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3
수행원들을 숲길을 이리저리 헤쳐 나아간다·
아무런 말도 없다·
따라가는 데엔 문제가 없다만 어딜 가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지금 기숙사로 향하는 거라면 길을 전부 기억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지금 어딜 가고 있는 겁니까?”
그러자 앞쪽에 있는 한 명이 나를 돌아보고는 자신의 가면을 툭툭 건드린다·
가면을 쓰라는 신호였다·
“····”
그리고 내 질문에는 묵묵부답이다·
이렇게 신중을 기하는 걸 보면 행선지는 비밀스럽게 꽁꽁 감춰진 곳임이 분명했다·
나는 품안에서 가면을 꺼내고 얼굴에 씌웠다·
그렇게 몇 분 나아가자 숲에는 조금씩 안개가 서리기 시작했다·
방향감각이 완전히 지워졌다· 이쯤 되니 길을 외우는 건 완전히 불가능해졌다· 지도를 준다고 해도 눈뜬 장님처럼 헤맬 것 같다·
주변에 어떤 사람의 흔적이나 이정표로 쓸 만한 것도 보이지 않는데 수행원들은 막힘없이 걸음을 이었다·
그리고 얼마뒤 안개로 흐릿한 지평선 너머로 장벽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장벽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양옆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그들은 장벽 쪽으로 다가갔다·
안개 속에서 지평선 일면을 전부 가로막고 있던 건 담벼락이었다· 왕궁의 담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장식이 화려했으며 요새처럼 두텁고 높았다·
그리고 마차 두 대가 동시에 드나들어도 될 듯한 크기의 강철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수행원들은 그 앞에서 발을 멈추고 일제히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중앙에 서 있는 남자가 말했다·
“이곳은 관계자 외엔 절대로 출입이 불가능한 금지구역입니다· 이터니아는 이 일대를 통틀어 ‘미궁’이라 부르죠· 내부엔 방향감각을 상실케 하는 강력한 교란마법이 걸려 있으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철문이 저혼자 스르르 열렸다·
그 내부는 마치 하얀 실크로 된 커튼이 쳐진 것처럼 안개가 더욱 두텁게 깔려 있다·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힌다· 얼마나 넓은지도 어떻게 오는지도 알 수 없는 곳에 내 기숙사가 있단 말인가·
나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이 안에는 무엇이 있는 거죠?”
단순히 기숙사를 위해 이 넓은 영역을 미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닐 터였다·
“고대의 마법서와 무구들을 보관하는 필라이온 대도서관과 마도학 연구소 금지된 숲 그리고 데미안 님의 마스터스 클래스의 기숙사 ‘가시정원’이 있습니다· 무단 침입자는 그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도록 보호받고 있지요·”
“····”
내가 잠시 고민에 잠기자 이를 의식한 듯 말을 이었다·
“당신은 이미 미궁 속에 있습니다· 이곳에선 자유롭게 질문하셔도 됩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건넸다·
“당신들은 누구죠?”
마스터스 클래스 심사관들과 비슷한 가면을 쓰고 있지만 분위기나 옷차림이 심사관들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저희는 필라이온 대도서관의 사서입니다· 마스터스 클래스의 일상사를 보조하면서 도서관의 장서와 무구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일개 학생에 불과한 나를 상급자처럼 대하고 있다· 기분이 이상하다·
“저는 여기서 어떻게 길을 찾아야 합니까?”
“이곳의 지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마법의 인도를 받아야 하지요·”
중앙의 남자가 옆사람에게 손짓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가면을 쓴 여자가 목함을 들고 내 앞에서 열어 보였다·
그 안에는 은색 나침반이 들어 있었다·
“오직 마법의 나침반만이 미궁에서 정확한 길로 인도합니다· 이걸 들고 원하는 곳을 말씀하시면 바늘이 행선지로 인도할 겁니다·”
내가 나침반을 잡아들자 돌연 바늘이 팽이처럼 바람개비처럼 빙빙 돌았다·
나는 바늘을 멍하니보다가 문득 생각이 들어 물었다·
“나침반을 쓰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저희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영원히 길을 잃고 어디에도 닿지 못하게 될 겁니다· 이따금 유골이 발에 걸리기도 할 테니 주의하십쇼·”
너무도 태연하게 섬뜩한 소리를 한다· 여긴 생각 이상으로 위험한 장소 같은데 정말 여기에 기숙사가 있다고···?
