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8
실베린은 사제들을 밀치고 중앙 석단으로 뛰쳐나갔다· 그녀답지 않게 평정심을 잃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고는 석단에 주저앉아서 그 위에 있던 큐브병을 들었다·
실베린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그걸 꼭 껴안고 침묵했다· 마치 제자의 생사를 몸으로 계속 느끼려고 하는 것처럼·
그녀의 성향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행동이다· 프라이스는 그제야 비로소 실베린이 제자에게 지닌 애착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프라이스는 가만히 앉아있는 실베린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의식을 진행하는 내내 저는 오래 전 죽은 망자의 신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헌데···실베린님의 모습을 보아하니 그 아이의 심장은 생기가 가득한 모양입니다·”
“····”
“때로는 강철같은 의지로 운명을 비트는 위인들이 나오곤 합니다· 그렇다고는 해서 모든 걸 뒤집지는 못합니다· 인간의 의지로 벗어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별이 내린 죽음의 선고같은 것 말이죠·”
“···내 제자의 운명이 뒤틀려 있다는 말을 하려는 거야?”
“실베린 님도 잘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그 아이가 살아있다면 베네마릴이 운명에 개입한 겁니다· 오직···그것 뿐입니다·”
베네마릴의 악마적인 힘을 생각하면 운명이 뒤틀려 있다는 말이 어쩌면 제일 적절할지도 모른다·
실베린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를 맴도는 기류가 이상했다· 안도하는 건지 아니면 화가 난 건지 프라이스는 알 수 없었다·
프라이스는 침묵했다· 어찌되었든 실베린의 감정에 격변이 일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야 베네마릴은 무결점의 마법사 실베린에게 단 하나뿐인 역린이었으니까·
***
데미안의 상처는 거의 다 수복되고 출혈은 멎었다· 그리고 그의 심장은 다시 활기를 찾았다· 하지만 몸은 아직도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리자는 그의 몸 위에 올라 누워서 체온을 나눴다· 그와 두 손 깍지를 끼고 두 다리와 발가락까지 그의 몸에 밀착했다·
그곳은 언제나 그녀의 자리였다·
피로 사방이 얼룩져 있고 이 근방엔 수많은 시체가 나뒹굴고 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재회했지만 로맨틱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리자는 그와 체온을 나누며 가볍게 웃었다· 어디에 있건 중요하지 않았다· 데미안의 가장 큰 마력은 그와 함께 있으면 어떤 장소든 상관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리자는 그의 가슴깨에 귀를 대고 심장소리를 들으며 그와 함께 누워있던 곳들을 회상했다·
그곳은 축축한 동굴이었고 으스스한 폐가이기도 했다· 쥐가 돌아다니는 헛간이었고 청소를 하며 산처럼 모아둔 낙엽 위이기도 했다· 주변이 어떻든 둘이 함께라면 행복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그리 될 것이다· 주변은 피로 얼룩져 있더라도 이 또한 둘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잠시 엇갈려 있더라도 엉킨 실타래를 전부 풀고 나면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리자는 굳게 믿었다·
모든 게 끝나고 나면 결국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푹신한 침대 위에 지금처럼 함께 누워서 과거를 추억하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던 중 자그마한 무언가가 공기를 찢고 날아왔다· 그건 길을 잃은 것처럼 데미안 위를 빙빙 돌다 천천히 고도를 낮췄다·
그건 데미안의 머리맡에 살포시 내려서 날개를 접었다· 피로 얼룩진 스티치였다·
“····”
그녀는 바로 이상을 감지했다· 이건 분명 그녀의 미래엔 보이지 않던 것이었다· 곧장 불쾌한 감정이 파문처럼 일기 시작했다·
리자는 손을 뻗어 스티치를 집어들고 피를 닦아냈다·
그 표면엔 연인을 상징하는 듯한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
비비는 밖이 훤히 보이는 통창 앞에서 두 팔로 몸을 감싸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있는 귀빈실 문 너머엔 화려한 축하연이 한창이었다·
비비는 도무지 그 축제를 즐길 수 없었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이터니아의 학생이 되고 싶었다· 헌데 그녀의 삶은 꼬이고 꼬여 지금은 가문의 곳간을 털어 입학생들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이런 자신의 꼴이 우습게 느껴졌다·
거기에 이어 갑자기 날아온 편지가 그녀를 심난하게 했다·
