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4
실베린의 머리카락이 바람을 맞고 가볍게 흔들렸다· 그녀는 섬 위에 올라온 뒤 발아래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정원을 둘러싼 회랑을 따라 사제복을 입은 한 사내가 소리 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실베린과 네 발짝 거리에서 멈춰서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렇게 다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실베린님·”
실베린이 천천히 몸을 돌려 사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프라이스· 얼마 못 가서 망할 줄 알았는데· 여기도 명줄이 제법 질기단 말이야·”
별의 제단은 후대를 계승할 사람은 더이상 받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러나 저러나 언젠가 그 맥이 끊기고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질 운명이었다·
“하하 언제 망해도 이상할 거 없는 상황이긴 합니다·”
“그래· 망하기 전에 서둘러 도움 좀 받으려고 왔어·”
“그게 아니면 이곳에 찾아오실 이유가 없으시겠죠· 전에 떠나실 때 큐브의 임자를 찾으면 다시 오겠다 하셨죠· 제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을까요?”
실베린이 피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 보였다·
그녀가 병을 살짝 흔들자 큐브가 딸그락 소리를 냈다·
이를 확인한 사제의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게 정말이라니· 살다살다 이런 일도 다 보게 되는군요· 그 실베린이 뢰젠탈 큐브를···”
실베린이 눈을 좁히고 사제를 노려보며 말을 잘라냈다·
“아쉽게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사제가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잠시 머뭇거렸다·
“····그런 게 아니라니요? 뭐가 아니라는 겁니까· 설마 뢰젠탈 큐브의 전통을 무시하신 겁니까?”
“응· 급한 대로 그냥·”
“아니 대체···그 성물을 어찌··”
사제가 경악한 나머지 말을 잇지 못했다· 뢰젠탈 큐브는 재료를 구하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제조하는데도 수년이 걸린다· 절대 대충 써서는 안되는 물건이었다·
당당한 실베린의 태도를 보곤 그는 체념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막무가내인 건 여전하시군요· 여긴 아래쪽과는 달리 바람이 차갑습니다· 일단 들어가시죠·”
사제가 실베린을 별의 제단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사제는 회랑을 걸어가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실베린님에게 필시 신경 쓰이는 사람이란 건 부정할 수 없겠군요· 뢰젠탈 큐브의 용도란 게 본디 그런 데 쓰는 것이니까요·”
“····”
도통 이성에 뜻을 두지 않았던 그녀가 누군가에게 큐브를 사용했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남달랐다·
뢰젠탈 큐브는 본디 혼약을 맺은 연인이 각각 하나씩 삼켜서 영적인 결속을 만들어내는 성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한 쌍의 큐브를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고 상대방에게 먹였을 리가 없었다·
프라이스 사제의 머릿속에 의문이 가득했다· 그녀의 큐브는 별의 제단에 준 도움에 대한 보답품이다·
그 당시 별의 제단의 사제들은 실베린 덕에 목숨을 건졌지만 그녀가 추구하던 것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큐브는 실의에 빠진 실베린이 또 다른 삶의 의미를 찾길 기원한다는 의도로 건넨 것이었다·
사제들 모두 은인인 실베린의 앞날에 안정과 행복이 깃들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프라이스도 여느 사제들과 다를 것 없었기에 실베린의 상대가 누구인지 아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실베린 님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한 귀인이 누구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상승혼을 추구하고 자신보다 급이 낮은 남자는 만나지 않는다· 실베린의 눈높이에 맞는 남자라 하면 황태자라거나 소드마스터 대마법사 정도로 추릴 수 있었다·
어떤 기가막힌 위인이 나올까 싶은 기대감에 젖어 사제의 입꼬리가 살짝 씰룩거렸다·
헌데 실베린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침묵을 고수했다·
사적인 영역을 과하게 파고드는 물음이란 걸 깨달은 사제는 재빨리 수습했다·
“···반가운 마음에 제가 결례를 범했군요· 죄송합니다·”
“···”
실베린은 남은 큐브를 본인이 삼키지 않고 병에다 담아왔다· 어쩌면 그녀는 전통에 정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고 단순히 기능적 편의성만을 취한 것일 수도 있었다· 실베린의 성향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프라이스가 내심 실망하는 와중에 실베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 제자야·”
곧이어 프라이스 사제는 걸음을 멈추고 실베린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제차 되물었다·
“제자 제자 말입니까?”
