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5
“좋습니다· 교수님 다만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 봐·”
“트리샤는 왜 이런 취급을 받는 겁니까? 그냥 자유롭게 풀어주면 굳이 제가 엮일 이유도 없을 텐데요·”
엘라가 연기를 길게 뱉은 뒤 잠시 뜸을 들이곤 말했다·
“같이 지내려면 너도 트리샤에 대해 몇가지는 알아야겠지· 일단 트리샤는 완전히 이터니아 소속이 아니야· 절반은 이터니아 절반은 다른 곳 소속이지· 우리로선 최대한 풀어주려 했지만 그 정도가 한계였다는 것 정도만 알아 둬·”
엘라는 아젤리스 입학을 논의할 당시 교단 측이 흘리듯 말했던 걸 회상했다·
만성적인 욕구불만 반골 자유롭게 놔두면 위험천만한 기행을 벌이는 아이· 그게 아젤리스에 대한 교단의 전반적인 평가였다·
감금에 가까운 처분은 교단이 강력하게 원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이어 이터니아에 교단의 병력을 상시 주둔시키고 심지어 교단의 친위대를 위장 입학 시켜 아젤리스를 상시로 감시하고 보호하길 원했다·
아젤리스가 극도로 질색하고 혀를 깨무는 자살 퍼포먼스를 감행한 덕에 일단락 되었지만·
“황녀라도 되는 겁니까?”
“그 이상이지·”
“···상상이 잘 안 됩니다·”
“그냥 받아들여·”
황녀 한부대를 끌고 와도 바꿀 수 없다· 아젤리스는 그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지난 이터니아의 역사에서 플랜테라의 최우선 행동 강령은 언제나 ‘이터니아를 지켜라’였고 단 한 번도 변한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젤리스가 입학하고 굳건했던 첫번째 강령이 바뀌었다·
‘아젤리스를 지켜라 이터니아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고 이같은 변화에 이견을 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 성녀 플렌체는 북부에 힘을 실어 주기엔 너무 노쇠했다·
그 뒤를 이을 아젤리스는 달랐다· 그녀에겐 북부 방어선에서 매일 벌어지는 비극을 종식시키고 대륙 전체의 운명을 바꿀 잠재력이 있었다·
아젤리스는 어떻게든 교단의 통제를 벗어나려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보호 명목의 구속을 받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몸소 자살소동을 벌인 만큼 더 이상 인내를 종용해 봐야 악영향만 끼칠 게 뻔했다·
데미안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돈다·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표정 변화가 극도로 적은 소년이었다·
혀를 깨문 이야기는 데미안에겐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선입견을 가지고 관계를 시작해 봐야 좋을 거 없으니까·
데미안이 침묵하자 엘라가 물었다·
“더 궁금한 건 없니?”
“없습니다·”
“그래 일단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궁금한 게 있으면 도서관으로 찾아오렴·”
***
저녁 노을을 끼고 실베린이 분수대에 걸터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우리의 마차· 그리고 그 주변을 황금 갑주를 걸친 기사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실베린에게 다가가자 그녀가 내 머리를 쓸어내며 다정하게 말했다·
“어때· 지내볼 만 해?”
“저는 쥐랑 빈대가 들끓는 곳이라도 잘 지내는 걸요· 부자가 된 기분이에요·”
“잘됐네·”
“근데 저분들은 어쩐 일로 오신 거죠?”
“···중요한 일 때문에 나머지는 마차에서 이야기하자·”
우리가 마차에 탑승하자 기사들도 일제히 말 위에 올라탔다· 그들은 마차 주변을 호위하듯 사방을 감싸고 이동했다·
실베린이 마차 창밖의 기사들을 잠시 노려보다 신경질적으로 커튼을 쳐 버렸다·
그녀는 내게서 시선을 돌리고 잠시 침묵하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자야· 나는 급한 일이 생겨서 멀리 떠나야 돼·”
“어디요?”
“성도로· 거기가 어딘지는 알지?”
모든 건물이 황금빛으로 반짝인다는 신성 도시· 성도는 책에서만 이야기를 들어 본 신비로운 곳이었다·
어쩐지· 기사들의 차림새가 예사롭지 않던데 성도에서 온 이들이었구나·
“네· 언제 출발하시는데요?”
실베린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내일·”
내일?
마음이 철렁 내려앉은 탓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학교 생활을 시작하면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매일 붙어 있을 순 없단 건 알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는 어느 정도 해왔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럽다·
“···언제쯤 돌아오시는 거죠?”
“정확히는 몰라· 몇 달이 될 수도 있고·”
“꼭 가야하는 건가요?”
