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5
나랑 이미 안면이 있다는 이야기인가? 이터니아 학생 전부를 통틀어도 나와 안면이 있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다·
“혹시···저랑 같은 학년입니까?”
엘라가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너에 대해서 물어봤다는 것만 알아 둬· 사정 상 더 이야기해줄 수는 없어· 아직 입학식도 안 했는데 너무 앞서나갈 필요도 없고·”
“알겠습니다·”
최소한 그쪽은 나를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괜히 물어봐서 궁금증만 더 크게 키웠다·
“이만 가볼게· 푹 쉬어·”
엘라는 내 가면을 챙기고 마침내 자리를 떴다·
그제야 긴장이 한층 풀린 나는 의자에 한껏 늘어졌다·
그리고는 멍하니 엘라가 준 펜던트를 살폈다·
마름모 꼴의 은빛 금속과 그 안에 정체 모를 새하얀 수정이 박혀 있었다·
이게 내 목숨을 살려줄 거라니· 언젠가 흑마법사를 마주하게 될 날이 올 거라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흑마법사라·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말이 사실 잘 와닿지 않는다· 천금이라 하면 굉장히 크게 느껴지는데 억만금이라 하면 실감이 나지 않는 거랑 비슷하다·
실베린은 왜 내게 흑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도 의문이다·
나는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
어째 장신구들이 하나씩 늘어가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실베린의 반지 에르제베트가 인챈트한 팔찌· 거기에 엘라의 펜던트까지· 여기서 더 늘어나면 사치를 좋아하는 철없는 도련님처럼 보일 것 같은데·
그러던 중 누군가 문을 노크한다·
“네 들어오세요·”
젊은 남자 시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데미안 님 객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나는 서둘러 테이블에 있는 짐들을 챙겼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서 시종의 안내를 받고 복도로 나섰다·
가는 도중에 시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온천욕은 필요없으십니까?”
“지금은 그냥 눕고 싶네요· 다음에 하겠습니다·”
“온천은 개인실로 제공해 드릴 테니 주변 시선은 크게 의식 안 하셔도 될 겁니다· 혹여나 생각나시면 언제는 불러주시길·”
그렇게 한동안 나아가 객실 문 앞에 섰다·
내가 문을 곧장 잡아당기자 누군가 놀래키듯 안에서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소리친다·
“짠· 이거 봐요· 이쁘죠!”
리리아가 새 옷을 입고 자랑하듯 치마 중간을 손으로 살짝 올리고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나와 시종은 잠시 정신을 못 차리고 그 앞에서 멀뚱히 서 있었다·
리리아는 내가 올 때까지 객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헌데 나 말고 시종까지 더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는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두 남자의 난감한 표정을 마주한 리리아의 눈빛이 크게 흔들린다· 급기야 얼굴이 온천물에 담근 것처럼 살짝 달아오르기까지 했다·
시종이 헛기침을 하고는 침착하게 말했다·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럼 편안한 시간 되시길·”
“····”
***
리그베드는 삼면이 산지로 가로막혀 있는 지형이라 하늘에 구름이 걸려 있는 시간이 길었다· 그만큼 햇빛도 잘 들지 않았고 일년 중 세 달은 비가 내렸다·
해가 떨어지고 리그베드엔 가랑비가 내렸다· 시온은 로브를 걸치고 마차들을 피해 교차로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그녀는 필린의 대장간 앞에서 멈춰섰다· 입학 시험을 치르기 전 마검을 찾기 위해 들렸었던 곳이다· 그리고 여기서 가면의 남자를 처음 마주했었다·
이터니아 정상에서의 싸움을 그동안 수없이 복기해왔다· 그렇게 수차례 생각해도 그 남자를 싸고도는 기묘한 이질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검 때문인지 아니면 싸우던 방식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수많은 경험으로 실력을 다져온 시온도 그와 같은 기이한 검과 싸움 방식은 본 적이 없었다·
시온은 플린의 대장간 문을 열었다· 그 안에 들어서고 시온이 후드를 벗겨내자 검을 구경하고 있던 한 무리의 남자들이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했다· 이들 모두 시온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이터니아 입학시험 이후로 시온은 더욱 유명해져 있었다·
유명세로 이득볼 것이 없었던 시온은 전부 귀찮게 느껴졌다·
주인장에게 다가가자 그가 아는척을 했다· 시온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다시 볼 줄은 몰랐다만 어떤 일인가?
“조용히 이야기할 곳이 필요해요·”
주인장은 시온을 보며 조용히 수염을 쓸었다· 그는 시온의 스승과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흐음 따라오게나·”
주인장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시온을 가게 안쪽으로 안내했다· 작은 응접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둘만 남게 되자 주인장이 물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이야기가 뭔가?”
