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8
바람 때문에 실베린의 치마가 무릎 위로 펄럭인다·
속이 다 보일 것 같아 나는 담요를 곱게 펴서 그녀의 다리 위에 덮어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담요를 잠버릇이 좋지 않은 사람처럼 발로 차서 걷어내버렸다·
모래사장으로 밀러난 담요를 나는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필요 없어· 나 몸에 열이 많아서·”
“····”
“빨리 누워·”
나는 담요를 다시 줍고선 이런저런 잡생각을 버리고 그녀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하늘엔 조각구름이 천천히 움직인다· 더할 나위없이 좋다·
“이터니아는 정령술을 수련하기 참 좋은 곳이야· ”
“선생님 궁금한 게 있어요·”
“말 해보렴·”
“이터니아는 겨울이 없는 건가요?”
그냥 따뜻한 지역이겠거니 생각은 했는데 조금 이상하다· 이제는 12월에 접어들었고 여기는 위젤보다 지도상 한참이나 더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맞아· 없어· 겨울에 접어들면 플랜테라의 움직임이 둔해지니까 지워 버렸지·”
내가 잘못 들었나· 계절을 지워버린다고?
“그게 가능한 건가요?”
“평범한 인간들은 불가능하지· 에르제베트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거야·”
한 지역의 계절을 통제할 수 있다니· 마법을 넘어서 신의 영역처럼 느껴진다·
“그게 한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건가요?”
“한 사람의 힘으론 불가능해· 제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고 해도 그 마력량엔 한계가 있거든· 하지만 자연과 정령의 힘을 이용한다면 달라지지·”
나로서는 정말 까마득한 영역이다·
“몸에 내제된 힘을 이용하는 걸 넘어서 대지나 자연 정령 신성력 같은 외부의 초월적 힘을 끌어다 운용할 줄 알면 대마법사가 될 수 있단다·”
“····”
“이제 정령술에 조금 흥미가 가니?”
“···저는 뭘 하면 되나요·”
“바람을 느껴· 햇빛도 느끼고 강물의 흐름· 모래의 질감· 따뜻함과 차가움 모두 피부에 새겨·”
그냥 느긋하게 누워있으면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네 피부 솜털 하나하나에 전부 눈코입이 달려 있다고 생각해·”
“상상하기가 어렵네요·”
“자연과 정령에 대한 감응력을 키우는 거야· 태어날 때부터 이게 되는 사람도 있고 죽을 때까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 너는 후자에 가까우니까 부단히 노력해야 돼·”
뭐 마법이나 정령술 쪽에는 끔찍한 수준의 재능이라는 건 이미 여러번 들어 왔다·
실베린의 말대로 실천하려니 온몸에 눈이 달린 신화 속 괴물만 연상될 뿐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어떻게 접근해야 되는지 영 감이 안 오는데·
나는 호흡을 느리게 하고 온몸의 감각에 집중했다·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은 적당히 선선하다· 모래는 푹신하고 점점 나른해진다·
그렇게 몇 분 있으니 눈에 힘이 조금씩 풀리고 조금씩 잠이 쏟아진다·
그렇게 눈이 감기려는 순간 실베린의 손이 내 한쪽 볼을 꼬집는다·
“···?”
“자면 안 돼·”
이런 다 지켜보고 있었구나·
나는 한쪽 볼의 통제를 잃은 상태로 말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위젤에서 통나무를 가지고 수련할 때나 입학시험 때나 자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드러눕는 건 지겹게 해왔는데 대체 뭘 다르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감응력이 열려있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닫혀 있다고 나쁜 것도 아니란다· 조급할거 없어·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느껴 봐·”
좋지만은 않다니 무슨 이야기일까·
“그런데 감각이 열려 있는게 왜 좋은 것만은 아니죠?”
“음···· 청력이 굉장히 좋은 사람을 상상해보렴· 개미의 발소리· 모기의 날갯짓· 사람의 심박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청력이 예민한 사람 말이야· 넌 그런 비범한 청력이 있으면 그 이점을 제대로 이용하면서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모르겠어요·”
“세상의 모든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해 봐· 잠 한번 편하게 못 자겠지· 일상에도 심각한 문제가 생길거야· 심하면 미쳐버릴 수도 있고· 정령체에 대한 감응력이 극도로 높으면 비슷한 일을 겪는다고 보면 돼· 원하지 않는 자극을 강제로 받아들여야 하지·”
이제 조금 이해가 된다· 루나 같은 아이가 굉장히 예민하게 굴던 것도 이유가 있었구나·
“네 감응력은 그 반대 극단에 있어· 꽉꽉 틀어막힌 게 마치 바위나 쇳덩이 같아· 적나라하게 말하면 평생 수련한다고 해도 중급 정령 하나 다루기도 버거운 수준이야· 뭐 내 도움을 받으면 조금 나아지겠지만·”
“그럼 저는 정령을 못다루는 대신 뭐가 좋은 거죠?”
