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9
나는 트리샤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그녀는 잠버릇처럼 몸을 살짝 꿈틀거릴 뿐이다·
그녀의 손가락과 손목에 붕대가 감겨져 있지만 다른 부상 부위는 보이지 않는다· 정말 다행히도 그녀는 크게 다치치 않은 모양이다·
창문 너머로 가벼운 바람과 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내 주변의 상황이 너무도 평화로워 지난 미궁에서의 사투가 마치 잠깐 스쳐가는 꿈처럼 느껴진다·
살아날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포근한 침대와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일어날 거라곤 더더욱 기대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난 걸까·
나는 가운 속에 손을 넣어 내 복부를 더듬었다· 커다란 흉터가 남아 피부가 울퉁불퉁했지만 관통상은 완벽하게 회복된 상태였다·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데 불편함도 없다·
그리고 침대가 다소 들썩거리자 그제서야 잠에서 깨어난 트리샤가 몸을 뒤척이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아 흐응····”
부스스하게 늘어져서 앞을 가린 머리카락들을 옆으로 넘기고서야 내 모습을 마주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크게 당황한다·
“···어 어?”
“····”
“너 너 깨어난 거 맞아?”
트리샤가 벌떡 일어나서 넋놓고 침대에 올라오려 하자 나는 곧장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
“응 일단 앉아봐·”
트리샤가 내 상태를 살피더니 흥분을 애써 가라앉히고 착석했다·
“아 응···!”
“너는···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나? 나는 갈 곳이 없어서 여기서 잠깐 쉬고 있었어!”
갈 곳이 없어서 내 병실에 있었다고? 여기가 그리 일상적인 공간은 아닐 텐데·
“나는···여기 얼마나 누워있던 거야?”
날짜 감각이 완전히 지워진 것도 그렇고 상처가 말끔하게 아문 것도 그렇고· 누워있는 사이 긴 시간이 지난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존재했다·
그녀가 잠시 주저하듯 입을 다물었다·
그런 반응이 나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왜 그래?”
“····”
트리샤가 머뭇거리자 나는 재촉했다·
“괜찮으니까 말해봐·”
“···그게 너 반년 동안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어·”
“···뭐?”
심장이 철렁 내려 앉는다· 정말 그렇게 오래 지났다고?
“반 년···?”
“응·”
눈 앞이 깜깜해진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실베린이었다· 한 학기를 날린 건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녀와의 약속을 어겼고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볼귀와 등골에 싸늘한 기운이 올라온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굴렸다· 아직 햇빛이 드는 곳에 있으니 해명할 시간은 남아있다·
내 모습을 보는 트리샤의 눈꼬리가 씰룩거렸다·
이윽고 즐거운 듯 눈은 반달모양으로 휘고 양 볼에 깊은 보조개를 띄우며 웃음을 터뜨렸다·
“풉!”
그녀는 침대에 다시 엎드리고 내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퍽퍽 쳐대며 신나게 웃어댔다·
“푸하하! 표정 봐!”
이런 육개월이 지났다는 말은 트리샤의 짓궂은 장난인가보다·
나는 그제서야 상황 파악을 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긴장이 풀리는 바람에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여야 했다·
“그래 재밌으면 됐다·”
얘는 내가 왜 그리 심각하게 굴었는지 잘 모를 거다·
트리샤가 몸을 일으키고 웃음을 억지로 멈추려 잠시 심호흡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날 보는 눈꼬리에 웃음기가 가득하고 입은 꾹 다물었지만 보조개는 여전히 깊다·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너 여기 누워 있는 동안 이거 하려고 얼마나 칼을 갈았는지 알아?”
넌 내 꼴을 보고도 장난칠 생각이 나오니·
하지만 그 모습이 해맑고 청량해서 차마 안 좋은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얼마나 지났는데?”
