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3
리리아도 세 걸음 쯤 거리를 두고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니 층고가 높고 개방감 있는 홀이 나왔다·
커다란 창문에선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잎사귀가 큰 열대 식물이 주변에 장식되어 있었다·
귀족들의 휴양지같은 느낌이다·
첫인상만으로 단박에 알 수 있는 건 여기 주인장은 굉장한 부자라는 것이다·
내 쪽으로 단발머리의 여자가 다가왔다· 곧이어 문지기가 그녀에게 수신호를 했다·
신호를 받은 여자가 내게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러고는 홀 중앙에 있는 황금색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공이어 탁 트인 공간이 드러났다·
곧장 진한 약초 향과 뜨거운 수증기가 얼굴에 훅 불어닥쳤다·
우리가 나아가는 중앙 회랑 양옆으로 거대한 온천탕이 있었다·
천장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곳으로 증기가 모두 빠져나가고 있었다·
건물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증기들은 전부 온천에서 나온 모양이다·
“우와아····”
리리아가 감탄을 하며 이리저리 둘러보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푹 숙였다·
사람들이 나체로 온천욕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랑을 중심으로 남탕 여탕이 나뉘긴 했지만 양쪽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지는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훔쳐볼 수 있는 구조다·
안쪽에는 더 고급스럽고 은밀한 구조의 온천탕들이 나왔다·
그리고 회랑의 끝에 다다르자 우리를 안내하던 단발머리의 여자가 우뚝 멈춰섰다·
우리 앞에는 커다란 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문에 조직의 상징처럼 보이는 거대한 뱀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여자는 날 뒤따라 가려는 리리아를 손으로 제지했다·
“당사자 말고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나는 리리아에게 말했다·
“다녀올게요·”
나는 문을 열고 나섰다· 그곳에는 본관에서 별관으로 이어지는 중정이 있었다·
중정을 가로지르고 별관 앞에 섰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여니 또다시 뜨거운 증기가 훅 불어와 얼굴을 달궜다·
손을 저어서 증기를 날려보내고 시야가 트인 상태에 서 내가 처음 마주한 건 여자의 등이었다·
“···?”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한 여자가 온천에 혼자 몸을 담그고 있다·
그리고 탕의 양옆에 호위 여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물밖에 드러난 여자의 등에는 대문에 새겨져 있던 것과 똑같은 뱀이 문신으로 그려져 있다·
여자는 내 얼굴을 확인하지도 않고 말했다·
“어서 와·”
“····”
“듣자 하니 에르제베트의 이름을 댔다고?”
“···그렇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런 뻔한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간이 배밖으로 나온 모양이구나·”
“제가 가지고 온 물건을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여자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뜨거운 증기를 사이로 아찔한 굴곡이 드러났다·
그녀는 내게 등을 보인 채로 앞으로 걸어서 탕 밖으로 나왔다·
시종들이 수건을 들고와 물기를 닦아주고 가운을 입혀주었다·
“난 그런 거엔 관심 없는데· 훔친 물건일 수도 있잖아?”
여자는 뱀가죽같은 재질로 된 기다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웠다·
그제서야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이십 대 초중반 정도의 젊어 보이는 인상이다·
“제 이야기를 들으실 용의는 있으십니까?”
“아니 점점 흥미가 떨어지고 있어·”
젠장· 뭐하는 사람이지· 목욕탕 주인? 고위 귀족? 거상?
이런 진땀나오는 상황을 마주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막연히 마도구 상점이나 연구실을 운영하는 괴짜 마도학자 같은 걸 기대하고 있었건만·
내 판단 실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철저하게 정보를 캐고 왔을 텐데·
“진짜 흥미가 없으셨으면 아예 절 이곳에 들이지도 않으셨겠죠·”
그녀는 옆에 있는 테이블에서 파이프를 들고 불을 붙였다·
그러곤 잠시 입에 물었다가 이내 연기를 길게 뿜어내고는 말했다·
“하아 그 잘나신 대마법사의 제자가 왔다길래 조금 기대했는데· 영 별로네·”
역시나 내 정체를 전부 꿰고 있었다·
“뭘 기대하신 겁니까?”
“글쎄 나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거?”
“그저 가벼운 용건이 있어 찾아왔을 뿐입니다·”
“날 찾아올 정도면 결코 가벼운 게 아니지·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만 달랑 이루고 가려고? 내 용건도 충족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야 교환이 성립되지·”
“돈은 충분히 가져왔습니다만·”
“넌 내가 돈이 궁한 사람처럼 보이니?”
“····”
이런· 내가 기싸움에서 일방적으로 밀리는 느낌이다·
나는 품 안에서 실베린의 편지를 꺼냈다· 이게 협상에 도움이 되주었으면 좋겠는데·
“스승님께서 전해달라 하시더군요·”
“흠·”
시종 하나가 내 편지를 받아들고 그녀에게 가져가 건넸다·
여자는 편지를 읽지도 않고 옆에 있는 장식용 화로 불길 속으로 휙 던져 버렸다·
“···!”
“···뻔하고 지루해·”
나는 침을 삼켰다· 실베린에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시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에르제베트의 소개가 거짓말이라는 것도 알고 실베린에게 좋은 감정도 없어 보이는데 날 이렇게 불러들인 이유가 뭘까·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는 없겠군요· 그쪽의 의사는 교수님께 그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내가 떠나려하자 여자가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가려고?”
챙!
