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0
흑마법사의 침입은 이터니아 폐쇄를 논할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었다·
헌데 초유의 사태를 맞이했음에도 이터니아가 폐쇄되지 않은 이유는 학생들이 돌아갈 지역이 전부 이터니아보다 더더욱 취약한 환경이기 때문이었다·
전력 보강 및 수습을 하는 기간 동안 수업 일정이 미뤄졌고 일정 공백 기간 동안 특기부 활동에 전념하도록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나는 신체 내부 조직이 아직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이유로 포션을 더 투여하고 하루 정도 더 병실에서 진료를 받기로 했다·
그리하여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서 빈둥거려야만 했다·
멀찍이 어딘가에서 내 또래의 소녀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다· 분명 눈을 뜨기 전에는 지옥이었는데 세상은 달라졌다· 동전의 단면이 뒤집힌 것처럼·
상쾌한 바람과 적당한 햇살· 고위 귀족들의 휴양지같이 평화롭다·
죽음을 불사하고 처절하게 싸웠던 일이 한순간의 꿈결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한편으론 다시 자고 일어나면 세상은 다시 뒤집혀 다시 축축한 안개와 피 구울 시체들을 맞이할 것만 같았다·
나는 눈을 꾹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잡다한 감상에 빠져선 안 된다고 나를 다그쳤다·
이 휴식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아직 전부 끝난 건 아니니까·
나는 간호 메이드에게 요청해 따로 챙겨두었던 노트와 필기구들을 꺼냈다·
노트를 펼치고 실베린에게 보낼 편지 내용을 생각했다· 성도에 도착한다면 연락이 통한다 하니 겸사겸사 내 편지도 전달할 계획이었다·
어리숙하게 속이려 해선 역효과만 생길 거고 그렇다고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말할 순 없었으니 앞뒤가 꽉꽉 막힌 셈이다·
나는 문장을 썼다가 취소선을 긋길 반복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쓸 말이 안 떠올랐다· 그렇게 몇 시간을 고뇌하다 포기하고 노트를 덮었다·
내 머릿속엔 독기가 빠져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실베린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다음날 나는 퇴원하자마자 바로 엘라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나는 흑마법사와의 일전에 대해 마저 진술했다· 엘라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내 이야기에 집중했다·
“조사하면서 어느정도 정황은 파악하고 있었는데···그런 일을 겪고도 이리 태연할 수 있는 게 놀랍구나· 이런 면은 무서울 정도로 실베린이랑 닮았어·”
“····”
“그리고···흑마법사의 얼굴을 봤다고?”
“네 바로 앞에서 마주했습니다·”
“···그림은 그려본 적 있니? 몽타주를 남겨줄 수 있겠어? 당장은 아니어도 돼·”
“지금도 가능합니다· 간단한 스케치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노트랑 연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금속 세공의 첫번째 작업은 언제나 도안 스케치였다· 연필을 잡았던 시간이 길어 간단한 초상을 그리는 건 문제 없었다·
“지금 그리겠다고?”
“네·”
나는 엘라로부터 양피지와 연필을 건네받고 빠르게 스케치를 시작했다· 간단하게 이목구비와 머리카락을 묘사하고 엘라에게 전했다·
내가 펜을 잡을 때만 해도 엘라는 의구심 어린 시선을 거두지 못했는데 그림을 받고나자 그 눈초리는 사라졌다·
“금속 세공을 수련했다 그랬나? 손재주가 남다르구나·”
“그 정도가 한계입니다·”
“충분해· 고마워·”
그 뒤로 엘라는 흑마법사의 침입 이후 이터니아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했다·
흑마법사는 루나를 조종해 수호목이 펼친 결계를 무력화 시켰고 그 덕에 침입이 가능해졌다고 했다·
케드웬이란 사람은 마스터스 클래스 졸업자인데 그를 이용해서 미궁의 파훼법을 알아낸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흑마법사는 나와의 전투 이후 종적을 감췄고 아직 조사가 진행중이라고 전했다·
“아직도 진행 중이야· 이터니아의 수호목과 루나에게 그 짓거리를 한 존재가 무엇인지 아직도 정확한 파악이 안 됐어·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것일 가능성이 커·”
“다른 차원에서 오면 뭐가 다릅니까?”
“많이 다르지· 경험한 적이 없으니 예방도 대처도 불가능해· 거기다 파훼법을 알아내는 데엔 오랜 연구가 필요하고·”
“루나의 상태는 많이 안 좋습니까?”