“···제가 만약 도서관을 찾는다면 그곳으로 갈 수 있습니까?”
“가능합니다· 마스터스 클래스에겐 도서관의 일부 장서를 열람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됩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도서관에서 저희를 부르십시오·”
“···알겠습니다·”
어떤 서적들이 보관된지는 모르지만 일반학생은 넘볼 수 없는 엄청난 권한임은 분명해 보였다·
“일단은 이동하시죠· 목적지는 ‘가시정원’입니다·”
나는 나침반에 대고 목적지를 속삭였다· 곧이어 빙빙 돌던 바늘이 멈춰서 한 방향을 가리켰다·
***
이터니아의 커다란 귀빈실에서 실베린에서 그를 내려다본다·
파견대장은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대마법사를 직접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어리다· 갓 서른줄에 접어든 자신보다 열살은 어려보인다· 대마법사라는 위명의 무게감과는 어울리지 않는 외형이다·
변방에 제자 하나만을 두고 은거한다는 세간의 이야기 때문에 막연히 목가적인 인상의 여인을 예상했는데 눈앞에 마주한 실베린은 정반대의 모습니다·
몸에 걸친 장신구는 하나같이 화려하고 귀족적이면서 종교적 관점으로 보기에 더없이 사치스럽다·
가장 당황스러운 건 미모다· 신에게 동정과 순결을 맹세하고 얼굴 가죽의 생김새에 그 어떤 가치를 두지 않는 성기사조차도 잠시 다른 생각을 품게 만들 정도로 고혹적이고 탐스럽다·
실베린의 표정은 얼음장같이 차갑다· 성기사들이 어떤 목적으로 찾아온 건지 알고 있는 것처럼·
싸늘함이 살갗을 뚫고 밀려온다·
파견대장은 자신의 임무를 다시 상기했다· 파견대를 반기든 반기지 않든 주어진 일을 이행해야 한다·
그는 구차한 안부나 잡담을 전부 잘라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성도에서 열리는 대륙 연합 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대주교님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
성도에서 연합회의를 주관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교단은 한 국가과 비견될 정도의 자금력과 군사력을 보유한 집단이다· 그래서 좀처럼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헌데 연합회의를 주관해 각국에 있는 주요 인사들을 불러 모은다는 건 교단의 역량으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다·
실베린이 물었다·
“연합회의에 날 소집시키는 이유는 뭐지?”
대마법사는 합당한 이유가 없으면 대주교든 황제든 그 누가 불러도 움직이지 않는다·
성기사들이 이렇게 직접 그녀 앞에 당도한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고 실베린을 설득하는 것·
어설픈 명분을 들먹이는 건 통하지 않는다· 그녀를 설득하려면 기밀 사항을 풀어내야 했다·
“첫째로는 성목 하녹스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교단에서는 흑마법사의 소행이 확실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실베린의 눈빛에 아무런 미동도 없이 서늘한 시선으로 성기사를 내려다본다·
“흑마법사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노리고 나타날지 확실한 건 없습니다· 다만 구울 떼가 성도 인근 영지를 압박하는 걸 봐선 최종적으로는 성도를 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두 번째는?”
파견대장은 잠시 숨을 죽인 뒤에 말했다·
“두 번째로는···· 신성검의 계승자가 나타났습니다·”
실베린이 잠시 눈을 좁히고 생각에 잠긴다· 그런 뒤 다시 되물었다·
“신성검···?”