“사람을 찾고 있어요·”
주인장이 말없이 미간을 좁힌다·
“일전에 저와 같은 시간대에 찾아왔던 남자에 대한 이야기예요·”
굳이 외형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주인장은 누굴 이야기하는지 단박에 눈치챈 것 같았다·
“누구인지 알겠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입학시험에서 신세진 게 있거든요· 그 남자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요·”
그러고는 돈주머니를 꺼내서 앞에 내밀었다·
“사례는 할게요·”
주인장이 돈주머니를 보고는 모욕을 받은 것처럼 인상을 구겼다· 그러곤 팔짱을 끼고 방어적인 태도로 말했다·
“여기는 검을 취급하는 곳이지 정보를 파는 곳이 아닐세· 무슨 사정인지 모르겠지만 그 남자도 자네만큼이나 중요한 사람이지· 검에 대한 것이 아니면 돌아가게나·”
시온은 이에 잠시 고민하다 허리에 찬 마검 시벨린을 풀어 들었다· 남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손잡이를 붕대로 감고 검집 또한 특수 인챈트로 마력이 빠져나가는 걸 막아두었지만 주인장은 마검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럼 다른 걸 물어보죠· 세상엔 여러 종류의 마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검에 관해선 리그베드에서 당신보다 잘 아는 사람을 없겠죠· 이것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검도 있습니까?”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만 자네 검은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검들 중 하나일세· 자네 스승의 전성기를 함께한 물건이지· 이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시온의 의도를 주인장이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아름다운 빛을 내던 검은 시온의 마음 켠에 뼈가 시릴 정도의 질투를 다른 한 켠엔 경외감을 심어놓았다·
“모든 검이 그렇듯 상성 상 우열이 갈리는 검이 있긴 할테지· 헌데 더 높은 등급의 검이라니 지금 내게서 전설이나 신화 속의 검 이야기라도 듣길 원하는가? 만약 그 검이 부족하다 느낀다면 그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서 그런 거겠지·”
“···그만하면 됐습니다·”
시온은 대화를 마무리하고 응접실 밖으로 나왔다· 원하는 정보는 얻지 못했고 그 남자의 정체는 아직도 오리무중이었다·
그녀가 가게에서 나가려 하자 시온을 뚫어지게 보던 한무리의 남자들이 출구를 막아섰다·
리더격으로 보이는 미형의 남자가 손을 앞으로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런데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이번에 이터니아에 입학하는 필립이라고 한다· 너 정도면 우리 가문을 알고 있겠지· 나는 위대한 체이스 백작가의 장남이자···”
시온은 지겹다는 듯이 말을 끊어 버렸다·
“꺼져·”
“···뭐?”
귀족의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힌 남자가 당혹감을 감추려 억지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리 잘났다고 이런 식으로····”
시온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 들려? 꺼지라고·”
굳이 대련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이들 전부 그녀의 검을 단 한 번도 막아낼 수 없는 무능한 인간들이라는 걸·
형편없는 실력을 가졌으면 아무리 돈이 많고 좋은 혈통을 타고나도 시온에겐 무의미했다·
마수 앞에선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검 뿐·
시온이 이터니아에서 상대하고 싶은 남자는 하나다· 머리는 검붉은색이어야 하고 가면을 쓰고 허리엔 목검을 차고 있어야 했다· 그러지 않은 남자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성격이 이렇게 개차반일 줄은 몰랐군·”
그녀의 기세에 눌린 필립이 불평하며 슬그머니 옆으로 비켜섰다·
***
“축하합니다 아가씨·”
릴리트의 마법을 가르치던 개인 교사가 편지를 받고 곧장 리그베드로 올라와 저녁 식사 자리에 함께했다·
“감사합니다· 콜비어 선생님·”
“입학 시험에서 그 정도의 성과를 내셨으면 분명 높은 성적을 기대하셔도 될 겁니다·”
분명 기뻐할 일이다· 꿈에 그리던 이터니아 입학을 이젠 확정지을 수 있었다· 운이 좋게 흘러간다면 마법부 차석의 성적을 기대해도 좋을 정도였다·
다만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게 있었다· 스스로 기지를 발휘해 그레이스 산맥 중반까지 빠르게 도달한 건 맞지만 최상위권의 성적을 얻어내는 데에 릴리트가 해낸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한 사람을 졸졸 따라갔고 그가 열어놓은 루트를 플렌테라가 다시 수복하기 전에 따라 올라갔을 뿐이다·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과분할 정도로 좋은 성적을 얻어내도 되는 걸까·
릴리트는 습관적으로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으려다 흠칫했다·
입학시험 때 그 남자의 피를 닦아주었던 손수건이었다· 그 검붉은 얼룩은 아직도 진하게 남아 있었다·
일전에 동굴에서 빗물로 세탁한 이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약품을 써서 지워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스스로도 그 이유를 딱 잘라 말할 수 없었다· 본디 청결함을 중요시하는 성향이었으나 이것만은 예외였다· 그 핏자국을 보면 형용하기 힘든 묘한 기분이 들었고 그게 딱히 싫지는 않았다·
시종이 그 손수건을 보곤 식겁을 하고 릴리트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저희에게 맡겨주시면····”
“아뇨 됐어요·”
그녀는 다시 손수건을 품 안에 넣자 개인 교사가 의문을 표했다·
“아끼시는 손수건 아닙니까? 어쩌다가····”
“네 애착이 가득한 손수건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제 피는 아니니까· 절 도와준 사람의 피예요·”
콜비어가 릴리트의 표정을 유심히 보며 말했다·
“그렇게 흔적을 남긴 걸 보면 그 분에게 좋은 감정이 남으셨나 봅니다·”
릴리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음 글쎄요· 조금 더 복잡한 감정이에요·”
그녀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 그보다 선생님은 혹시 빛나는 검을 보신 적 있어요?”
콜비어가 턱수염을 손가락으로 쓸면서 답했다·
“빛나는 검이야 세상에 수두룩하게 많지요·”
“그러니까 검 전체가 새하얗게 빛을 내고···엄청 신비하고 강해 보이는 건데····”
“아마도 인챈트된 검일 겁니다·”
인챈트라 하기엔 기억 속의 그 검은 많이 달랐다·
“느낌이 달라요· 그러니까···빛이 막 날아가고···신비로운 그런····”
릴리트가 봤던 빛의 검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내기 힘든 고결한 기운이 있었다· 헌데 그 느낌을 제대로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에휴 아니다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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