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
우리는 위젤 지역을 향해 나아갔다· 위젤에는 실베린의 저택이 있다고 했다·
실베린은 이따금 위젤이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인지 자랑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위젤은 만년설 가득한 빙하가 녹아 투명한 계곡물이 흐르고 들판에는 꽃이 가득하다고 한다·
숲에는 희귀한 약초들이 많고 마수는 그 넓은 지역에서 일 년에 한 두 마리 보일까 말까 할 정도· 그마저도 대부분 다른 지역에서 넘어온 것이라고 했다·
미개척지를 벗어나고 우리는 작은 마을의 여관에서 밤을 청했다·
저녁 식사를 하며 우리는 호칭을 통일했다· 그녀는 교수님이나 스승님은 너무 딱딱하다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라 했다·
그날 밤 나는 별의 조각을 찾을 때 조금 이상했던 점을 실베린에게 이야기했다·
구울에 관한 꿈과 결정적인 때에 나타난 오두막에 대해 이야기하자 실베린은 진지한 얼굴로 경청했다·
“그 근방이 원래 봉화랑 천문대가 있던 곳이야· 버려지긴 했어도 제법 멋진 곳이었지· 운석과 함께 전부 박살 나버렸지만·”
실베린은 혹시 모르니 의미심장한 꿈을 꾸면 메모해 두라고 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이튿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다시금 여정을 떠났다·
***
일주일이 걸려 위젤 지역에 진입하고 나서는 긴장이 한층 풀렸다· 마수가 갑자기 튀어나올거란 긴장도 덜었고 무엇보다 온화한 날씨와 천혜의 자연환경 덕이 컸다·
실베린의 대저택에 도착하고선 내 눈은 휘둥그래졌다· 궁궐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100년 전에는 이 저택에 뱀파이어가 살았었대·”
실베린은 이 사실이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어릴 적 뱀파이어가 사람을 돼지처럼 사육한다는 괴담을 전해 들었던 기억이 문득 수면 위로 올라왔다·
“⋯썩 반가운 소리는 아니네요·”
실베린은 내 반응을 보곤 픽 웃으며 말했다·
“기회가 되면 비밀 지하 감옥도 보여 줄게·”
“····”
농담이겠지? 이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저택에 지하 감옥이라니·
대저택에서 집사와 메이드가 우릴 마중 나왔다· 대저택부터 메이드까지 익숙한 건 하나도 없었다· 나는 풍족한 생활 환경을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던 탓이다·
실베린은 말에서 내려 기지개를 죽 폈다· 나도 그녀를 따라 말에서 내린 뒤 저택 풍경을 감상했다·
실베린이 집사에게 나를 소개했다·
“내 제자야· 여기 오래 머물 거니까 방 하나 내주고 옆구리에 흉터 있으니까 이것 좀 다시 봐 줘· 필요한 거 다 챙겨 주고·”
집사가 내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집사장 에즈라입니다· 편하게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집사장이라는 말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럼 그 밑으로 부리는 집사들도 더 있다는 말이다· 에즈라는 중년의 남자였다· 나와 나이 차이도 많거니와 나는 사람을 밑으로 부려본 적이 없다·
나도 정중히 인사했다·
“데미안입니다·”
실베린은 전부 제쳐두고 이미 저택의 새하얀 현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식사 전까지 전부 끝내!”
그러곤 홀연히 저택으로 들어가 버렸다·
실베린의 칼 같은 명령에도 집사장과 메이드의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를 맞이하는 이들의 표정이 굉장히 온화했다· 이는 형식적인 환대와는 다른 꾸며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들은 손님을 맞이하는 일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문득 궁금해서 집사장에게 물었다·
“···저 같은 방문객이 많은가요?”
“실베린 아가씨는 방문객 자체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손님을 직접 데려오신 건 정말 오랜만이죠·”
이들이 이렇게 손님을 반가워 하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집사장 에즈라가 손짓하며 나를 저택으로 안내했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집사장은 중앙 홀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가 2층 방으로 나를 이끌었다·
“이곳이 데미안 님이 쓰실 방입니다·”
내가 로레일 관에서 생활할 때의 방보다 다섯 배쯤 되어 보인다· 3명은 나란히 누워도 충분할 정도의 하얀 침대와 햇볕이 탁 트인 발코니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감탄하며 머뭇거리는 사이 메이드들이 내 짐과 내가 입고 지낼 의복을 방에다 나르고 수납함에 일사천리로 정리했다·
내 뒤에서 한 메이드가 은쟁반 위에 포션 병들을 담은 상태로 말했다·
“흉터를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아 네 그러시죠·”
메이드가 방 한쪽에 있는 안락의자로 날 이끌었다· 내가 의자에 앉자 메이드가 말했다·
“상의을 벗어 주세요·”
내가 상의를 벗자 메이드가 유심히 내 상체를 살폈다· 메이드는 내 복부에 있는 기묘한 흉터들을 보고 고개를 기웃거렸다· 레이스의 손에 뚫렸던 자국이다·
내 옆구리는 포션으로 급하게 치유한 탓인지 그중에서 제일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메이드가 투명한 액체를 거즈에 뿌리고 내 상처 부위에 발랐다· 특유의 알싸한 약초 냄새로 알 수 있었다· 마취액이었다·
“많이 뜨거울 겁니다·”
그런 뒤 메이드가 초록색 액체를 스포이드에 넣고 마취한 부위에다 한 방울씩 떨궜다·
타는 냄새와 함께 피부를 불에 지지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아악!”
