임으로 마차에 올랐다·
나는 실베린이 그려준 약도를 마부에게 건네주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창문을 손으로 툭툭 두르려 신호를 주자 마차가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선물로 받은 검은 상자를 리리아에게 건넸다·
“열어봐요·”
“···네?”
상자를 열고 안에 든 걸 확인한 리리아는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거기엔 리리아가 눈독들이던 보라색 드레스가 담겨 있었다·
“어 어떻게····”
근데 리리아의 표정이 기뻐하는 건지 경악하는 건지 구분이 안 간다·
“서 설마 다 계산하신 건가요?”
“···그럴리가요·”
***
마차는 큰 건물 앞에서 멈춰섰다·
리그베드에서 본 것중 가장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건물이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리고 위를 올려다 보았다·
굴뚝이 열개쯤 되는 것 같았는데 거기선 쉴 새 없이 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크고 두터워보이는 철문이 입구을 굳건히 막고 있고 그 앞에는 건장한 체격의 문지기들이 서 있었다·
내가 계단을 타고 올라가 현관에 서자 문지기들이 내 앞을 막아섰다·
“초대장을 보여라·”
나는 이터니아의 반지를 보이며 말했다·
“에르제베트 님의 소개를 받고 왔습니다·”
문지기들이 서로 눈빛으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곧이어 그들은 문을 열고는 나를 들여보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