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7
어딘가 익숙하면서 낯선 천장이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이불·
마음이 편안해지는 허브향·
나는 깜짝 놀라서 이불을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내 침대에 누워 있는 게 아니었다·
주변을 보니 여긴 확실히 실베린의 방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실베린은 보이지 않는다· 날 여기 재우고 자리를 비운 것 같다·
내 몸에는 실베린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엉겨 붙어 있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실베린의 침대는 나조차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었다· 잠버릇처럼 나도 모르게 올라온 건가? 예법에 어긋난 무슨 실수를 한 건 아니겠지?
실베린의 침구를 이리저리 살폈다· 다행히도 티끌만한 얼룩도 없이 깨끗하다· 자다가 침은 안 흘렸구나· 다행이다·
죽을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괜히 진땀이 흐른다·
나는 서둘러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문 밖으로 나섰다·
시퍼런 하늘에 해가 하늘 높이 떠 있다· 세상 모르고 늦잠을 퍼질러 잤구나· 어쩐지 개운하다 싶더만·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 메이드와 마주쳤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일어나셨나요? 실베린 님께서 오늘 수련 일정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네 알겠습니다·”
메이드가 고개를 들고 내 얼굴을 보고는 흠칫 놀라고 황급히 시선을 피한다·
“···?”
그러고는 도망치듯 후다닥 계단을 올라갔다·
환복을 위해 내 방으로 나아가는 도중 복도에서 또 다른 메이드를 마주쳤다·
그녀도 내 얼굴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어머나·”
그러고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서둘러 내 시야에서 빠져나갔다·
뭐지· 나는 손가락으로 내 머리칼을 쓸었다· 자고 일어나서 조금 붕 뜨긴 했지만 기괴할 정도로 산발이 된 건 아닌데·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나는 방에 들어가서 문을 꾹 닫았다· 그리고 거울 앞에 다가갔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나는 잠시 멍해졌다·
“····”
내 양 볼에는 새빨간 입술 자국이 찍혀 있었다·
***
작은 소녀 하나가 곰인형을 껴안고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잠들 시간이 되고 가신들이 모두 잠이 들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시각이면 항상 무슨 일이 벌어졌다·
창문이 흔들리고 책이 알아서 떨어지고 갑자기 촛불이 켜졌다·
두 눈과 귀로 똑똑히 확인한 것들이지만 공포에 질린 어린 소녀의 말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날 밤에도 소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무언가를 피해 복도로 나왔다· 촛불 하나에 의지해 누구라도 나와서 그녀와 함께해 주길 바라며 어둠을 뚫고 움직였다·
그리고 복도 한쪽에서 누군가의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곳에서 불빛이 새어나왔다·
“제발···제발···살려주세요·”
“닥치고 가만히 있어···금방 끝날 테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는 그곳으로 다가가 문을 빼꼼 열어 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괴한 광경을 마주했다·
한 남자가 시녀 하나를 벽에 밀어붙이고 옷을 벗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소녀에게 너무도 친숙한 사람이었다·
남자는 뒤에 누군가 있다는 것도 모른채 시녀를 겁탈하는데 열중했다·
소녀는 안고 있던 인형을 떨어뜨렸다·
“아···빠?”
루나는 식은땀으로 온몸이 흥건해진 상태로 잠에서 깼다·
“하아 하아····”
입학 시험이 끝난 이후로 그녀는 편안하게 숙면을 취한 적이 없었다·
루나는 서둘러 서랍에서 약초 분말 통을 꺼내 입에다 한 스푼 털어넣고 물을 들이켰다·
강한 효과를 위해 중독성이 강한 약재까지 복용하고 있음에도 루나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손톱이 툭툭 부러지고 물컵을 드는데도 손이 덜덜 떨렸다· 눈 밑에는 조금씩 다크서클이 드리우고 있었다·
지독한 악몽 때문에 루나는 가뭄 속의 나무처럼 점점 말라가고 있었다·
정신적인 고통이 제일 심각했다·
루나의 유년기를 고통으로 얼룩지게 만든 끔찍한 트라우마가 매일 그녀를 찾아왔다·
매일 밤 그녀는 어린 소녀가 됐고 잊고 싶던 더러운 기억을 생생하게 재경험했다·
루나는 벽을 짚어가면서 방을 나섰다·
몸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져 있었다·
대체 왜 이런 고통이 반복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조금 더 강한 약이 필요해·
거실로 나온 그녀는 서랍장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실베린이 있었다면 분명 문제를 해결해주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녀에게 도움을 받을 만큼 받았고 더군다나 그녀는 자신을 신경 써줄 만큼 여유로운 사람도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던 중 복도에서 한 여자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흠칫 놀란 루나가 복도 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누구야?”
이상하게 여기는 루나의 귀에 또다시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마치 벽과 천장과 하나가 되어 그 안에서 집안 전체를 울리는 것 같았다·
루나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너 누구야· 나와 나와!”