나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메이드는 상처 부위를 전부 지지고 회복 포션으로 그 위를 빠짐없이 도포했다·
마무리로 복부에 능숙하게 붕대를 감고는 메이드가 말했다·
“내일 아침에 붕대를 푸시면 됩니다· 다만 그때까지 목욕은 안 됩니다·”
이런· 실베린의 저택에 와서 제일 하고 싶었던 게 목욕이었다·
이런 내 심정을 알고 있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나는 물양동이와 물수건을 가져온 메이드들이 내 방으로 들어섰다·
목욕이 안 되니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려는 것 같았다·
메이드들이 내 옷을 벗기려 했다· 나를 무슨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이 훅 달아오른 채로 메이드들의 손을 떼내며 말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다들 나가주세요·”
그제야 메이드들은 손을 멈추고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고는 저들끼리 서로 눈빛교환을 한 후에 말했다·
“식사 시간 때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메이드들이 전부 나가고 나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다이닝 룸에서 다시 만난 실베린은 간편해 보이는 얇은 린넨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방금 막 목욕을 마치고 왔는지 볼에는 홍조가 올라와 있었고 여정으로 인해 푸석했던 머릿결엔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나는 쭈뼛거리며 실베린의 맞은편 테이블에 앉았다· 곧이어 메이드들의 손에 이끌려 음식들이 하나씩 서빙되었다· 난 아직도 이런 대접이 익숙하지 않았다·
실베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뱃가죽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다고 하던데· 무려 다섯 개 씩이나·”
내 흉터를 치료하던 메이드가 실베린에게 말했던 모양이다·
“아 그거요···· 네 거의 죽다 살아났죠·”
“누가 그렇게 한 거지?”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레이스였습니다·”
실베린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 반짝였다·
“일반인은 평생 찾아다닌대도 만나기 힘든 레이스를···? 어디서 봤는데 너 전생에 죄지었어?”
“···북동부 미개척지에서 봤습니다·”
“거긴 왜 갔는데?”
솔직하게 말하기가 묘하게 어렵고 민망했다· 앞뒤없이 무모한 놈으로 보일까 싶어서였다·
“이번 거랑 똑같은 이유에서요·”
실베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너도 보통 독한 놈이 아니구나· 한 번 그거 찾으러 갔다가 죽을 뻔했는데 또 간 거야?”
“네 어쩌다보니····”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모르겠다·
“그땐 어떻게 살아난 거야?”
“그때는 동행자가 있었습니다· 그 동행자가 절 살려 줬어요·”
동행자라는 말에 그녀가 잠깐 머뭇거린 뒤 말했다·
“동행한 사람도 마법사였나봐?”
“네·”
실베린이 리자에 관한 걸 물을까 봐 나는 긴장했다·
아직은 그녀를 신뢰할 수 없었기에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예상과는 달리 실베린이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다행히도 그녀는 거기서 끝내버렸다·
질문을 마친 실베린이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내가 뭘 실수한 건가?
그녀는 무언가 물어보려다가 다시금 입을 닫는다· 이내 속이 답답했는지 대뜸 테이블에 있는 빵을 집어먹었다·
실베린은 입을 오물대면서 좀 전의 대화를 곱씹는 것 같았다· 어딘가 불만족스럽다는 듯이·
분위기가 살짝 어색해지자 내가 질문을 이었다·
“여기 혼자 지내시는 겁니까? 가족 분들은요?”
“나 혼자야· 그냥 눈치 안보고 편하게 지내도 돼·”
“따로 사는 겁니까?”
실베린은 덤덤한 목소리 톤으로 말했다·
“아니· 나이 차이 나는 동생 하나 있었는데 오래전에 죽었어·”
아뿔싸· 괜한 소리를 했나·
그녀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신경 쓰지 마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실베린이 문득 생각이 났는지 말을 이었다·
“맞다 오늘 밤에 딴짓 하지 말고 푹 쉬어둬· 내일부터 바로 수련이니까·”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는구나· 설렘과 두려움이 마음 속에서 뒤엉킨다·
하루 이틀은 더 쉴 줄 알았는데 괜한 기대였나보다· 나나 실베린이나 하룻밤 편히 잔다고 그간 쌓인 여독이 다 풀릴 리가 없는데·
“좋아요·”
“우리가 조금만 일찍 만났다면 수련도 하고 동네 구경도 시켜줬을 텐데· 아쉽게도 그렇게 여유 부릴 시간이 없어·”
***
나는 발코니 의자에 앉아 달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실베린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3개월·”
아카데미 입학 시험까지 남은 기한이었다· 아카데미까지 이동하는 시간을 빼면 세 달도 채 되지 않는다·
나는 그동안 아카데미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내 머릿속엔 의문 만이 가득했다· 단 삼 개월 만에 아카데미에 걸맞은 실력을 가질 수 있을까?
비웃음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실베린은 뭘 보고 날 데려온 걸까· 단순히 검 하나 때문에?
사제관계가 되었다고 해서 그녀에게 모든 걸 의지할 수는 없었다· 쉽게 얻은 건 버리는 것도 쉽다·
당장은 잘 지낼 수 있을 것처럼 보여도 일이 조금 수틀리거나 비위를 못맞춘다는 이유로 도로 내칠지 누가 알겠는가·
가슴이 답답해서 두어 번 심호흡했다· 생각을 많이 해 봐야 달라질 건 없었다·
중요한 건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다·
너무 멀리 보지 말고·
도달할 수 있는데까지·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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