“일주일·”
“····”
“걱정 마· 지금은 조정 기간이라 수업 빠진 건 없어·”
그렇다면 다행···이 아니지· 일주일도 길다· 어찌됐건 그동안 약속한 편지를 안 보내고 내내 퍼질러 있었다는 말이니까·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조금 막막한데·
“근데 선택 과목하고 특기 활동은 정해야 돼· 다음주까지 안 정하면 그냥 무작위로 배정한다니까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특기 활동····”
일전에 실베린이 설명해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예술 분야에서 한가지를 골라서 이수해야 한다고 했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당장엔 내가 의식을 잃은 이후에 이터니아는 어떻게 굴러갔는지 알고 싶었다·
“그보다····”
트리샤가 끼어들어서 말을 이었다·
“미리 골라둔 거 있어? 맞다 나 연극부 들어갔다? 그냥 걸어가는데 한 선배가 오더니 나만 콕 찝어서 넌 꼭 연극해야 하는 얼굴이라면서 설득하더라구 그래서 가입했어·”
나는 잠시 트리샤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제대로 된 곳 맞아?”
“응 소극장도 있고 거기 선배들도 엄청 많아· 마음에 안 들면 조정기간 안에 바꾸면 되니까 나쁠 거 없어·”
그래 날 속여먹었으니 연기에 소질이 없는 것 같지는 않다·
“근데 연극해야 하는 얼굴이 무슨 뜻이지···?”
트리샤가 시선을 슬쩍 피하고 귀 뒤로 머리를 슬쩍 넘기며 넌지시 말했다·
“뭐긴···내가 좀···음 ‘이쁘다’는 말이지·”
“네 진짜 모습을 보고 한 말은 아닐 거잖아·”
“상관없어· 본모습이 더 낫긴 하지만 이제는 변장한 것까지 내 일부 같은 걸·”
“아무렴 잘 됐네·”
연극이라· 트리샤에게 잘맞는 걸 고른 것 같다· 그녀는 정적인 것보다는 활동적인 게 잘 어울린다·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미궁에서 쌓인 외로움도 어느정도 해소할 수 있을 테고·
나는 대화 주제를 틀었다· 내가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럼 미궁은····”
트리샤가 불쑥 내 쪽으로 몸을 들이밀고 말했다·
“내가 연극부 구경시켜줄게! 그리고 다다음주는 1학년 공통 수업이 있어· 그룹 활동 같은 거래· 꽤 중요한 건가봐· 얼른 회복해서 너도 빠지지 말아야지·”
“···그래·”
그리고 나는 트리샤의 밝은 모습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트리샤가 멀쩡한 건 확인했으니 미궁과 흑마법사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었다·
그 큰 일을 겪었으니 응당 알아야 할 것들이었다·
헌데 트리샤는 질문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은연중에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회피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내가 있는 병실 쪽으로 걸어오더니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문을 열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엘라 교수였다·
그녀는 문 앞에서 내가 깨어난 모습을 확인하자 안도한 듯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이제 일어났구나·”
“아 교수님·”
그리고 트리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급한 일이 떠오른 것처럼 말했다·
“나는 연극부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나중에 봐!”
트리샤는 엘라에게 가볍게 인사하고는 곧장 병실을 떠났다·
엘라는 트리샤를 한 번 돌아보고는 내쪽으로 다가와 그녀가 있었던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다행이네 좋아보이는구나· 너나 트리샤나·”
“저는 괜찮습니다· 근데···트리샤에게도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트리샤는 다치진 않았어· 네가 목숨 걸고 싸운 덕에 말이야· 그 대신 마음 고생을 했지·”
“····”
“네 모습을 보고 제일 많이 운 사람은 트리샤일 거야· 걔가 일주일 내내 병실에 찾아와서 이불 갈아주고 몸 닦아주고 하면서 널 간호했던 건 아니?”
“트리샤가요···?”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해맑게 나를 대했고 그 덕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고맙긴 하다만 그녀와는 지극정성으로 간병할 만한 깊은 유대감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종의 책임감이라도 작용한 걸까·
“응· 트리샤는 네가 그렇게 된 게 자기 탓이라 생각하고 있어·”
내 생각이 맞았다·
“그리고 자신을 원망하고 그 때문에 사이가 멀어질까봐 두려워해·”
그래서 그런 걸까· 미궁에 관한 이야기를 회피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이유가·
“트리샤를 원망할 거였으면 애초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기 급급했을 겁니다·”
트리샤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싸우기도 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도망치지 않은 건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앞으로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어· 그런 일이 또 반복되면 너나 트리샤나 서로 견디기 힘들어질거야·”
“····”
“그리고 이번 일은 이터니아 단기 폐쇄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큰 사건이야· 이를 계기로 트리샤는 이터니아를 떠나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
“죄책감 때문에요?”
