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4
갈색 눈동자 검은 머리칼 아직 성체가 되지 못한 고양이처럼 풋풋하고 생기가 가득한 인상의 소녀였다·
문제는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사탕이라는 별명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왜 그렇게 뻣뻣해· 우리 한 번 봤잖아 입학시험 때·”
입학시험?
“네가 세실 언니를 거점에 데려다줬던 건 기억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내가 1거점에서 세실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고 합류한 뒤에 언니가 널 ‘사탕주머니’라고 소개해줬어·”
설명을 들으니 가까스로 기억이 난다· 이 소녀는 세실의 그룹원 중 한 명이었다·
정말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재회라 다소 혼란스럽다·
“그리고 우리 하우스메이트인데 언니한테 그랬던 것처럼 말 안 할 거야?”
하우스메이트라고 확실하게 언급하는 걸 보면 더는 의심할 것도 없다·
그럼 이 소녀는 비밀 심사관도 아니고 저택 메이드도 아니고 명실상부 마스터스 클래스 동급생이라는 말이다·
“난 트리샤야· 너는?”
“···그게 네 진짜 이름이야?”
“그게 의미가 있어? 내 진짜 이름을 알아도 넌 날 트리샤라고 불러야 할 텐데?”
“그럼 너도 사탕이라고 불러·”
트리샤가 뒷짐을 지고 풋풋하게 웃었다·
“넌 정말 조금도 질 생각이 없구나? 데미안인 거 다 알고 있는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대놓고 티를 내는데 어떻게 몰라· 너 정체 감추는 거 엄청 어색해·”
“····”
“사실 내 본명을 알려주고 싶지만 원칙상 그러면 안 돼· 아니 알려줘도 되지만 알려주면 안 돼· 그래서 안 알려줄 거야·”
“···뭐?”
“그러니까···· 제국은 첩보원들을 육성할 때 훈련생들끼리 이름과 얼굴을 전부 모르게 한다는 거 알아?”
“···?”
“타국에서 신분을 감추고 첩보 임무를 수행할 때 동료라는 걸 서로 인지하면 정체를 들킬 위험이 엄청나게 커진대· 그래서 처음부터 안 알려준다나 봐·”
마스터스 클래스를 첩보 임무에 대입해서 본다면 우리가 서로의 본모습을 의식하게 될 떄 남들에게 정체를 들킬 위험이 커진다 이 소리인가·
“그래서 나한테도 안 알려준다고?”
“응· 네 연기력이 늘기 전까진·”
그래· 아무렴 좋을 대로 해라·
“우선 알아야 할 게 있어· 원래 우리는 만나면 안 됐어· 하우스메이트가 되어서도 안 됐고·”
“무슨 소리지?”
“그게 원칙이거든· 사실 여긴 내 기숙사야· 그리고 이 미궁 어딘가에 너만의 기숙사가 있을 거고 넌 거기로 가야 했어·”
“그럼 뭐가 잘못된 건데?”
“네 잘못은 아무것도 없어· 잘못된 건 내 처지뿐이야· 난 윗드러프관에도 못 가· 외출도 마음대로 못하고 수업이 끝나면 여기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해· 이 숨 막히는 끔찍한 곳에 혼자 졸업할 때까지· 상상이 돼?”
같은 마스터스 클래스지만 이 소녀에겐 조금 더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는 것 같다·
헌데 그거랑 내가 이곳에 온 거랑 무슨 상관인가·
“그래서 졸랐어· 너라도 여기 데려다달라고· 어차피 네 정체 다 꿰고 있으니까 말동무라도 하게·”
조른다?
이상하다· 이 여자애가 조른다고 원칙과 규율을 임의로 바꿔준다니· 월권행위라도 했다는 말인가·
“내 의사를 확인하는 게 우선 아니야?”
트리샤의 눈이 조금 커진다· 기대와는 다른 반응을 마주한 건지 다소 동요한 기색이다·
“걱정 마· 여기 지내다 보면 나한테 고마워할 테니까·”
“왜지?”
“나는 네 생각 이상으로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거든· 나랑 친해지면 분명 너한테 엄청난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너도 혼자 지냈으면 굉장히 외로웠을 테고·”
풋풋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묘한 자기 확신으로 가득하다·
마스터스 클래스이니만큼 남들과 차별화된 능력이 있을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난 이런 걸 요청한 적이 없다· 난 교수도 아닌 정체도 모르는 동급생에게 영문도 모르고 휘둘린 꼴이다·
앞으로 또 이러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본인 마음대로 날 들인거면 반대로 내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아니 내가 요청한 게 아니니 고마워하지 않겠어·”
“····”
“난 혼자 살아도 상관없고 도와달라 한 적도 없어· 이건 그냥 네 독단이야· 제아무리 대단한 도움을 주겠다 한들 이런 식이라면 사양하겠어·”
트리샤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말 아무 도움도 필요 없어?”