마치 그런 것이 있었냐는 듯이·
파견대장은 그 모습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신성검 ‘룬 테브리스’는 성도의 중앙 대성전에 보관되어 있는 전설의 검이다·
오직 신의 사도만이 들 수 있는 검· 선택받지 못한 자는 그 신성력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신성검의 전대 주인은 검신이라 불리는 소드마스터 젤단 하트였다·
신성검의 새주인이 나타났다는 건 젤단 하트의 후예가 등장했다는 걸 의미한다·
실베린이 젤단 하트를 모를 수가 없었다· 이 둘은 한때 같은 전장에서 활약했었으니·
성도가 발칵 뒤집힌 사건인데 실베린은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반응이다·
“그래서 계승자는 누구지?”
“제국 로얄 아카데미에 재학중인 소년···입니다· 제게 정확한 신상을 발설할 권한은 없습니다·”
“····”
“그리고 이번 ’신성검 계승자’의 처분에 관해서 이터니아에 자문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실베린의 눈살이 잔뜩 구겨졌다· 어떤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그녀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내보이고 있었다·
실베린은 잠시 성기사들을 등지고 몇걸음 떨어졌다·
그러곤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침묵을 유지했다·
실베린이 작은 한숨을 내쉬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알겠어· 참석한다고 전해·”
***
악몽에서나 나올 것 같은 끔찍한 안개다· 불과 대여섯 걸음 앞서가는 사서들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니 말이다·
영원히 길을 잃는다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 것 같다· 이곳에선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몇 시간만 있어도 정신이상 증세가 생길 것 같은 기이한 공간이다· 이곳에 기숙사가 있는 게 아니었으면 난 이곳에 두 번다신 발을 들이지 않았을 거다·
사서를 따라 한동안 나아가니 안개 속에 한 저택의 그림자가 비쳤다·
그곳에 가까이 갈수록 안개가 조금씩 옅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한 대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터운 성벽이나 철문은 없지만 장미덩쿨이 울타리처럼 미궁과 대저택의 영역을 구분하고 있었다·
목적지였던 ‘가시정원’이다· 그리고 이곳이 내 진짜 기숙사였다·
시커먼 덩쿨과 새빨간 장미로 이루어진 정원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정원 한구석에선 플랜테라가 가위를 들고 느린 몸짓으로 가지를 치고 있다·
미궁 안에 있다는 것만 빼면 굉장히 평화로운 광경이다·
사서들이 저택으로 이어진 정원 진입로의 중간 지점에 멈춰서고는 시선을 나에게 고정했다·
“저희의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이게 끝입니까?”
그냥 달랑 데려다주고 끝이라고? 무슨 수속 절차라던가 방 배정이라던가 그런 것도 없이?
질문을 받은 사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곳 전부가 마스터스 클래스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곳의 주인이 된 학생이 졸업하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전부 철거합니다· 그러니 이 저택을 부수든 개조하든 그건 자유입니다· 물론 상의 정도는 서로 해보셔야갰지만·”
“사서님들과 상의하면 되는 겁니까?”
그들은 내 질문을 듣지 못한 것처럼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작별인사를 건넸다·
“···입학식 때 다시 뵙겠습니다·”
사서들이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조금 찝찝하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일부러 말해주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든다·
내 기숙사랍시고 배정된 커다란 저택을 보니 설렘보다는 막막한 느낌이다·
사방은 안개로 막혀 정신이상 증세가 생길 것처럼 답답하고 저택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크다·
나는 잡념을 떨쳐 버리고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 앞으로 향했다·
그리곤 양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저택의 홀 내부로 들어섰다·
곧이어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저혼자 불이 붙어 주변을 환하게 비춘다·
마법으로 관리되는 저택인 걸까·
그렇게 가만히 서서 내부를 둘러보는 와중에 등 뒤에서 돌연 말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뜨인다·
잘못 들은 건 아닐까·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이 저택에 다른 누군가가 있을 거라곤 미쳐 에상하지 못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어디선가 한 번 들어본 듯한 음성이다·
등뒤에서 작은 발소리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
나는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기척을 죽이고 있었던 건지 나와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 한 소녀가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말했다·
“사탕이···라고 했었나?”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