호위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내게 칼끝을 겨눴다·
도발적으로 반응하는 걸 봐서는 나에게 호기심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떠나는 것도 마음대로 못합니까?”
“넌 호랑이 굴에 발을 들인 거야· 내 허락을 먼저 구해야지· 여기선 내가 왕이고 내 말이 법이니까·”
“정 안 되면 피를 봐야겠죠·”
“네가 데려온 귀여운 여자친구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나봐?”
“···어쩌실 생각입니까?”
“네가 하는 거에 따라 달렸지·”
이렇게까지 나오시겠다·
“원하는 게 뭡니까?”
여자 반쯤 풀린 눈으로 다시 입에서 연기를 뱉고는 씩 웃으며 시녀에게 명령했다·
“수로 관리인을 불러와·”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문으로 나가서 잠시 뒤에 머리카락이 미역처럼 늘어진 한 중년인을 데려왔다·
중년인은 여자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는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엘라님·”
“저 친구한테 지하수로 구경 좀 시켜줘·”
남자가 독사같은 눈으로 나를 훑어보고는 누런 이를 씩 드러내며 불쾌하게 웃었다·
“크흐흐흐·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남자는 허리춤에서 쇠사슬이 목줄처럼 길게 이어진 수갑을 꺼내고는 내 양 손목에 채웠다·
그러고는 내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품 안에서 금화 주머니와 가면 약초 리스트 운철 팔찌 사탕 심지어 이터니아의 반지까지 빼내서 압수했다·
기사들이 전부 내게 칼을 겨누고 있는 데다 리리아를 들먹이고 있는 상황이라 무작정 저항할 수는 없었다·
이상하다· 이럴 수가 없는데·
“····”
수로 관리인은 쇠사슬을 붙잡고 개 목줄을 다루는 것처럼 나를 잡아끌었다·
“따라와라·”
호위 기사 둘이 칼날을 세우고 내 뒤로 따라붙었다·
나는 잠잠히 관리인을 따랐다·
복도를 지나 어느 물빠진 욕탕에 이르렀다· 수로 관리인이 벽에 달린 마석을 조작하자 욕탕 한쪽 벽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안쪽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숨겨져 있었다·
관리인이 나를 이끌고 그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니 격자 모양으로 통로가 난 지하 수로가 나타났다·
수로 관리인이 호위 기사들에게 허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이제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호위 기사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위로 올라갔다·
벽에 걸린 마석들 덕에 완전히 어둡지는 않다· 간간이 보이는 빛줄기에 증기와 거미줄 쥐뼈 벌레와 버섯이 비친다·
지독한 하수구 냄새가 코를 찌른다·
관리인은 지하 수로에 더 깊이 들어가 두터운 철창으로 구역이 나뉜 지점에서 멈춰섰다·
관리인이 철창의 잠금쇠를 풀었다· 그리고는 내게 붙어 다짜고짜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퍽!
“커헉!”
복부에서부터 찌릿한 통증이 등 뒤로 퍼져나갔다·
망할 더럽게 아프네·
“환영식이 좀 지나친 거 아닙니까?”
“시끄럽다·”
또 한 번 복부에 주먹을 쳐올렸다·
퍽!
나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몸으로 받아냈다·
연이어 무차별 폭력이 가해졌다·
둔탁한 타격음만이 지하수로를 가득 채운다·
관리인은 적당히 주먹 찜질을 마치고는 내등을 발로 걷어차서 철창 안으로 밀어넣었다·
나는 그대로 앞으로 엎어졌다·
뭐 잘못한 것도 없는 사람 가지고 이러는 건 선을 많이 넘은 것 같은데·
나는 핏기를 머금은 침을 뱉어내고는 말했다·
“···주먹을 놀릴땐 사람 봐가면서 하십쇼·”
이에 관리인이 킬킬거리며 나를 비웃었다·
“너나 상황 봐가면서 아가릴 놀려라·”
관리인이 조약돌 하나를 주워서 철창 안쪽 깊은 어둠 속으로 던졌다·
퉁퉁거리며 조약돌은 어두운 공간을 울렸다·
곧이어 어둠 속에 있던 무언가가 잠에서 깬 듯 신경질적인 울음소리를 냈다·
크르르르륵-
“···!”
“잘해 보라고·”
관리인은 철창을 잠그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 이상한 소리는 또다시 지하수로에 메아리쳤다·
크르르륵
그리고 내쪽으로 육중한 발소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벽에 걸린 마석의 희미한 불빛을 받고 그 모습이 드러났다·
기이할 정도로 거대한 상체와 짧은 다리· 돌이 박힌 듯 우둘투둘한 외피· 통나무 같은 굵기의 팔뚝·
마수였다· 내가 기억하는 게 맞다면 그 모습은 분명 바위 트롤이었다·
몇몇 도시에서는 바위트롤을 조련해 땅굴을 파는데 이용한다고 들었는데·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크르륵! 크르르르륵!
바위트롤은 낯선 침입자 때문에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트롤이 당장 달려들 것처럼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엘라라는 여자는 날 죽일 작정인 건가·
이렇게 앞뒤 안 가리고 막무가내로 행동해도 되는 건가· 위화감이 든다·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나는 몸을 천천히 일으키고는 천장과 지반을 살폈다·
조금 난리 친다고 무너지진 않을 거다·
일단은 눈앞의 위협부터 처리하고 봐야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개인적인 사정으로 당분간 비정기적으로 연재됩니다· 죄송합니다· (_ _)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