내 실망한 표정을 보고 실베린이 픽 웃으며 말한다·
“그것도 네 재능이야· 주변 상황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 정신적으로 그 누구보다 강인해질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
정신력이라 정령을 자유롭게 다루는 능력에 비해 그리 대단한 이점은 아닌 것 같은데· 억지로 좋은 이야기만 해주는 건 아니겠지?
“동전의 양면과도 같군요·”
실베린이 꼬집은 손을 풀고 내 볼을 살짝 어루만졌다·
“맞아· 만약 이곳이 사악한 정령체들로 가득한 저주받은 땅이라 해도 안전하다 판단되면 너는 낮잠도 가능하겠지· 실제로 그런 곳에선 너 같은 부류가 가장 안전해· 감응력이 좋은 애들은 한시간도 버티기 힘들 거야·”
“전에 루나가 저한테 뭐라고 이야기 했었어요· 갑자기 찾아와서는···아이들이 저를 피한다고요· 그거랑도 관련 있나요?”
실베린이 자신의 팔을 베며 내 쪽으로 돌아눕고는 말했다·
“어느 정도는 있지· 근데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정령들은 널 싫어하면서 두려워해· 정령은 좀처럼 두려움이란 감정을 가지지 않는데 말이야· 나 정도의 힘을 마주한 게 아닌 이상·”
정령이 싫어하는 건 두루 갖춘 별종이란 말로 들린다· 그래도 정령 하나쯤은 다뤄보고 싶었는데 그녀가 이렇게 말하니 앞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저는 정령에게 아무런 위해를 가할 수가 없는데 왜 두려워하죠?”
“글쎄 네 검하고 연관이 있을 거라 대략적으로 추측은 하는데 확실히 알려면 연구를 해봐야지·”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니 정령이 너무도 멀게만 느껴져요·”
“내 앞에서 별 걱정을 다 하는구나· 내가 작정만 하면 동네 개한테도 정령 계약을 맺게할 수도 있으니까 그냥 하라는 대로 하렴· 제자야·”
“····”
실베린은 신기한 생물을 다루듯 검지로 내 볼을 쿡쿡 건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네 형질이 마음에 들어· 나랑은 완전히 정반대거든· 나한테는 없는 형질이라서 그런지 같이 있으면 중화되는 것처럼···그냥 마음이 편해져· 네 재능은 그걸로 충분해· 제자로서 합격이야·”
비슷해야 오히려 제자에 걸맞는 거 아닌가 싶은데· 뭐 아무렴 좋다· 합격이라니· 실베린이 마음에 든다는데 뭘 더 바라겠나·
***
로메다 숲지기의 보고문을 재차 읽던 사제 콜트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구울들의 대규모 이동에 대한 보고가 속속들이 올라오고 신성력으로 보호받던 지역 일부에서 마수의 침범 소식이 이따금씩 들어왔다·
성녀 플렌체의 힘이 약화되면서 그 빈도가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로메다 숲에서까지 불길한 소식이 들어왔다·
로메다 숲은 교단에서 직접 관리하는 신성 지대 중 하나였다·
500년 된 축복받은 나무 성목 하녹스가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땅·
성목 하녹스로부터 뻗어나오는 신성력은 인근의 여러 영지를 흑마법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숲지기로부터 추가적인 연락은 정말 없는 겁니까?”
이에 로메다 숲 조사대의 지휘관을 맡고 있는 성기사 브룩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콜트가 손에 쥔 서신을 도로 품 안에 넣고는 말했다·
“···서둘러야겠습니다·”
콜트를 비롯한 나머지 서른 명의 성기사들은 전부 교단의 명을 받고 성도에서 직접 파견을 나왔다·
성목 하녹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로메다 숲은 웬만한 사람은 진입조차 불가능한 곳이었다·
숲지기는 한때 제국의 궁정 마법사 직위에 몸담았던 최고위에 준하는 마법사였고 로메다 숲은 강력한 환수가 수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계석이 하녹스를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숨겨두었다·
그 덕에 그 어떤 실력자나 마수가 온다고 한들 성목 하녹스에는 접근이 불가능했다·
지난 수백년간 하녹스가 위협받는 일은 없었다·
헌데 숲지기가 날린 급보에는 기이한 문장 한 줄만이 휘갈겨져 있었다·
‘하녹스가 위험하다·’
교단에선 큰일이 아닐 것이라 판단해 적은 수의 인원만 보냈지만 콜트의 생각은 달랐다·
로메다 숲에 접근할수록 불길한 예감은 더욱 진해졌다·
초겨울 가랑비에 온몸이 얼어붙을 듯이 춥고 바닥은 진창이 되어 걸음이 늘어졌지만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성기사 브룩이 말했다·
“여기서부터 로메다 숲의 권역입니다·”
콜트가 경고했다·
“언제든 적의 기습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최대한 경계하셔야 합니다·”
성기사들 사이에서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콜트가 손으로 땅을 짚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가 감지해낸 하녹스의 신성력은 믿기 힘들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더욱 서둘러야 합니다·”
콜트는 교단에서 전해준 로메다 숲의 지도를 펼쳤다· 이 광활한 숲에서 하녹스의 위치는 오직 숲지기와 교단 관계자만이 알고 있었다·
콜트가 서른 명의 성기사들 선두에 섰다·
“이제부터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지름길로 향하면 대여섯 시간이면 하녹스에 닿을 수 있었다·
