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9
수련같지 않은 수련을 마치고 저택을 향해 가던 중 실베린이 어느 한 구릉지 앞에서 마차를 세웠다·
그녀는 마차에서 내리고서는 내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고는 마차로를 벗어나 숲길로 들어갔다·
실베린이 걸음을 이어가면서 나에게 말했다·
“여기 위치를 잘 기억해놔· 또 와야하니까·”
그렇게 나아가서 도착한 곳은 십여 개의 묘비가 세워진 공동묘지였다· 울창한 숲이 터 주위의 시야를 차단하고 있고 묘비는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한 듯 잡초와 이끼가 가득했다·
“이터니아에 입학하면 너에겐 두 개의 기숙사를 배정해 줄 거야· 거기에 더해서 내 저택까지 너는 세곳을 필요에 따라 오고가고 해야 하지·”
그녀는 가운데에 있는 비석 앞에 서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가면을 쓰고 내 저택에 들러야 할 때도 올 거야· 그 모습으로 정문을 드나들면 의심받기 좋겠지· 이곳은 그런 때를 위한 장소야·”
실베린이 손짓으로 나를 가까이 세웠다·
“이 비석에 손을 대고 외쳐· ‘내 몸은 대지에 영혼은 대마법사에게·’”
나는 그녀의 말대로 손을 올리고 외쳤다·
“내 몸은 대지에 영혼은 대마법사에게·”
곧이어 비석 뒤편의 바닥이 진동하며 열리더니 감춰진 통로가 서서히 드러났다·
실베린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먼저 들어섰다·
나도 그녀를 따라 내려갔다·
지하엔 일직선으로 길게 이어진 석굴이 있었다·
나와 실베린이 완전히 들어가자 입구가 저절로 닫혔다·
우리의 발이 닿을 때마다 마석으로 된 타일이 푸른빛을 내며 길을 밝혔다·
그렇게 십여 분을 나아가나 두 개의 석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실베린이 나를 문 앞으로 인도하고는 말했다·
“밀어봐·”
두터운 석문은 적은 힘으로도 쉽게 밀려났다·
문 너머에는 익숙한 공간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와인을 가득 담은 수십의 오크통들이 늘어진 저택 지하실이었다·
“가면을 쓴 상태에선 이 통로로 오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학기가 시작되면 나도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아질거야· 내가 부재중이면 네가 이 저택의 주인이야·”
“···제가요?”
“응·”
“그럼···뭐가 달라지죠?”
“네가 저택을 관리하고 내 손님을 대신 맞이해야지·”
실베린의 손님이라·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자잘한 일은 모두 집사가 관리할 거야· 다만 중대사에는 네가 직접 관여해서 판단해야 돼·”
“중대사라면····”
“일의 경중 또한 네가 알아서 판단해야 할 일이지·”
내 분수에 안 맞게 중책을 맞기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제가 저택을 팔아버리면 어쩌시려고요·”
“그게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되면 해· 좋은 일엔 내가 칭찬할 테고 안 좋은 일엔 혼내겠지· 난 완벽을 요구하는 게 아니야· 실수를 해도 괜찮으니까 네 필요에 맞게 써·”
그녀는 정말 나에게 전권을 일임하려는 거구나·
내가 방탕한 귀족처럼 매일 파티를 열 것도 아니고· 아주 가끔씩 찾아올 손님이나 잘 맞이하면 사실 별 문제는 없겠지·
“알겠습니다·”
“위계서열 상 너에게 권한이 넘어가는 게 맞아· 실제로 내 재산 상속 일순위가 너니까·”
실베린은 무심하게 말하고 내 머리를 쓸었다·
“····”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올 뻔한 걸 간신히 억눌렀다·
나는 그저 제자의 신분으로 거두어졌을 뿐이다· 심지어 실베린 마법 능력이나 지식을 계승하고 후대로 맥을 이을 수도 없다·
그런데 상속이라니·
나는 그 정도 위치에 있지 않았다· 실베린도 진지한 논의를 할 생각으로 흘린 말은 아닌 듯했다·
날 특별히 상속 최우선 순위로 지정했단 것보다는 실베린에게 남아 있는 혈족이 단 하나도 없다는 뜻에 가까웠다·
***
베르탕은 자신의 카드패를 슥 펼쳐보고는 말했다·
“걔는 언제 온대?”
“누구?”
“그 단발 여자애·”
입학시험 때 한팀으로 활동했던 트리샤를 말하는 것이었다·
세실은 눈을 좁혔다· 베르탕이 최대한 관심 없는 척 애를 쓰고 있다는 게 뻔히 보였다·
세실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포기해· 걔는 이미 임자가 있어·”
베르탕이 움찔하며 말했다·
“뭔···소리야?”