“···응·”
당황스럽다 해야하나 서운하다 해야하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가슴을 옥죈다·
매일매일 실베린과 함께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니었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떨어져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실베린은 대마법사니까· 그만큼 의지하는 사람도 짊어져야 할 것도 많겠지·
그게 이제서야 비로소 실감된다·
고작 해봐야 몇 달인데 왜 이리 긴 것처럼 느껴질까·
“입학식은 같이 못 갈 것 같구나·”
“···괜찮아요·”
실베린이 내 시선을 피하고 침묵했다·
그렇게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아무런 말도 나눌 수 없었다·
***
늦은 밤 실베린은 잠옷 차림에 촛불 하나를 들고 저택 계단을 내려왔다·
그렇게 어둡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복도를 지나 방문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제자야·”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볼일이 있으면 데미안이 본인에게 올라오도록 시키는 게 일반적이었다·
실베린은 그대로 밤을 보낼 수가 없었고 그래서 결국 데미안의 방으로 내려왔다·
“자니?”
실베린이 조용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방 안은 칠흑처럼 어둡다·
데미안은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실베린이 소리를 죽이고 침대에 다가갔다· 촛불을 협탁에 올려두고 침대에 살짝 걸쳐 앉았다·
그리고는 새우잠을 자는 데미안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냈다·
세상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보니 괜히 심통이 났다·
“나는 너 생각하느라 끙끙대며 밤잠을 설치는데 넌 신나게 퍼질러 자니?”
그러고는 잠에서 깨지 않을 정도로 데미안의 볼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그는 깊은 잠에 빠졌는지 미동도 없었다·
평화로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마음이 무거워졌다·
“잠깐 떨어지는 건데 왜 이리 신경쓰일까····”
실베린 자신도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혼자서도 충분히 씩씩하게 지낼 아이지만 불안감은 씻어낼 수 없었다·
실베린은 이불을 살짝 들춰내고 그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렇게 데미안과 나란히 눕고선 작게 속삭였다·
“제자야 한동안 못보니까 욕심 좀 부릴게·”
그런 뒤 데미안의 몸을 두 팔로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
데미안과 시종들은 성도로 떠나는 실베린을 마중하기 위해 아침 일찍 중정에 나왔다·
실베린이 데미안에게 다가가 단검과 작은 유리병 하나를 건넸다·
“제자야· 여기에 피 좀 담아줄래?”
“네?”
“네 피 말이야· 그 단검으로·”
데미안은 군말 없이 단검으로 손바닥을 그어내고는 유리병 안에다 피를 흘려보냈다· 병을 반쯤 채우자 줄줄 흐르던 피가 점차 줄어들었다·
“이건 어디다 쓰시게요?”
“보면 알아·”
그러고는 데미안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실베린의 손에는 금속으로 된 손톱만한 큐브 두 개가 올려져 있었다·
“하나만 들고 삼켜·”
“네?”
“입에 넣고 삼켜·”
데미안은 큐브를 잠시 노려보다가 이내 냉큼 삼켜 버렸다·
실베린은 남은 큐브를 데미안의 피가 담긴 유리병 안에다 넣었다·
곧이어 큐브가 피에 반응하여 빛을 내기 시작했다·
“이 귀한 걸 내가 살다살다 나보다 한참 어린 남자애한테 이걸 쓸 줄은 몰랐네· 느껴볼래?”
실베린이 코르크로 병 입구를 막고 데미안의 볼에다 가져다 댔다· 병이 일정한 간격으로 둥둥 울렸다·
“···뭐가 쿵쿵거리는데요?”
“느껴져? 네 심장박동이야· 이게 있으면 대륙 반대편에 떨어져 있어도 심박을 느낄 수 있어·”
“···신기하네요·”
“멀리 있어도 네가 어떤 상태인지는 알아야지· 이 큐브도 별의 조각으로 만들어낸 거야· 가는 김에 이걸 이용해서 신탁도 받아보려구·”
“신탁이요···?”