[ 여기야· ]
거실 한구석 촛불의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곳에는 새카만 사람의 형상이 가만히 서서 루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나가 적대적인 태도로 말했다·
“너···너 대체 뭐야·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야·”
[ 난 항상 너와 함께 있었어· 네 어린 시절부터· ]
“웃기지 마·”
[ 가엾구나· 교수님이 있었다면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
루나는 어릴 때부터 남들은 보지 못 하는 것들을 감지해낼 수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시달린 덕에 이것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닥쳐·”
[ 남자들이 싫지· 안 그래? ]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 남자들이 널 망치고 있잖아· 널 망가뜨린 건 네 아버지야· 간신히 구원받았지만 네 구원자의 옆자리엔 이상한 남자가 끼어들었지· 마법도 정령술도 모르는 무가치한 놈이 대마법사의 옆자리에 끼어들었어· 거기는 응당 네가 있어야 하는 자리야· 그 여자의 제자는 네가 되어야 했어· 그랬다면 지금 같은 고통도 겪지 않았겠지· ]
“교수님이 직접 판단하신 일이야· 그 일에 대해서 맘대로 지껄이지 마·”
[ 불합리하지 않아? 그 여자의 제자로는 세상에 너보다 적합한 사람은 없었어· ]
“썩 꺼져· 꺼져 버려·”
루나의 신경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불청객의 헛소리를 듣는 건 굉장한 고통이었다·
[ 다 불태우고 새로 써나가면 돼· ]
“난 네가 뭔지 알아· 보나 마나 내 힘을 탐내는 반쪽짜리 사념체겠지·”
루나가 손에 화염구를 소환했다· 이게 소용이 없을 건 뻔히 알고 있었지만 듣고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기에 뭐라도 부셔야 진정될 것 같았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거야? 누가 널 부른 시킨 거지?”
[ 깔깔깔깔· 나는 너야· 나는 네 어둠이고 그림자이지 난 항상 너와 함께였어· 단지 네가 내 존재를 외면하고 살았을 뿐이야· 이건 나의 생각이면서 너의 생각인걸· ]
그리고 정말 짜증 나게도 검은 형체가 한 말은 루나의 폐부를 정확하게 찌르고 있었다·
“시끄러워···닥쳐 닥쳐!”
루나가 화염구를 시커먼 형체를 향해 내던졌다·
쨍그랑!
무언가 크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시커먼 형체는 온데간데 없고 그 자리엔 깨진 거울 조각이 나뒹굴었다·
***
분명 수련이라고 들었는데 실베린의 화사하고 가벼운 옷차림을 보면 그냥 소풍을 떠나는 것처럼 보인다·
나와 실베린은 도시락을 챙기고 마차에 올랐다· 나는 검을 따로 챙기지도 않았고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다·
대체 무얼 하려는 걸까·
주변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속도로 마차가 나아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실베린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제자야·”
“네·”
“왜 내 얼굴을 똑바로 못 봐?”
“···제가요?”
“봐· 지금도 못 보잖아·”
“····”
실베린이 가자미눈을 뜨고 나를 파고들 것처럼 쳐다본다·
“내가 어제 무슨 이상한 소리라도 했니?”
“아뇨· 음····”
“뭔데 돌이켜보면 분명 잠결에 뭐라 중얼거리긴 한 것 같단 말이지·”
“선생님이 잠들 때까지 남아 있으라 하셨어요·”
“그건 나도 기억해·”
“그 지하····”
실베린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되묻는다·
“지하?”
“아뇨· 그냥 먼저 내려가면 크게 혼내줄 거라 하셨어요·”
“내가 그런 소리를 했어?”
“네····”
실베린이 잠시 멈칫하고는 시선을 창밖으로 휙 돌린다· 그녀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조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으음 내 술주정이 심했네····”
침묵이 이어진다·
실베린과 같이 있는 게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다·
내가 실베린의 얼굴을 못 보는 건 그녀가 한 말 때문이 아니었다· 내 볼에 남아 있었던 ‘그거’ 때문이지·
그녀의 입술엔 똑같은 색이 칠해져 있다· 실베린이 저지른 게 분명한데 이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 이런 능청스런 모습이 한편으론 정말 여우같이 느껴진다·
다행히도 마차는 멀리 이동하지 않았다· 잠시 한눈판 사이에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더 오래 있었으면 어색해서 견디기 힘들었을 거다·
실베린이 정한 수련장소는 전에도 이터니아를 오가며 봤었던 강변 모래사장이었다·
위젤 호수처럼 탁 트인 풍경이긴 했는데 다른 점이라면 이곳은 산세와 강물이 어우러져 조금 더 역동적인 느낌이다·
검도 통나무도 없는데 대체 뭘로 수련하려는 걸까·
“가자 제자야·”
나는 도시락 바구니와 담요 돗자리를 챙기고 내렸다· 모래들이 하얗다 못해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제법 아름다운 경치였다·
실베린은 햇볕이 잘 들고 땅이 고른 곳에 자리를 잡고 내게 손짓했다·
“여기야 여기·”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 돗자리를 피고 모서리를 조약돌로 고정하니 실베린은 그 위에 그대로 누워 버렸다·
“좋다· 너도 어서 누워·”
그러곤 자신의 옆을 손으로 팡팡 친다·
뭐 다 좋다· 좋기는 한데 이게 수련이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선생님 이건····”
“수련 맞으니까 어서 누워·”
“····”
“이번 수련은 조금 다를 거야· 정령술을 가르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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