옆에서 같이 카드 게임을 하고 있던 엘리아스가 베르탕의 등짝을 크게 때렸다·
베르탕의 두터운 살집에서 찰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
엘리아스가 놀리듯 말했다·
“야 걔가 너 부담스러워서 안 온대잖아·”
“···아니 내가 뭘 했다고?”
세실이 거들어서 베르탕을 놀렸다·
“네가 자꾸 이것저것 챙겨 주던 게 좀 거북했나 봐·”
“돌겠네 아니 그냥 도와주던 거야· 왜 그렇게 오해를 해?”
베르탕이 자신의 카드패를 보면서 테이블 밑으로는 불안한 듯 다리를 떨었다·
“근데 임자가 있다는 말은 무슨 소리야?”
“몰라· 아직 어리잖아· 자기는 운명의 상대가 있다나 뭐라나·”
“운명의 상대라니· 이거 원·”
베르탕은 혼자 입술을 깨물다 저혼자 풀이 죽어서 카드를 내려놓았다·
“난 죽어·”
세실도 카드를 테이블에 던졌다·
“나도 여기까지·”
엘리아스가 판돈을 가져가면서 말했다·
“야 베르탕 오늘 침대에서 울겠다·”
베르탕이 까칠하게 물었다·
“넌 뭘 안다고 그래?”
“트리샤 임자 있다 그랬을 때 니 표정 보니까 알겠더라·”
베르탕이 잠시 당황해서 눈을 굴렸다·
“내 표···정이 뭐·”
이에 세실이 팔짱을 끼고 차분하게 비수를 던졌다·
“베르탕은 여자한테 인기 있을 타입은 아니지·”
“아니 나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니야? 이터니아 합격생에 연금술을 다룰 정도로 지적이고····”
엘리아스가 질색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연금술에 재주 좀 있다고 여자한테 인기 있으면 사교계는 연금술사가 꽉 잡고 있어야지·”
외골수가 많고 괴짜 기질과 자의식이 강한 연금술사들은 사교계 일순위 기피 대상이었다·
“그리고 넌 살부터 좀····”
“나 잘생겼단 소리 부모님이랑 시녀들한테 맨날 듣고 살았는데?”
“이게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칭찬만 듣고 자란 영식들의 고질병이야· 네 모습을 봐· 네가 진짜 잘생겼으면 이미 네 이름이 리그베드에 나돌았겠지·”
“길에서 잡고 물어보면 몇 명은 알지 않을까?”
“진지하게 하는 소리는 아니지? 네가 휴버트나 조르디 데미안 같은 애들이랑 상대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걔들이 누군데?”
“얼굴 하나로 소문난 애들·”
“니가 직접 보고서 비교하는 거야?”
“응 휴버트는 얼마 전에 봤어·”
“휴버트?”
엘리아스는 입학시험에서 안면을 트게 된 입학생 소규모 모임에 자주 참석했다·
누가 잘생겼느니 누가 전체 수석이 되느니 하는 식의 담론을 나누는 게 모임의 주 업이었다·
그리고 휴버트는 입학생 중에 누가 제일 잘생겼나 하는 논의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이름이었다·
휴버트 콜그림·
먼 조상에 드워프의 피가 섞여 있어 외형적으로 그 형질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콜그림 가문에서 휴버트만이 드워프의 형질이 없이 미형을 타고나서 ‘돌연변이 휴버트’라고 불렸다·
“어디서 봤는데?”
“얼마전에 리그베드 약초 시장에서 돌아다니더라· 가족이랑 같이 있던데·”
엘리아스의 예상과는 달리 세실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확실히 눈에 띄긴 하더라· 근데 휴버트를 왜 최고로 안 치는지 알겠더라구· 나 시장에서 걔도 봤거든· 데미안·”
“···데미안?”
이에 세실이 반문하며 관심을 보였다· 외모에 대한 호기심 때문은 아니었다· 데미안은 추천서를 받은 이들 중에 가장 큰 뒷배를 끼고 있으면서 제일 적게 활약 한 탓에 의문점이 많은 인물이었다·
베르탕이 끼어들어서 딴지를 걸었다·
“걔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말이라도 걸어봤어?”
“아니· 근데 알겠더라고· 나는 그 소문들이 그냥 호들갑인줄 알았거든· 그냥 봐봐· 아 쟤가 걔구나 바로 알 수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뭔가···그러니까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게 생겼어·”
베르탕이 또 걸고 넘어졌다·
“그냥 반반하게 생긴 행인일 수도 있잖아·”
“이터니아 교수 마차에 타던데?”
“····”
이터니아 교수라는 말에 잠시 조용해졌다· 엘리아스의 말이 맞다면 그건 대마법사의 마차란 뜻이었다·
대마법사 같은 거물이 리그베드 근방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조차 이들에겐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인물의 제자가 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야 걔 대마법사 님의 제자인 건 진짜야?”