가문에서는 자신의 정략결혼에 대한 논의가 오고가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바리안느 정도면 아버지가 탐낼만한 인물이었고 그 이름을 들먹이면 한동안 늦출 수는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가 그리도 서두르는 이유는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비비는 서른살이 넘으면 죽는다· 대를 이어 드문드문 전해지는 병 때문이었다· 잘 버텨야 서른 다섯· 그녀에겐 대략 십오년 정도의 시간밖에 없었다·
무남독녀로 자라 그녀가 아니면 대를 이을 수도 없었다· 아버지의 입장에선 눈이 뒤집힐 만도 하다·
다만 그녀를 괴롭게 하는 건 가문과 국가와 아버지의 입장만 존재할 뿐 그녀의 입장은 고려사항에 없다는 것이다· 그 덕에 짧은 수명 조차도 원하는대로 살 수 없었다·
그녀는 배우고 싶은 것도 포기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선택하지 못하고 단지 대를 잇기 위한 씨받이로 소모되어 죽을 운명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이낙스 가문의 공녀라는 신분은 저주였다·
한편으로 비비는 고아로 태어나서 이터니아에 입학한 학생이 제일 부러웠다·
가문과 국가에 얽매이지 않고 재능을 바탕으로 얼마든지 삶을 개척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귀빈실에 노크를 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했다·
“들어와요·”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제국의 5황자 프란츠였다·
“그렇게 공들여 사람을 불러모으고선 정작 본인은 다른 자리에 있군요·”
“높으신 분이 여긴 어쩐 일이죠·”
프란츠는 술잔을 들고 천천히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알면서 왜 굳이 물으십니까· 저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연회니 뭐니 하는 것들은 지긋지긋해서 찾아온 겁니다· 그나마 말이 통할 사람은 당신 말곤 없고요·”
“당신은 유능한 인재들의 환심을 사느라 무척 바빠야 하는 것 아닌가요?”
프란츠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을 위해 이터니아에 찾아왔다· 장차 소드마스터나 대마법사가 될 인물을 발굴해내 같은 편으로 포섭하여 장차 큰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
“그래야죠·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글쎼요·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기회는 거의 없을 텐데요·”
프란츠는 비비의 말에 씩 웃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닙니다· 이터니아라면 더더욱 그렇죠· 지금은 미끼를 던지고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관망해야 할 때죠·”
“···그게 무슨 소리죠·”
“인간은 겉과 속이 다른 동물입니다· 일상적인 말 한마디에도 표면에 드러난 의미와 그 기저에 깔린 의도가 일치하지 않는 게 인간입니다· 그리고 잘난 이터니아도 결국 인간이 구성한 조직이죠·”
비비의 표정은 젠체하는 황자가 못마땅한 듯 다소 구겨져 있었지만 대화를 끊거나 자리를 피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확신이 안 가십니까? 첩보원과 보좌관이 보고서에 온통 ‘올해 최고의 재능은 시온 이자렐이다’라고 써놔서 그걸 철썩같이 믿고 계시는 거겠죠·”
“마치 이터니아가 엄청 대단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황자는 비비의 얼굴을 보고는 기분 나쁘게 씩 웃었다·
“한 번쯤은 밑바닥에 내려가서 날것의 인간들을 경험해 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그 어떤 책으로도 얻을 수 없는 좋은 지식을 깨닫게 해주니까요·”
“그쪽이 먼저 경험하고 제게 알려주세요· 당장은 굳이 불필요한 수고를 감수하고 싶지는 않네요·”
“하하 그럼 제 경험을 말씀드리죠· 저는 한때 수도의 관문지기로 일하기도 했다는 거 아십니까? 저는 수도에서 교역과 도시에 출입하는 물동량을 조절하고 반입물품들을 감시하고 관리했습니다·”
비비가 딴지를 걸려고 입을 열자 프란츠는 예상했다는 듯이 선수를 쳤다·
“물론 제 신분은 완전히 숨긴 채로 말이죠·”
“····”
“아버님의 명이었죠· 지금 생각해도 참 웃깁니다· 황자에게 도시 외곽의 관문지기가 웬 말입니까· 검문을 받기위해 대여섯 시간 마차를 대기시키다 보면 말들이 길에 전부 변을 쏟아내 악취가 진동했고 저는 그곳을 해가 떨어질 때까지 지켜야 했죠· 그땐 제가 무슨 죄를 저지른 줄 알았습니다·”
“제가 생각해도···조금 과한 처사군요·”
“한참이 지나서야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죠· 우리들 같은 지배층이나 고위 관료들은 세상 일을 보고서와 서류 같은 걸로 헤아리려는 실수를 종종 범합니다· 좋은 통치자는 도장만 찍어선 안 됩니다· 서류로는 드러나지 않는 현상을 읽어내고 정확히 판단해야 하죠· 그러기 위해선 직접 삶의 현장을 체험하고 인간의 적나라한 면면을 경험하며 통찰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뭘 얻었죠?”