긴장과 침묵 속에서 행군이 이어졌다·
해가 다 넘어갈 때쯤 이들 조사대는 하녹스를 지키는 결계석 앞에 섰다·
다행히도 결계석은 멀쩡했다· 그렇다면 하녹스는 아직 무사하다는 이야기였다· 결계 내부로 진입하려면 신성력이 있어야 하거나 결계석을 파괴해야 했다·
하녹스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콜트는 성기사들을 이끌고 결계 내부로 들어갔다·
결계가 만들어 낸 환영의 벽 너머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던 거대한 나무가 시야에 들어왔다·
콜트는 대지에 두텁게 뻗은 하녹스의 뿌리에 다가가 손을 얹었다·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니···이게 대체····”
분명 결계석이 멀쩡한데 하녹스는 그 신성력을 잃고 죽어가고 있었다·
콜트의 손등에 시커먼 물방울들이 툭툭 떨어졌다·
빗물이 아니었다· 점성이 진하고 비릿한 냄새가 났다· 그 액체는 마치 비처럼 하늘에서 연달아 쏟아졌다·
그러던 중 콜드의 등 뒤에서 성기사들이 소리쳤다·
“사· 사제님! 지금 그러실 때가 아닙니다!”
콜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성기사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칼을 뽑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하늘 위로 향하고 있었다·
콜트도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충격적인 광경을 마주하고선 충격에 잠겼다·
숲지기와 열 마리의 은빛 늑대 환수들이 목이 매달린 채로 나무에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아···아아···아····”
콜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하늘을 덮은 하녹스의 나뭇잎에는 수천 마리의 거머리들이 달라붙어서 환영식을 하는 것처럼 피를 뿌려대고 있었다·
콜트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나···나 나가야 합니다! 함정이에요! 하녹스는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성기사들이 패닉에 빠져서 잠시 주춤했다·
“어서요!”
콜트는 서둘러 일어서서 결계 바깥쪽으로 달려나섰다·
성기사들의 대열 밑에서 난대없이 팔 하나가 쑥 뻗어올랐다· 그리고는 기사 한 명의 다리를 잡고 땅 밑으로 끌어당겼다·
“으아 으아악!”
그 기사가 서 있던 땅이 훅 꺼지고 이내 그는 사라졌다·
상황을 파악한 지휘관이 그제서야 소리쳤다·
“구울이다! 구울이 매복하고 있다! 당장 퇴각하라!”
그리고 땅 밑에서 손이 뻗어나와 기사들을 연달아 낚아챘다·
비명소리가 연달아 이어졌다·
혼비백산이 되어 성기사들이 뛰쳐나갔지만 이미 한참이나 늦은 상황이었다·
콜트를 따라 결계 밖으로 살아서 나온 성기사는 고작 다섯 뿐이었다·
지휘관 또한 구울의 습격에 당해 미처 나오지 못했다·
살아나온 성기사 하나가 물었다·
“이건 설마···설마···그게 맞습니까?”
“흑마법사입니다· 더는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도망쳐야 합니다·”
하녹스의 신성력을 어떻게 뚫었는지는 의문이지만 당장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콜트는 남은 이들을 이끌고 황급히 하녹스로부터 멀어졌다·
도망가는 도중에 기사들이 계속 발을 헛디뎌 엎어졌다·
그럴 때마다 일으켜 다시 나아갔지만 넘어지는 빈도가 점점 잦아졌다·
그들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기사들이 콜트를 뒤따라오지 못했다·
콜트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열 걸음 쯤 떨어진 곳에서 기사들이 허공에 팔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사 사제님· 밤이 온 겁니까? 아 앞이 안 보입니다·”
“제가 마법으로 빛을····”
콜트는 말을 멈추고 기사들의 눈을 확인했다· 그들의 눈동자가 장님처럼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아 이럴 수가·”
전부 눈이 멀어 있었다·
콜트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제서야 결계 내부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렸다·
나무에 매달린 시체들 거머리 피·
저주 의식이었다· 흑마법사는 이미 성기사들이 하녹스를 찾아올 걸 알고 저주 의식장까지 꾸려놓고 있었다·
그는 몰려오는 절망감을 못이기고 털썩 주저앉았다·
살아서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들은 이미 흑마법사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결계 안으로 들어온 순간 아니 로메다 숲에 진입한 순간부터 죽음은 예고되어 있었다·
콜트 또한 저주를 피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야도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더 늦기 전에 콜트는 종이를 꺼내 흑마법사의 출현을 알리는 글을 적었다·
이를 스티치에 물리고 날려보낸 뒤 콜트는 눈을 감고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멀리서부터 구울의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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