“응· 위겔? 위젤? 그쪽 애들이 알려줬어·”
베르탕이 말했다·
“나는 다른 건 모르겠는데 데미안이라는 애가 그분 제자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 뭘 했길래 그 밑으로 들어간 거야?”
마법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 그녀와 한 시간 만이라도 독대할 수 있다면 천금을 기꺼이 내놓을 귀족과 마법사가 수두룩했고 그녀의 수업을 듣고자 이터니아에 지원하는 이들도 상당했다·
데미안은 마법사들이 꿈꾸고 동경하는 자리를 독식하고 있는 꼴이었다·
엘리아스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얼굴이 크게 한몫한 거 아닐까? 나 같아도 그냥 보자마자 아 일단 목줄부터 채워야겠다 싶을 텐데·”
“야 대마법사라면 대륙 제일가는 미소년들을 하나씩 골라 데려가서 마을을 꾸릴 수도 있을 텐데 뭐가 아쉽다고?”
“이미 마을을 꾸리고 있는데 그 중에 제일 특출난 미소년을 제자로 삼은 것일 수도 있잖아?”
“미쳤어· 불경죄에다 신성 모독이야·”
엘리아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베르탕이 입을 굳게 닫고 헛소리는 상종 않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세실이 저혼자 생각에 잠겨 나지막히 말했다·
“그보다···데미안이라는 애 좀 수상해·”
“뭐가?”
엘리아스의 물음에 세실은 대답을 주저했다·
그 틈을 타 베르탕이 먼저 선수를 쳤다·
“나도 그렇긴 해· 대마법사의 제자가 전투부라는 것부터 좀 이상하잖아? 거기다 올해 전투부가 좀 이례적인 수준이라 급이 떨어져 보이기도 하고·”
시온 게일에 이어 동급의 입학생이 한 명 더 있다는 건 이미 입학시험 때 확인했었다·
삼사년에 한 명 들어올까 싶은 재능이 올해 전투부에만 셋이 들어온 상황이라 어지간한 실력으론 주목받기는 힘들었다·
세실은 연초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가 데미안을 수상히 여기는 건 독특한 뒷배경이나 불분명한 실력 때문이 아니었다·
세실이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트리샤가 데미안에 대해서 관심이 많더라고· 서로 접점도 없는데·”
순간 베르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
***
리리아가 서신들이 수북히 담긴 바구니를 들고 데미안의 방에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그녀는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그의 방에 들어섰다·
데미안은 리리아가 들고 온 걸 보고는 말했다·
“아 고마워요·”
“이거 입학 시험 때 자리를 비운 이후로 쌓인 편지에요·”
“그렇게나 많아요?”
“네····”
리리아는 바구니를 데미안의 책상에 올려놓고는 품 안에서 가장 중요한 서신을 꺼내서 건넸다·
“그리고 이것도요·”
그녀가 따로 챙겨서 건넨 서신은 황금색 리본으로 장식된데다 이터니아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걸 본 데미안의 눈빛이 다소 진지해졌다·
그는 서둘러 서신의 봉인을 풀고 펼쳐보았다·
“····”
데미안은 다 읽고선 크게 한숨을 쉬었다·
리리아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저기····”
데미안은 이터니아의 서신을 고이 접어두고 일어서서 편지들이 담긴 바구니를 집어들었다·
“네· 왜요?”
“데미안님이 이터니아에 입학하면···기숙사에 들어가시는 거죠?”
“그쵸· 방금 읽은 게 기숙사 배정 안내문이었어요·”
그럼 학기 중엔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리리아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데미안은 벽난로 앞에 서서 바구니에 든 편지의 발신인을 하나씩 확인했다· 그러고는 내용을 확인도 안하고 휙휙 불길 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럼 학기 중엔···앗 안 돼요!”
리리아는 질문을 하다 말고 화들짝 놀라서 데미안을 제지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하는 행동이 점점 닮아가고 있었다·
“데미안 님은 정이 많은 것 같으면서도 어쩔 땐 진짜진짜 냉정해요·”
리리아가 데미안의 기숙사에 편지를 보내면 똑같이 화형 당할 것 같아 한편으론 속상했다·
그녀는 바구니를 뺏다시피 하며 잡아들고는 말했다·
“이건 혹시 모르니까 제가 챙겨둘게요·”
“···그럴 필요는 없는데· 그래서 물어보려던 게 뭐죠?”
“아· 그러니까 학기 중엔 저택에는 안 오시는 건가요?”
“아뇨· 교수님이 저택 관리를 저한테 맡기셔서 자주 드나들 거예요· 그리고 미안하지만 학기 중에도 리리아한테 신세 좀 질 것 같아요·”
리리아의 얼굴이 다시 펴졌다· 그녀는 고개를 젓고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뇨· 전 괜찮아요! 자주 와요· 꼭!”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