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
사방에서 시체 탄 내가 진동했다· 비가 와서 화염은 어느정도 소화됐다· 실베린은 잘려나간 구울의 팔이 아직도 바닥에 꿈틀거리는 걸 보고는 인상을 구겼다·
실베린은 주변을 둘러보며 머릿속으로 상황 정리를 했다·
남은 구울들은 도주했고 한동안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흑마법과 관련된 일이 아닌 건 일단 다행이었다·
실베린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소년의 멱살을 붙잡고 한쪽으로 질질 끌어냈다· 그러고는 커다란 운석에다 등을 기댄 자세로 앉혔다·
의식이 없는 소년의 목은 맥없이 아래로 푹 꺾였다· 그녀는 소년의 턱을 손끝으로 밀어올려 얼굴을 살폈다·
어리다·
떡진 더벅머리· 이제 막 사춘기를 넘겼을 것 같은 고운 살결·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목구비에는 미남자의 형상이 드문드문 비친다· 그녀는 소년의 팔뚝과 손바닥을 확인했다· 오른팔에는 적당히 근육이 잡혀 있었고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박혀있었다·
검을 배운 건가?
이토록 어린 나이에 죽음의 땅에서 기묘한 검을 들고 소년은 구울과 사투를 벌였다·
아무도 탐험하지 않는 죽음의 땅에 무엇이 소년을 불러낸 것인지·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건지·
그가 휘두르던 검은 대체 무엇인지·
실베린은 소년의 등을 받치고 있는 반쯤 땅에 묻힌 운석을 바라보았다·
그것의 중앙부에는 마치 무언가 꽂혀 있었던 것처럼 구멍이 깊게 뚫려 있었다·
이를 바라보는 실베린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산전수전 다 겪은 실베린이지만 이 상황은 그녀도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실베린은 엘프들의 기록 저장소인 엔미온 대도서관 그곳에 보관 된 스크롤에 새겨진 전설을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계시를 받은 자· 운석에 박힌 빛의 검· 신의 사랑을 받는 남자·
그리고 그 전설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듯한 소년이 그녀의 앞에 앉아 있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결론 내리기 전에 우선적으로 확인할 것이 있었다·
그녀가 턱에서 손을 떼자 소년의 머리는 다시 아래로 툭 떨어졌다·
실베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에게서 한걸음 물러났다· 그리고는 수통을 꺼내 소년에게 살짝 끼얹었다·
반응이 없자 그녀는 수통에 남은 물을 모조리 소년의 머리에 쏟아부었다· 그러곤 남은 한 방울까지 다 털어낸 수통을 소년의 머리에 던져버렸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실베린이 말했다·
“일어나·”
그제서야 소년이 머리를 부르르 떨었다·
“어 어?”
정신을 차린 소년은 머리를 털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아직 정신이 덜 들었는지 눈이 풀리고 입이 벌어진 채로 실베린을 바라보았다·
실베린은 허리에 손을 얹고 소년을 쏘아보며 말했다·
“너 뭐냐?”
“⋯?”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소년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가는 모양이었다·
그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별이 떨어지는 걸 봤습니다·”
실베린이 미동도 없이 소년을 노려보자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전 그걸 따라 왔고요····”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소년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별의 궤적만 보고 이 장소를 정확하게 찾아오는 건 불가능했다·
“마법을 쓴다거나 마력을 감지할 줄 아나?”
“전혀요·”
실베린은 소년의 당당함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이전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족속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소위 성녀와 사도라 불리우는 별종들· 그들은 정말 쥐뿔도 없으면서 무모한 짓을 해냈고 근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자기확신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 이 소년에게서 ‘계시자’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겹쳐 보였다·
“그래 그렇다 치고· 어디 소속이지?”
“이곳에 오기 전까지 하만의 어느 공방에서 금속 세공을 수련했습니다·”
“그걸 묻는 게 아니다· 검은 어디서 배웠냐고·”
“검을 배워본 적은 없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답변이다·
죽음에 땅에 제발로 기어오는 걸 미루어보아 하다못해 검술이라도 배운 줄 알았는데 금속 세공이라니·
“가족은 어쩌고?”