“응·”
프라이스의 눈이 점점 커졌다·
제자라는 말도 놀랍긴 했지만 그의 걸음을 붙잡고 재차 되묻도록 만든 건· 실베린의 음성 속에 묻어 나온 이질적인 감정이었다·
제자를 언급하는 그녀의 음성 속에는 특유의 까칠함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수줍음이 묻어 나왔다·
이는 과거의 실베린에게선 절대 찾아볼 수 없던 것이다·
***
에르제베트의 운철 팔찌는 저주를 막아준다고 했었다·
미궁에 저주가 감돌고 있다는 말이다· 다만 그 저주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살면서 이토록 많은 시체를 본 건 처음이었다· 데미안은 시체밭 사이에서 숨이 붙어 있는 이를 찾으려 분주히 움직였다·
땅이 대부분 피로 얼룩져 있다· 그리고 드문드문 검은 점액질 같은 것이 바닥과 시체들 위에 꿈틀거렸다·
“이것들은 대체···”
데미안은 손으로 검은 점액질을 떼냈다· 검은 점액질은 전부 거머리였다· 시체에 난 송곳 구멍은 바로 거머리들이 피를 빨며 생긴 것이었다·
거머리들이 몸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대는 광경은 소름끼칠 정도로 흉측했다·
어떻게 거머리가 이곳에 있는지 누가 왜 이렇게 뿌려댄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어딘가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데미안은 시체를 내려놓고 바로 기침 소리가 난 곳으로 뛰어갔다·
“젠장 젠장 어디야· 어디에요!”
황급히 뛰어가며 두리번거리는 와중에 몸을 부르르 떠는 한 사서가 눈에 들어왔다·
데미안은 그에게 다가가 몸을 부축하려다 마음을 접었다· 살아있는 피를 탐내는 모양인지 사서의 피부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거머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사서가 몸을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며 다시금 고통스럽게 기침 소리를 흘렸다·
데미안은 사서의 가면을 벗겼다· 얼굴에도 이미 거머리가 가득했다·
다급해진 데미안은 물불 안 가리고 거머리를 한 움큼씩 쥐어 던져버렸다·
“젠장 젠장 조금만 기다려요· 제가 구해줄게요·”
그렇게 몇 줌 떼어내고 나서야 사서의 얼굴 형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기침과 함께 시커먼 피를 한 바가지나 쏟아내고는 말했다·
“쿨럭· 누···누···누구···시죠·”
이상했다· 얼굴에 붙은 거머리는 전부 떼어냈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지만 그는 데미안을 보지 못했다·
사서의 눈동자는 하얗게 변색되었고 초점이 없었다· 눈이 멀어버린 상태였다·
데미안은 이를 꽉 깨물었다·
“데미안이에요· 말하지 말아요! 당장 제가 구해줄게요·”
데미안은 사서의 옷을 찢어냈다· 상태를 확인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거머리가 없는 곳이 없었다·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거머리를 제거했다·
그러던 와중에 사서가 데미안의 손목을 덮석 붙잡아 행동을 제지했다·
“저는···쿨럭 이미 늦었습니다· 당장 당장 도망···치셔야 합니다·”
“됐으니까 말하지 마세요!”
사서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건 트리샤···님을 노리고···미궁에···반드시 반드시 도망···”
데미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트리샤· 트리샤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다·
“트리샤는 트리샤는 어떻게 됐죠?”
“아직···확인이 안 됐···쿨럭 어서 도망···도망···치셔야···”
“됐으니까 살아서 같이 가요!”
“소용 없습니다···당장 떠나셔야 합니다···나침반이 가리키는 곳에서···쿨럭 최대한 멀리···늦기 전에 어서·”
사서가 내장이 쥐어짜이는 것처럼 처절하게 피를 토해냈다·
그리고 데미안의 팔목을 잡은 사서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곧이어 사서의 숨이 멎어버렸다·
데미안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심장이 터질듯이 요동쳤다· 이 모든 게 꿈이길 바랬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곳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 되어 있었다·
그는 사서의 말을 되뇌였다· 트리샤를 노린다고? 데미안이 주변을 살폈을 땐 사서만 죽어 있었지 트리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데미안의 머릿속엔 한가지 생각만이 아른거렸다·
트리샤를 구해야 한다·
다시금 거센 바람이 미궁을 쓸어내고 붉은 안개가 먹구름처럼 밀려들었다·
진한 피비린내와 시체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전신의 털이 곤두서고 오한이 들었다· 데미안은 곧장 일어서서 피안개가 불어온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시야가 가려져 그 어느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육감적으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돌연 기이한 울음소리가 미궁에 울려 퍼졌다· 귀가 찢어질 듯한 악령의 울음소리· 분명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오래 전 그의 영혼에 구멍을 낸 존재· 그 덕에 데미안은 단번에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바로 레이스의 울음소리였다·
데미안은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불현듯 무기력하게 절벽에 내던져지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별안간 한곳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또각또각
누군가가 구둣발 소리를 내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데미안은 그 자리에서 굳은 채로 침을 삼켰다·
곧이어 무언가 가슴께를 요란스레 두드렸다· 데미안은 차고 있던 목걸이를 옷 밖으로 꺼냈다· 엘라 교수가 선물로 줬던 목걸이가 강하게 전율하고 있었다·
“···”
목걸이가 감지하는 위험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었다·
흑마법사· 바로 죽음의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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