“차라리 피를 더 흘리고 말겠어·”
내말이 트리샤의 아픈 부분을 찌른 듯했다· 그녀는 짜증난다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러곤 돌연 싸늘해진 어조로 말했다·
“···그래 잘났구나· 조금이라도 날 불쌍하게 봐줄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허튼짓했네· 네 마음대로 해·”
트리샤의 눈빛에 일순 설움이 감돈다·
그녀가 내게서 시선을 돌리고 홀 중앙의 나선 계단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그리고는 아래층에도 들릴 정도로 방문을 쾅 닫아 버렸다·
***
다섯번째 면담이었다· 지난 네 번의 면담에서 아젤리스의 요청은 전부 일언지하에 거부당했고 결국 참다못한 엘라가 그녀를 설득했다·
“마스터스 클래스 학생들을 하나씩 따로 격리하는 이유가 있어· 그냥 정한 게 아니야· 오랜 기간 경험으로 정보가 쌓여서 그리 판단한 거지· 같이 묶어두면 언제나 커다란 문제가 생기거든·”
극단적인 재능· 그리고 마스터스 클래스는 재능에 따른 극단적인 삶을 산다· 아젤리스도 이해하고 있었다·
“문제 안 만들게요·”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마스터스 클래스 학생들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지 아니? 화력 하나에 미쳐서 안전장치를 전부 빼버린 폭탄 같아· 모아두면 반드시 폭발이 일어난다고· 넌 몇개월 수련하고 전체 수석을 차지하는 독종이 고분고분하게 지낼 거라 생각해?”
“실베린 교수님이랑은 잘 지내는 것 같던데요·”
엘라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말했다·
“···실베린이라서 가능한 거라고는 생각이 안 드니?”
“저도 특별해요· 아시잖아요· 저는···그냥 친구가 필요해요·”
“친구라면 세실을 붙여줬잖아· 맘에 안 들어? 왜 하필 걔야?”
“마땅한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 애가 그나마 동기잖아요·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엘라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
엘라의 생각이 맞았다·
방문을 잠근 트리샤는 목걸이를 벗어서 침대에 신경질적으로 던져버렸다·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인챈트 반지들과 팔찌도 빼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장신구들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튀었다·
아티팩트를 전부 내던진 탓에 그녀의 신체에 감돌던 마법이 빠르게 힘을 잃어갔다·
검은 단발머리는 점점 길어지더니 골반을 덮을 정도로 내려오고는 뒤이어 순백색으로 물들었다·
눈동자는 푸르게 변하고 속눈썹이 더 길어진다· 이목구비는 더욱 오밀조밀하게 재조형된다·
슬프고 답답한 일이다· 트리샤로 살아가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본모습인 아젤리스로 지내는 게 낯설어졌다·
아젤리스는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데미안은 기숙사에 머무르지도 않고 정원을 나서고 있었다· 그가 안개 속으로 걸어 나가자 아젤리스는 자국이 남을 정도로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서로 비슷한 처지에 있으니 자신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줄 거라 기대했는데 그의 반응은 냉담했다·
보호를 명목으로 미궁에서 혼자 격리된지 석 달이 넘었다· 외로움에 사무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아젤리스에겐 이 대저택은 감옥과도 같았다· 차라리 입학시험 때처럼 노숙해도 좋았다· 이 미궁만 아니라면 아무렴 좋다·
다른 학생들처럼 평범한 소녀들처럼 친구들과 기숙사에서 부대끼고 싶었다·
그녀의 테이블에는 직접 손으로 옮겨 적은 쿠키 레시피가 놓여 있었다·
사탕이라는 별명처럼 달콤한 간식을 좋아할까 싶어 준비해둔 것이다·
데미안이라도 온다면 적어도 부대끼는 삶을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일은 없었다·
아젤리스는 힘없이 주저앉아서 이마를 무릎에 묻었다·
그러곤 혼자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젠 싫어···· 그냥···성도로 돌아갈래·”
그녀는 애당초 이터니아에 와서는 안 됐었다고 후회했다·
***
짙은 안개 속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엘라는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뿌연 시야 속에서 나무 가면을 쓴 한 소년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엘라는 데미안이 기숙사로 향했다는 보고를 듣고 그곳에서 쭉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데미안이 엘라를 알아보고는 걸음을 멈추고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네·”
데미안이 천천히 가면을 벗고 엘라를 대면했다·
“기숙사에서 나오는 길인가본데· 너무 빨리 가는 거 아니야?”
“실베린 교수님이 밖에서 절 기다리고 계십니다·”
“글쎄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고?”
데미안은 침묵했다·
“하나만 묻자· 왜 너랑 상관도 없는 애들이 자꾸 네 기숙사 배정에 참견하려는지 말이야·”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배정된 윗드러프관 기숙사는 마음에 드니?”
“멋진 방입니다·”
“다행이네· 그것도 누군가가 지독하게 날 괴롭혀서 나온 결과거든·”
“····”
“보아하니 트리샤랑은 좀 어긋난 게 있는 모양이구나· 탓할거면 내 탓을 해· 걔가 극성을 부리긴 했어도 최종적으로 결정한 건 나니까·”
“이런 결정을 내리신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물론이지·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트리샤는 말 그대로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아이야· 그래서 관리하기 굉장히 까다롭지· 그애를 감당할만한 사람이 너 말고는 딱히 보이지가 않았거든·”
“제가 마스터스 클래스라서 그러신 겁니까? 저는 특별한 사람을 감당할 만큼 그릇이 크지 않습니다·”
“아니 내가 장담하건데 너는 누구보다 잘 견딜 사람이야· 이미 실베린과의 관계로 증명이 됐잖니?”
“교수님이 잘 보살펴주셔서 그런 겁니다·”
“너는 잘 모르나본데 실베린은 ‘보살핌’하고는 가장 거리가 먼 인간이었어· 널 만나고 달라진 거지·”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 아무것도 하지 마· 내가 원하는 건 그거야· 공들여 친해질 필요도 없어· 트리샤랑 그냥 같이 지내기만 해· 실베린이랑 그런 것처럼·”
“····”
엘라는 연초를 입에 물었다· 그러곤 잠시 연기를 들이마신 뒤에 말했다·
“물론 불편을 감수한 만큼 그 보상도 챙겨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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