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6
“하아 하아 하아·”
차가운 새벽 바람이 루나의 얼굴을 때렸다·
잠에서 깬 것처럼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바람을 따라 그녀를 둘러싼 숲이 세차게 흔들린다·
그녀는 숲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잠시 꿈이 아닌가 착각했다· 팔이 무척이나 시리고 쓰리다· 꿈은 아니었다·
숨을 거칠게 헐떡이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일기장 페이지가 찢겨나간 것처럼 기억엔 오로지 공백 뿐이다·
오른손에는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단검이었다·
왼팔에는 자상이 가득했다· 피가 빗물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몇 번을 확인해도 이건 꿈이 아니라 분명히 현실이었다·
잠시 뒤 달빛이 그녀가 서 있는 곳을 비춘다·
은색 나뭇잎들이 달빛을 받고 은은하게 주변을 밝혔다· 그제서야 비로소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터니아의 수호목 앞에 서 있었다·
“···왜?”
루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호목을 중심으로 시커먼 무언가가 커다란 원 형태로 흩뿌려져 있었다·
루나는 떨리는 숨을 진정시키고 쪼그려 앉아서 수호목의 뿌리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차가운 무언가가 손끝을 적신다·
방금 막 뿌린 것처럼 액체가 흥건했다·
피다·
바로 루나의 피였다· 수호목 주변에 그녀의 피가 잔뜩 흩뿌려져 있었다·
“대체 나는 왜···?”
곧이어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루나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먹구름이 달빛을 가려버렸다·
툭툭·
비가 한방울씩 떨어진다· 그리고 빗방울의 수가 많아진다·
소나기가 쏟아진다· 루나의 피는 비를 타고 땅 아래로 깊게 스며들고 있었다·
[큭큭 크크큭]
루나는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숲 한구석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어둠 속에서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하하 아하하하하!]
[푸하하! 아하하하!]
검은 형체가 수가 점점 하나씩 불어나고 곧이어 수호목과 루나를 완전히 에워쌌다·
웃음소리가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루나는 황급히 정령을 불렀지만 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아아 아아”
오랜 기간 누적된 정신적 데미지가 마침내 임계점을 넘었고 그녀는 마침내 공황 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통제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제 그만 그만해!”
그녀는 귀를 막고 황급히 기숙사를 향해 뛰쳐나갔다· 하지만 귀를 막아도 웃음소리는 생생하게 들렸다·
이건 루나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루나의 머릿속에는 단 한 사람만이 떠올랐다·
실베린·
오직 실베린 뿐이었다·
***
시간은 훌쩍 지나 어느덧 입학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생활동 전체가 기숙사 입주를 위해 찾아온 마차들로 북적였다·
1 2 3관 인근은 지나가기도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입주하는 학생들만 기숙사를 방문한 것이 아니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멀찍이서 그 모습을 구경했다·
입주하는 신입생들· 그들을 따라온 가문 사람들·
새출발하는 자식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어머니·
장성한 자식을 보며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
아카데미에 입학한 형과 언니를 동경하는 아이들·
묵묵히 뒤를 지키는 가신들·
구성원들의 양상은 저마다 달랐지만 큰 틀에서 보면 가족과 가문의 풍경은 다들 비슷했다·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지만 내가 살아온 곳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명문 아카데미에 입학을 하든 어디에서 입상을 하든 날 축하해줄 가족은 세상에 없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걸 보고 눈물을 삼키며 운명을 비관하는 시기는 오래전에 지났다· 이제는 잔잔히 관망하는 시선으로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다만 이따금 궁금증이 생길 뿐이었다· 가족이 있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나마 나와 깊은 유대를 가진 사람은 실베린 뿐이다·