“····”
내내 차분함을 유지하던 소년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실베린은 그의 미묘한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가족이 없나?”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그의 정서적 취약점을 자극하는 것 같았다·
실베린의 머릿속에 난잡했던 퍼즐이 조금씩 짜맞춰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또 본인을 진정 아껴주고 삶의 방향을 지시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런 죽음의 땅에 별의 조각을 쫓아오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겠지·
소년의 앞뒤없는 무모함이 이제는 이해가 갔다·
“몇 살이지?”
“열 여섯 살입니다·”
“음···· 좋네·”
실베린의 의도를 알 수 없는 긍정에 소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가 쓰던 검을 보여줄 수 있나?”
“····”
“걱정마 뺏을 생각은 없으니까· 아니 애당초 뺏는 게 가능한지도 모르겠네·”
“운석에서 뽑고 휘두르다 정신을 잃고 나니까 검이 사라졌···습니다·”
“불러봐·”
“저는 잘 모릅니다·”
“네가 쥐고 휘둘렀으니 그건 네 검이야· 애당초 널 주인으로 보지 않았다면 손에 쥐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거야·”
“····”
그녀의 말을 듣고 소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곧이어 소년은 두 손을 어깨높이로 들어올리고 눈을 감았다· 잠시 뒤 소년의 손바닥 위에 새하얀 빛의 검이 나타났다·
‘내 조언을 듣고 바로 감각을 터득한 건가·‘
검이 지닌 힘이 강력할수록 소유자의 완력보다 마음가짐이 검을 다루는데 중요하게 작용한다·
실베린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습득이 빠르네·”
그녀가 검신에 손을 대니 아무런 촉감 없이 그대로 검신을 통과해버렸다· 실베린은 검을 만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실베린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소드마스터와 조우했고 소위 검신의 경지에 다다른 자와도 동행한 적이 있었다· 그들이 다룬 역사에 남을 명검들 중에 이런 형질의 검은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오직 전설 속에서만 들었을 뿐·
이 터무니없는 검의 주인이 16살 짜리 소년이라니·
더군다나 이 소년은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걸 손에 넣었는지 별다른 자각이 없어 보였다·
문제는 이같은 명검을 노리고 대륙 각지에서 찾아오는 불한당들이 굉장히 많을 텐데 이 소년은 스스로를 지킬 힘이 부족해 보인다는 거였다·
소년은 개죽음 당하기 너무 좋은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터니아 창립자 베른 아른스트가 보면 탄식할만한 일이다·
“충분히 봤다· 이제 넣어도 좋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 사라졌다·
“그러니까 소속이···없다 그랬지?”
소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데미안입니다·”
“돌아갈 곳은?”
“제가 일하던 공방이 있는 하만으로 돌아갈 겁니다·”
실베린은 소년의 시선을 회피하며 건성으로 응답했다·
“하만이라···· 그래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지·”
“······?”
그녀의 머릿속엔 찰나의 시간동안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실베린은 내적 갈등으로 인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걸 그냥 집으로 돌려보낸다고?’
“부상이 심각해 보이네·”
실베린은 허리에 달린 작은 가죽 가방에서 보라색 액체가 든 포션병을 꺼냈다· 그러고는 소년에게 줄 것처럼 포션병을 내밀었다가 잠시 고민하고는 가방에 도로 넣어버렸다·
“네 목숨을 구해주면 넌 내게 뭘 줄 수 있지?”
“제가 가진거라곤 그 검하고 일하며 모은 돈 조금 뿐입니다·”
“남은 건 몸뚱이군·”
몸뚱이라는 말에 데미안의 몸이 순간 경직됐다·
“····”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건 좋아하나?”