“응· 좋은 이야기만 듣고 올게· 걱정 마·”
떠날 시간이 됐지만 실베린은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포션을 들고 데미안의 손을 정성껏 치유했다·
그런 뒤 실베린은 허리를 살짝 숙여 데미안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데미안의 볼을 한동안 어루만졌다·
고작해야 두어 달인데 마치 몇 년을 떨어져야 하는 사람들처럼 애틋한 모습이었다·
“너 때문에 발이 안 떨어지는구나· 제자야·”
“제 걱정은 마세요· 전 원래 혼자 잘 살았던 걸요·”
“나 없이도 잘 먹고 잘 살겠다 이거니?”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래· 나랑 같이 있을 때 만큼은 덜해도 잘 지내야 해·”
“네·”
“그리고 잘 들어 제자야· 이터니아는 안전한 곳이 아니야· 바깥 세상이 비정상적으로 위험해서 이터니아가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느껴질 뿐이지·”
“괜찮아요· 전 그 이터니아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서 지내잖아요·”
“그 어떤 결계나 마법도 완벽할 수 없고 취약점이 있어· 그리고 이터니아에서 가장 안전한 곳인 미궁도 취약점이 존재해·”
실베린이 손가락으로 데미안의 가슴깨에 넣어 둔 가면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미궁에서 왜 가면을 써야하는지 알아? 미궁 중심부가 도플러라는 보잘것 없는 마수한테 초토화된 적이 있었거든· 지금이야 도플러는 결계가 막고 거기다 가면만 써도 충분히 대처 가능한데 그 당시 도플러는 학계에 보고된 적도 없고 누구도 본 적 없는 그야말로 처음 경험하는 유형의 마수였어· 그래서 대처가 불가능했지·”
“····”
“요즘도 이따금 마법 학회엔 그 누구도 경험한 적 없는 마수에 관한 보고서가 날아와· 어떤 건 고도의 지성을 지니고 있고 어떤 건 마법 능력까지 지니고 있지· 이터니아가 그런 것까지 전부 예측하고 막을 순 없어· 언제든 이상한 게 와서 초토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야·”
“조심할게요·”
실베린이 데미안의 양 볼을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더 강한 어조로 말을 쏟아냈다·
“제자야 넌 독립심이 강한 아이야· 남한테 의지하지 않고 어떤 일이든 아득바득 혼자 해결하려 하지· 심지어 나 같은 사람을 옆에 두고서도 말이야· 혼자 구울을 잡으려 하고 이상한 레시피를 주워와서 비밀스럽게 뭘 만들고 하는 건 다 좋아· 그게 네가 평생 고수했던 삶의 방식이고 그렇게 해서 네가 성장했으니까· 그리고 내 옆에 있으면 웬만한 문제는 내가 막을 수 있으니까·”
레시피 이야기를 하자 찔리는 게 있는지 데미안이 실베린의 시선을 슬금슬금 피했다· 그러자 그녀는 데미안의 턱을 붙잡고 다시 원래대로 고정시켰다·
“하지만 이제 네 옆에는 내가 없잖니· 내가 제일 걱정되는 게 뭔줄 알아? 너는 목숨을 아끼려 들지 않아· 널 보면 이따금 느끼는 거야· 죽어도 상관 없는 사람처럼 굴어·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어· 미개척지에서 맨몸으로 구울떼를 상대하는 미친놈은 너밖에 없을 거야· 복창해· 나는 미친놈이다·”
“····”
“빨리·”
“나는···· 미···친놈이다·”
실베린의 속에서 그동안 참고 있던 게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녀는 격해진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위험한 짓거리는 하지 마· 기억나? 나는 널 책임지기로 했어· 내가 없을 때 만약 목숨이 위험한 짓을 했다? 내가 돌아오면 그동안 네가 누린 자유는 모조리 박탈당할 줄 알아· 위험한 레시피는 모두 압수하고 뭘 먹을지 어딜 가고 어떤 수업을 들을지 어떤 옷을 입고 누굴 만나고 어떤 친구를 사귈지 모든 걸 전부 내가 직접 관리하고 통제할 거야· 알았어?”
처음 마주하는 실베린의 고압적인 태도에 데미안의 동공이 강하게 흔들렸다·
“진심이세요···?”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이니?”
“···알겠어요· 조심할게요·”
“그래·”
실베린이 잠시 격해진 마음을 진정시키고 품 안에서 스티치를 꺼냈다·
“이거 전에 써봤지? 잠깐 기다려 봐·”
그녀가 자신의 검지 손가락에 입바람을 부니 작게 불길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손가락으로 스티치에다 이니셜을 새기기 시작했다·
금속 표면이 움직임을 따라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S♡D
그녀는 데미안의 손에 스티치를 쥐어주고는 말했다·
“귀한 거니까 잘 간직해· 무슨 일 생기면 이걸 써· 내게 바로 전해질 거야· 너도 알지? 내게 직통으로 날아오는 스티치는 세상에 얼마 없으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
“잘 간직할게요·”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 네게 주는 숙제야· 잘들어·”
“네·”
“첫째 식사 세끼 잘 챙겨먹기·”
“둘째 검술 정령술 마력 훈련 꾸준히 하기·”
“셋째 매주 아니 닷새마다 선생님한테 열 줄 넘는 분량의 편지 보내기·”
데미안은 잔뜩 기가 눌린 탓에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네·”
“외웠어?”
“네?”
“외웠나 확인해보자· 첫째·”
“밥 잘 먹기·”
“둘째·”
“···수련 열심히 하기·”
“셋째·”
“편···일주···그 까먹었어요·”
실베린이 인상을 쓰고 말했다·
“까먹을 게 따로 있지·”
그녀가 진심을 다해 힘껏 데미안의 한쪽 볼을 꼬집었다·
“다시 첫째·”
볼이 밀가루 반죽처럼 늘어난 데미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매 매일 편지 보내기· 정 정성껏·”
실베린이 데미안을 잠시 노려보다가 꼬집은 손을 풀고 빨개진 볼을 살살 문질렀다·
“그래···· 그만하면 됐어·”
그녀가 아주 천천히 얼굴을 데미안에게 들이밀었다·
그렇게 데미안의 볼에다 진하게 입을 맞췄다·
“갈게·”
진한 마크가 남은 걸 확인한 실베린은 어렵사리 걸음을 돌려 마차에 몸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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