실베린이 피 한방울 안 섞인 나에게 어떤 인정을 베풀었는지 새삼 느낀다· 이터니아 마스터스 클래스 그게 뭐가 중요한가· 실베린이 없으면 나는 반쪽짜리 인간이다·
윗드러프관 앞에서 대기하는 마차는 있었지만 다른 곳과는 달리 잠잠했다· 메이드에게 전해듣기론 윗드러프관은 언제나 절반 이상이 공실이라고 했다·
나는 생활동에서 벌어진 한바탕 연회에 휘말리지 않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나는 구경을 마치고 윗드러프관 라운지로 들어섰다·
이제 윗드러프관에 입주한 아이들과도 드문드문 마주친다·
본격적인 아카데미 생활이 시작되는구나· 이제 슬슬 체감이 된다·
나 혼자 쓰던 기숙사도 이제는 안녕이다·
비어있는 기숙사를 혼자 쓸 때엔 라운지의 벽난로 앞에 놓인 소파는 언제나 내 차지였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다· 그 약탈자는 지루하지도 않는지 다소곳이 앉아서 장작불을 멍하니 감상하고 있다· 이틀 내내·
함부로 다가가서 그 옆자리에 앉을 수는 없다· 그 약탈자는 시온이었으니까·
호전적이고 활발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수도승처럼 얌전하다·
얘도 가족이 없는걸까· 기숙사에 들어오고 줄곧 혼자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반가우면서 한편으론···등골이 시리다·
시온만은 피하고 싶다· 신입생 중에 가장한 비범한 능력을 가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트리샤처럼 내 빈틈을 찾아서 정체를 간파해낼 수도 있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한판 붙자’고 날 괴롭힐 수도 있었다·
나는 시온과 최대한 거리를 두고 라운지를 가로질렀다· 다행히 날 알아보지 못하고 그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방으로 올라가 미궁의 ‘가시정원’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
릴리트는 상위권 학생들을 수용하는 메리골드관에 짐을 다 옮기고 중앙 홀에 마련된 티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홀을 지나가는 남자아이들을 하나씩 관찰했다· 릴리트는 입학식 때의 ‘그 자식’이 메리골드관에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 자식한테는 빚이 많았다· 자신을 괄시한 빚을 갚아줘야 했고 메리골드관에 들어올 수 있도록 지대하게 기여한 빚도 갚아줘야 했다·
검문소 경비병처럼 드나드는 이를 전부 살펴보는 작업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내키지도 않는 남자애들과 눈이 마주치기도하고 때로는 릴리트가 관심을 표하는 걸로 착각하고 얼굴을 붉히는 경우도 있었다·
“설마 여자인 건 아니겠지···?”
얼굴도 감추고 목소리도 안 내는 걸 생각해 보면 그 자식이 여자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가면 틈으로 보이는 턱선이 제법 곱상하기도 했었다·
릴리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일전에 그자식의 맨몸을 보고 직접 만져 보기도 했었으니 남자가 확실했다·
그때를 다시 생각하니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러던 중 릴리트의 앞에 누군가가 멈춰섰다·
“어 음· 안녕·”
“···?”
“우리 눈 몇 번 마주쳤었지?”
“누구···?”
“아 나는 베르탕이야· 우리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베르탕이 릴리트에게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그 자식’이 정체를 감추고 먼저 다가올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베르탕은 절대 아니었다·
손바닥이 굳은살로 거칠어야 하고 팔뚝엔 핏줄이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전체적인 체형이 마르면서 단단해야 한다·
베르탕이란 소년은 육식을 많이 하고 운동을 안 할 것 같은 체형이었다·
릴리트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 소년은 세실의 그룹원 중 한 명이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좀 나와줘·”
베르탕이 뻘쭘해하며 자리를 비켰다· 그는 떠나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부끄러워하긴····”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쉬었다·
세실에게 물어보는 선택지도 있었다· 그녀도 ‘그 자식’하고 엮인 게 있어 보였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그 선택지는 굉장한 거부감이 들었다· 세실에게 물어보는 행위 자체가 지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곧이어 한 남자가 릴리트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릴리트의 친구인 마티아스였다·
그가 쪽지를 하나 건네면서 말했다·
“여기 부탁한 거·”
“어? 정말 찾은 거야?”