입학식 전날 밤에 수호목 앞에서 루나와 마주한 적이 있었다· 그때 루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루나는 겁에 질려 있었고 나는 수호목과 루나 주변에서 별다른 이상 현상을 정말 조금도 감지하지 못했었다·
“···많이 안 좋아· 외상은 치료했지만 아직도저주의 결속이 풀리지가 않았어· 지금도 루나의 마력은 계속 빠져나가서 수호목을 공격하고 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둘 다 봉인시켜서 진전을 막는 것 뿐이야· 네가 언급한 케드웬도 즈베레프란 놈도 아마 같은 것에 당했겠지·”
“···루나를 제가 직접 만나봐도 되겠습니까?”
“솔직히 네가 짊어진 부담을 더 키우고 싶지는 않구나· 그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북부에 관한 일은 전부 중단하고 파견 나간 교수들이랑 네 직속 선배들 전부 복귀시키기로 결정이 내려졌어· 반쪽짜리였던 이터니아가 다시 완전해지면 상황은 지금보다 좋아지겠지· 당장에 네가 할 일은···아카데미에 적응하는 거야·”
“····”
엘라는 한동안 고심하다가 말을 덧붙였다·
“정 그래도 그 존재에 대해서 파헤치고 싶다면 내일 다시 찾아와·”
“알겠습니다· 그리고···다들 복귀한다 하셨는데 그럼 제 스승님도 돌아오시는 겁니까?”
“실베린의 복귀 여부는 성도에서의 일이 어떻게 풀리냐에 따라 달라질 거야· 소식을 전하고 싶으면 편지를 나한테 줘 내일 상부에 보고하면서 겸사겸사 전달해 줄게·”
“····”
엘라가 내 얼굴을 잠시 유심히 보다가 말했다·
“뭐 마음에 걸리는 거 있어?”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마음을 다잡고 이야기를 꺼냈다·
“교수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무슨 부탁?”
“제가 흑마법사와 엮인 건 늦지 않았다면 스승님께 비밀로 하고싶습니다·”
엘라가 곧장 미간을 좁히고 입을 꾹 닫는다· 내 말의 본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내 표정을 유심히 살핀다·
“꼭 비밀로 해야할 말못할 이유라도 있는 거니?”
“그렇습니다·”
엘라는 머리가 복잡한지 펜대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천천히 내뱉었다·
“난 그게 좋은 생각인지 모르겠구나· 흑마법사에 관한 일이면 실베린이 알아야하고 알 수밖에 없어· 어찌저찌 속인다고 해도 결국 복귀했을 땐 전부 다 눈치채게 될거야·”
···그래도 시간을 벌고 그동안 대책을 세울 수는 있겠지·
“괜찮습니다· 스승님께 심려를 끼쳐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하아 그래· 일단 방법을 알아보고 내일 마저 이야기 하자꾸나· 기숙사는 한동안 윗드러프관에 머물거나 더 안전하게 지내고 싶다면 실베린의 성에서 통학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특기 활동도 어서 고르고 괜히 미루다가 문예부같이 음습한 데에 배정되면 그것만큼 낭패도 없으니까·”
분위기가 안 좋은 부서도 있나보네· 음습하다는 말을 들으니 문예부에 대한 거부감이 확 올라온다· 이거 잘 알아봐야겠다·
“명심하겠습니다 교수님·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내일 보자·”
내가 몸을 돌려 교수실을 나가려 하자 엘라가 넌지시 말을 흘렸다·
“아 손재주가 좋으니까 미술부도 한 번 들려봐· 연극부도 좋고· 강요는 아니니까 그냥 참고만 해·”
***
마도학부의 연구동 건물에서 나와서 윗드러프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동하는 도중에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기분이 이상해서 몇 번씩 뒤를 돌아보았다·
교재를 가슴에 껴안은 푸르스름한 머리색의 한 여학생이 날 뒤따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잠시 움찔한다·
그러다 현상수배범을 찾는 경비병처럼 눈을 살짝 좁히고 시선을 내게 고정한 채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너 너 혹시 신입생이야?”
“···네?”
“혹시···데미안이라고 들어봤어? 아니 네가 데미안이야?”
“네 맞습니다만···누구십니까·”
“아 맞구나! 혹시나 해서 의심만 하고 있었는데· 다른게 아니라 누가 널 엄청 애타게 찾더라구· 아카데미 학생은 아닌 것 같은데···· 메이드 복을 입은 여자애가 캠퍼스에서 길을 잃은 것 같아서 우리가 아침부터 잠시 데리고 있었어· 그 이름이 니니? 리리? 였는데· 아는 사람이야?”