“관문지기로 일하면서 저는 인간의 본성 한가지를 이해했습니다· 관문을 드나드는 상인과 밀수꾼에게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죠· 그들은 가장 가치있는 물건 가장 빛나는 물건은 남에게 자랑하고 내보이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춰두었죠· 가장 어둡고 악취를 풍기며 구석지고 더러운 곳에 말이죠· 아무도 넘보지도 훔쳐내지도 못하게 말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병사도 장교도 범죄자 노숙자 모두 같은 본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죠·”
“····”
“저는 이터니아가 가장 귀중한 재능을 당신과 저같은 소위 ‘탐욕스런 권력자들’ 앞에 내보일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재밌네요· 그렇다면 숨기는 게 있다는 구체적인 정황이나 증거라도 있나요?”
“그 본성을 이해한다면 굳이 보고서나 증거물 없이도 확신할 수 있죠·”
이터니아는 최고의 인재를 꽁꽁 감춰두고 있다고?
잠잠히 프란츠의 말을 듣고 있던 비비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장광설을 참 재미있게 풀어내시는군요····”
이터니아가 북부의 지배자가 될 게일 바리안느 소드마스터의 수제자인 시온 이자렐보다 더한 괴물을 숨겨두고 있다는 건데 그런 재능이 한 학년에 쏠리는 건 확률적으로 희박하다· 쉽사리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던 중 잠시 이어진 적막을 깨고 누군가가 귀빈실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누군가가 다급하게 들어선다· 비비의 보좌관 제럴드였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비비에게 다가가다 프란츠의 얼굴을 보고는 멈추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쇼· 프란츠 황자님을 뵙습니다· 적절치 못한 때에 찾아온 것 같군요·”
프란츠는 그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아뇨· 이미 충분히 즐겼습니다· 보아하니 급한 용무인가 보군요· 저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곤 비비의 얼굴을 돌아보며 말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혼자만 신나게 말을 쏟아내고 도망치시는군요·”
“하하 다음엔 당신 차례인 걸로 하죠·”
프란츠는 가볍게 인사를 전하고 자리를 떠났다·
프란츠가 귀빈실을 나가고 이야기가 새어나지 않게 문이 닫힌 걸 확인한 제럴드가 비비에게 다가가 말했다·
“일전에 말씀하신 데미안이란 학생에 대해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말해봐요·”
“그 학생과 출신과 대마법사에 대한 목격담을 종합해 보았을 때 그 둘은 제법 돈독한 관계로 보이며· 그 둘의 관계에 그 어떤 대외적인 명분이나 청탁은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대마법사는····”
“그만하면 됐어요· 지금은 그 여자에 대해서 듣고 싶지 않네요· 그것보다···그 데미안이란 학생은 입학식에 참석하지 않은 게 확실한가요?”
“확실합니다·”
비비의 마음 속에 작게 파문이 일었다·
“알겠어요· 고생했어요·”
비비는 제럴드를 등지고 다시금 창밖 풍경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파문 속에서 프란츠가 띄운 배는 휩쓸리지 않고 닻을 내린 것처럼 그 자리에 둥둥 떠있었다·
“아 이터니아의 전투부는 호위 임무를 대외 활동 과제로 준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지명 호위 의뢰를 맡기는 것도···가능합니다·”
비비는 생각에 깊이 잠긴 채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
햇살이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의식이 점점 또렷해진다· 나는 미간을 찡그리고 눈을 떴다· 눈 앞에 새하얀 천쪼가리가 레이스의 옷자락처럼 펄럭인다·
나는 물기가 없어 퍽퍽해진 눈을 비비고 다시금 초점을 잡았다·
활짝 열린 창문과 선선한 바람을 타고 커튼이 펄럭이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청명한 하늘과 새털구름이 보인다· 새하얗고 푹신한 침대· 더불어 마음이 편안해지는 라일락 향기가 난다· 나는 미궁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분명히 살아 있었다·
나는 욱신거리는 팔로 상체를 일으켰다· 내 이불 옆쪽에 무언가가 꾹 누르고 있다는 걸 그제서야 인지했다·
새하얗고 긴 머리카락의 소녀· 트리샤였다·
그녀는 침대 모서리에 엎드린 자세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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