릴리트는 마티아스에게 전투부에 목검을 다루는 검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있는지 찾아달라 부탁했었다·
“전투부에서 열아홉 번째로 정상에 도착한 애야· 붉은 머리에 목검으로 수련을 자주 한대· 가면은 글쎄 찾아보면 있지 않을까?”
“아니야· 정말 못해도 전체 5등 안에 들어야 해·”
“시온이랑 붙었다는 애 말하는 거야? 시온 걔는 묵묵부답이고· 그냥 헛소문 아니야? 글쎄 전투부 중에 다른 사람은 없어 보이는데·”
“····”
“근데 그런 애는 왜 찾는 거야? 악감정이라도 있어? 조용히 조져줄 수도 있는데·”
“곱게 자라신 귀족 도련님이 무슨 깡패처럼 말해? 내 일이니까 무슨 일 있어도 건드리지 마·”
심기가 불편한지 마티아스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도 릴리트에게 잘보이려고 하는 혈기왕성한 남자들 중 하나였다·
마티아스가 ‘그 자식’을 신경쓰는 것 같아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릴리트는 쪽지를 펼쳐보았다·
‘전투부 낙스 크루거’
어찌 되었든 외형 정보만 취합해 볼 때 이 사람이 가장 유력했다·
릴리트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레이스 산 정상에서 분명 시온과 ‘그 자식’이 맞붙었다는 걸· 시온과 붙어서 이기든 지든 전체 수석이나 차석 둘 중 하나여야 했다· 마티아스가 알아온 순위 정보가 잘못 되었을 확률이 컸다·
수석 차석에도 없고 낙스 크루거도 아니라면 남은 답안은 자퇴였다·
굉장한 실력자에다 희귀한 포션을 아무렇지 않게 썼으니 굉장한 배경을 끼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면 이터니아 입학시험을 놀이삼아 참가하는 것도 가능한 이야기였다· 잡음을 막기 위해 가면으로 정체를 감춘 것도 설명이 된다·
이터니아에서 배울 게 없다고 판단했으면 미련 없이 자퇴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뭐 그 이야긴 나중에 하고 같이 식사나 하러 갈까? 밖에 우리 가족도 있는데 인사도 하고····”
“아니 고마워· 먼저 가 볼게·”
릴리트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
마티아스는 떠나는 릴리트를 보며 불만스럽게 입맛을 다셨다·
***
미궁 밖에서는 뭘 말하든 나침반은 이터니아의 수호목만을 가리켰다·
그래서 미궁으로 향하려면 반드시 수호목을 거쳐가야 했다·
그 반대도 비슷했다· 미궁에서 나침반에 출구를 말하면 항상 수호목을 향해 있었다·
수호목이 잘 보이는 방에 배정된 걸 실베린이 ‘암시’라고 표현한 이유를 뒤늦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수호목 앞에 서서 다시 나침반을 작동시켰다·
정해진 방향에 따라 한동안 나아가자 다시금 안개가 사방을 덮는다·
가시정원으로 돌아가는 건 일주일만이다·
그 말은 즉 트리샤와의 서먹한 관계를 일주일간 방치해 두었다는 말이다·
미궁의 짙은 안개를 보니 숨이 턱 막혔다· 이런 답답한 곳에서 졸업할 때까지 지내야 하는 트리샤가 조금 안쓰럽게 느껴지긴 했다·
한참을 나아가 가시정원 기숙사 앞에 섰다· 안에 들어서니 노랫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트리샤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내가 온 걸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노랫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1층 복도 문이 굳게 닫힌 한 방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노크를 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나는 한참을 기다리다 마지못해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느 가정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방의 풍경이다· 수많은 식기들이 늘어져 있다· 사방에 밀가루가 어지럽게 묻어 있고 작은 화덕에는 장작불이 활활 탄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한 소녀의 뒷모습을 마주하곤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녀의 등허리에 앞치마 끈이 걸려있다·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는 걸 보니 요리를 하는 것 같았다·
헌데 내가 기억하던 트리샤의 모습이 아니었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머리카락과 뒤태의 실루엣이 가슴 시리도록 친숙하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누군가를 연상시킬 정도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신기루를 보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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