“복합적인 이유로 말이야· 죄책감이 이곳에 머무르려는 의지를 꺾을 수도 있겠지·”
“····”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엘라는 대화를 전환했다·
“너나 트리샤의 처우에 관해선 나중에 이야기 하자· 그나저나 몸은 좀 어때·”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가뿐합니다·”
“···그래· 미궁이나 흑마법사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겠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당장은 안정을 취하도록 해· 몸이 완전히 나으면 그때 날 찾아와· 궁금한 건 다 대답해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엘라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는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그녀에게 물었다·
“저 교수님·”
“응·”
“제 물건들은 다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엘라는 침대 프레임 아래에 손을 넣어 한 목함을 꺼내고 내게 건넸다·
“이 안에 있어·”
“···감사합니다·”
나는 상자를 열고 그 안에 있는 물품들을 확인했다·
팔찌 목걸이 반지 등등 대부분 그대로 있었는데 단 하나 보이지 않는 게 있었다·
“교수님 혹시 스티치는 못 보셨습니까?”
엘라는 잠시 미간을 좁히고 기억을 되짚으며 말했다·
“···음 스티치였던 걸로 추정되는 건 있었지·”
“···네?”
“네가 발견되었을 때 옆에 놓여져 있던 건데···아 그 가죽 주머니 안에 담겨 있을 거야·”
목함 안에는 처음 보는 가죽 주머니가 들어 있다· 이걸 말하는 건가·
나는 서둘러 가죽 주머니를 들고 매듭을 풀어냈다· 그리고 그 내용물을 확인했다·
“····”
그 안에는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난 금속 부품들이 담겨 있었다· 그 잔해들 표면에 거뭇거뭇한 이니셜의 흔적이 보인다·
실베린이 준 스티치가 맞았다· 대체 어쩌다 이 꼴이 된 거지·
“아····”
그대로 모든 사고가 정지해버렸다·
엘라가 내 표정을 보고 의문을 띄웠다·
“왜 그래?”
“저···혹시 스승님은 제가 흑마법사의 습격을 당한 걸 알고 계십니까?”
“아직 성도에 도착하면 전달받을 테니 조만간 알게 되겠지·”
망했다·
***
마차는 성도의 초입부에 들어섰다· 정돈된 포장 도로를 나아가는 덕에 마차가 덜컹거리는 일은 없어졌다· 가랑비가 내려 마차는 미끄러지기 쉬웠고 그 덕에 평소보다 더욱 느리고 잔잔하게 이동했다·
실베린은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고 멍한 눈으로 창에 흐르는 빗물을 감상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오직 데미안 뿐이었다·
“나쁜놈····”
제자의 편지는 일주일이 넘게 소식이 없었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친구들에 정신이 팔려 멀리 나간 스승은 안중에도 없는 건지 아니면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건지· 그녀의 머릿속은 어지럽게 생각이 뒤엉켜 있었다·
스승의 아량으로 사흘까지는 넘어가줄 수 있다· 하지만 참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일주일이 넘도록 지체하는 건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다·
스승은 그토록 제자를 생각하고 아끼는데 제자된 도리로서 편지 한 통 보내는 게 그리도 어려운가·
매일 편지를 보내겠다고 본인이 약속해 놓고선····
그렇게 먹여주고 챙겨주고 아껴주고 애정을 쏟아부었는데 돌아오는 건 스승에 대한 무관심이다·
서운한 감정은 눈처럼 차곡차곡 쌓여 ‘죄송하다’는 말로는 절대 녹일 수 없을 정도로 얼어붙었다·
합당한 이유를 마련해놔야 할 것이다· 거지같은 핑계를 댔다간 큰 대가를 치를 테니까·
실베린은 속으로 분노를 삭히며 중얼거렸다·
“돌아가면···진짜 죽여버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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