“···아뇨·”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데미안은 의미심장한 실베린의 말을 곰씹으며 상황이 좋지 않게 굴러간다고 생각했는지 마른 입을 달싹거렸다·
그는 실베린이 자신에게 높은 가치를 기대한다고 착각한 듯 보였다· 신분이나 든든한 뒷배같은 빚을 지워두면 유용할 듯한 것들 말이다·
사실은 반대였다·
소년에게 인맥이니 소속이니 이러한 잡다하게 엮인 것이 적을 수록 실베린에겐 좋았다·
실베린은 주머니에서 양피지를 한 장 꺼냈다· 이를 활짝 펼치고는 주문을 외웠다· 곧이어 양피지가 작게 그을려지더니 문자가 새겨졌다·
그녀는 이 양피지를 데미안에게 건넸다· 내용은 고대 문자로 새겨져 소년은 해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서명해·”
데미안은 양피지를 받아들고는 잠시 고뇌에 잠겼다·
‘그래 머릿속에 오만 생각이 다 지나가겠지·‘
실베린은 데미안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실베린이 데미안을 버리고 가면 그는 여지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데미안이 양피지를 들고 한참이나 시간을 끌자 실베린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걱정마· 내가 나쁜 마음을 먹었으면 굳이 이런 종이 쪼가리 없이도 충분히 널 꼭두각시로 만들었을 테니까·”
엄밀히 말해서 이건 청구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소년을 보호하고 키워주겠다는 계약에 가까웠다·
“잉크가 없는데 어떤 걸로····”
실베린은 피가 줄줄 새는 데미안의 옆구리에 눈길을 주었다·
“아·”
그는 피에 젖은 옷깃에 검지를 꾹 누르고는 곧이어 양피지 하단에 자신의 이름을 써냈다·
실베린은 다시 양피지를 돌려받고는 그녀도 자신의 검지 손가락 살점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피로 그 옆에다 서명을 이었다·
실베린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벌처럼 빠르게 날갯짓하는 구체가 그녀 앞으로 날아들었다·
그녀는 양피지를 구체의 발에다 끼웠다· 곧이어 구체는 눈 깜짝할 새에 어디론가 날아갔다·
실베린은 그제서야 가방에서 포션을 꺼내 데미안에게 던져주었다·
“상처 부위에 뿌려· 이대로 피냄새 풀풀 풍기고 앉아 있으면 구울들이 또 몰려 올거야·”
데미안은 양피지에 무슨 내용이 적혀있었던 건지 신경쓰이는 것 같았다·
“제가 서명한 건 뭐죠?”
“연을 맺는 계약·”
“무슨 연이요?”
“스승과 제자의 연·”
소년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그는 혹여나 도로 뺏길까 불안한 모양인지 서둘러 자신의 상처 부위에 포션을 콸콸 쏟아붓고는 말했다·
“왜죠?”
그의 태도가 사뭇 진지해졌다·
“네 나이에 구울을 그렇게 썰어버리는 애는 흔하지 않거든·”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제 힘이 아닙니다·”
‘오호·’
그녀는 데미안 또래의 아이들을 수도없이 봐왔다· 이 나이대엔 혈통이나 마도구로 쉽게 얻은 힘에 자만하고 도취되기 마련이었다·
지금같은 상황에선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기분에 취할만도 한데 데미안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실베린은 속으로 만족스런 미소를 삼켰다·
기특하다· 소년은 자신의 한계를 알았다· 그러면서도 계시를 따라 맨몸으로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 죽음의 땅에 왔다· 애당초 이만한 기개가 있는 아이는 흔치 않았다· 귀족 가문에서 곱게 자란 아이들과는 뿌리부터 달랐다·
데미안은 그녀에 대한 심리적 경계를 쉽사리 풀지 않았다·
“근데 당신은 대체 누구길래 절 제자로 들이는 거죠?”
실베린은 바람에 휘날리는 자신의 긴 머리를 한쪽 어깨로 쓸어모아 가슴쪽에 늘어트리며 말했다·
“그을쎄·”
실베린은 자신을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그럴듯한 수식어가 뭐가 있는지 생각했다·
자신에게 사람들이 붙여준 수식어는 너무나 많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해주기엔 민망할 정도의 것들도 많았고·
데미안이 자신을 경계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세상에 무작정 호의를 배푸는 사람만큼 의심스러운 것도 없으니까·
실베린의 머릿속엔 역시나 그것 말고는 없었다· 만인에게 능력과 신뢰를 보증할 수 있는 그 단어·
“이터니아 아카데미라고 들어봤니?”
실베린의 갑작스런 물음에 데미안은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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