메이드복을 입은 거면 리리아를 말하는 것 같은데· 날 찾다가 길을 잃었다고?
“네· 제가 아는 사람이 맞습니다·”
속이 쓰리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이터니아 캠퍼스 지도라도 챙겨줄 걸·
“어디에 있습니까?”
“어 아는 사람 맞나보네· 잘됐다· 마법학부 칼테라 원소 수련장에···아니다· 너도 신입생이니까 잘 모르겠구나· 그냥 내가 안내해줄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니야· 신입생들 캠퍼스에서 길 잃는 거 엄청 흔해· 캠퍼스가 어지간히 커야지· 나도 처음엔 길 잃어서 엉엉 울었어· 따라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앞장서서 나를 안내했다· 나는 군소리 없이 뒤따랐다· 한동안 조용하고 어색한 동행이 이어진다·
그렇게 걸어가다 그녀는 몇 번씩 뒤돌아보며 내 얼굴을 힐끔거렸다·
몇 번을 그러다 그녀는 마법학부 본과에 도달할 때쯤 마지못해 내게 한마디 건넸다·
“저기 얼굴 좀 풀면 안 될까? 무섭거든·”
“···예?”
“인정 많은 도련님이신가봐? 그냥 메이드인데 엄청 신경쓰나보네· 친한 사이야?”
“···”
“에휴 너 무슨 여동생 납치당한 친오빠 같은 얼굴이야· 나 납치범 아니고 감금 협박같은 거 안 하니까 표정 좀 풀라구· 뒤통수 따가워·”
낯선 사람들 틈에서 겁먹고 오들오들 떠는 리리아의 모습이 자꾸만 그려져 급한 마음이었다·
그러던 중 나도 모르게 표정이 안 좋아졌나보네· 뭔가 민망하다·
“어린 친구라서 많이 신경 쓰이는 건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거의 다 왔어· 너무 걱정하지 마·”
한동안 더 나아가 우리는 마법학부의 야외 수련장에 다다랐다· 그녀는 잠시 멈춰서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음···· 이 근처에···아! 저기 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지목한 곳에 휴식처처럼 조조성 된 작은 정원이 있었다· 거기서 나무 둔치 하나를 둘러싸고 학생들 대여섯이 모여서 뭐라 떠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로 리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서둘러 그곳으로 다가가자 틈을 비집고 가기도 전에 리리아가 날 알아보고 소리쳤다·
“데미안님!”
곧이어 학생들에게서 길이 열리고 리리아가 뛰쳐나와 내게 안기듯이 몸을 겹쳤다·
“리리아 별 일 없었어요?”
그녀는 나를 살짝 올려다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남학생들은 우리를 슥 보고는 잘 됐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
“혹시 남자들이 이상한 걸 묻거나 집적대거나 괴롭히고 그런 건 아니죠?”
“아뇨! 언니 오빠들이 엄청 잘 해주셨어요· 오늘 살면서 귀엽단 소리를 가장 많이 들은 것 같아요· 간식도 엄청 챙겨주시고요·”
입가에는 미처 닦아내지 못한 쿠키 부스러기가 묻어 있다· 잘···있었나보네·
나는 입가의 부스러기를 떼어주고는 잠시 안도했다·
리리아가 내 얼굴을 보더니 오히려 역으로 날 걱정한다·
“저 데미안님· 그···정말 안심하셔도 돼요· 감사한 분들인 걸요· 표정 푸세요·”
아 또 얼굴이 굳었나보네· 불미스런 사건을 겪고 아직 독기가 다 빠지지 않은 탓일까·
리리아가 원래 앉아 있던 나무둔치에 쫄래쫄래 돌아가서 바구니를 들고 다시 내 앞으로 왔다·
“지난 주에 데미안님한테 편지를 보냈었는데 다치셔서 연락이 안 될거라는 통보가 날아왔어요· 무슨일 있으셨던 거 맞죠···!”
“지금은 괜찮아요·”
“걱정했어요· 혹시나 해서 제가 약초랑 포션이랑 간식들 다 챙겨왔어요···· 이거요·”
그러고는 내게 바구니를 내민다·
그 안에는 실베린과 체력단련을 할 때 먹던 약초 추출물과 그리폰 포션 버터 쿠키 그리고 세실이 좋아하는 꽃잎 사탕도 들어 있었다·
“····”
그걸 보자마자 마음 속에 단단히 뭉쳐 있던 무언가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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