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5
데미안이란 소년은 이 그림을 그린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
조르지아에게 그림은 영적이면서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이었다·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그림이 있다면 남들에게 꼭 감추고 싶은 그림도 있다·
이 그림은 동네방네 자랑하려고 그린 것이 아니란 건 캐묻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애착이 담긴 것이다· 그러니 조르지아가 직접 그에게 직접 찾아가 이런 그림이 있다고 알려줄 이유까지는 없었다·
오래된 연인인지 아니면 한 소녀의 일방적인 짝사랑인지는 알 수 없었다· 조르지아의 마음 속에는 이 그림에 얽힌 사연을 파보고 싶은 욕구가 피어올랐지만 그냥 속에다 묻어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 여겼다·
언젠가 그가 이 창고에 들리는 날이 올 것이고 그때 자연히 알게 될 것이었다·
***
미술부 첫 수업은 오후 세시에 있다· 미술부실도 있지만 그곳에서 수업이 진행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했다· 조르지아는 틀에 박힌 걸 선호하지 않는 탓에 수업 장소는 대개 연금부의 온실이나 야외에서 받는다고 했다· 수업 장소가 날마다 바뀌는 탓에 전달사항을 꼭 체크하라고 조언했다·
미술부 입부 수속을 마친 후 밖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은색 스티치 하나가 내 앞으로 쪼르르 날아왔다·
거기엔 내게 전하는 쪽지가 한 장 물려 있었다·
미궁을 통해서 금지된 숲으로 오라는 엘라의 전언이었다·
금지된 숲은 원래 내 마스터스 클래스 입학식이 치러졌어야 할 장소였다· 내게 뭔가 보여주려는 걸까·
나는 지체할 것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수호목 앞에선 사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날 데리고 금지된 숲으로 향했다·
미궁에는 이례적으로 안개가 걷혀 있었다· 사서들은 상황이 복구될 때까지 이 상태가 유지될 것이라고 했다·
한동안 나아가 금지된 숲에 진입하고 더 깊게 나아가니 커다란 공터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엔 기다란 통나무를 사각형으로 쌓아서 올린 제단이 있었다· 이런 식의 제단을 고아원에 있을 때도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장례를 지낼 때 말이다·
그 위엔 새하얀 옷을 입은 시신들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나는 저 위에 누운 이들이 누구인지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그들은 흑마법사에게 죽음을 맞이한 사서들이었다·
엘라를 비롯한 쉰 명 남짓한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몇몇은 가면을 쓰고 일부는 벗어서 손에 쥐고 있었다·
미궁에서 이렇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걸 눈으로 본 건 처음이었다·
나는 엘라 교수의 옆에 말없이 다가갔다· 그 자리가 무얼 위한 것인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굳이 잡다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제단 앞에서 기도문을 읊었다· 기도가 끝나자 사람들이 꽃을 한송이씩 제단 위에 올려놓는다·
곧이어 두 명의 남자가 제단을 빙 돌며 기름을 흘린다·
그리고 엄숙하게 성호를 그린 뒤 마지막으로 불을 붙인다· 기름이 묻은 통나무에 불이 피어오르고 점점 번지기 시작해 시신들을 태우기 시작한다·
타닥거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운다·
장례를 치를 때 흔히 듣던 곡소리와 훌쩍임은 없다·
사람들의 몸짓엔 엄숙함과 절제된 슬픔만이 감돌뿐이다·
오래 전부터 예상하고 맞이할 준비가 된 일이었다는 것처럼·
그런 의연하고 담담한 모습이 내겐 한편으론 낯설게 다가왔다·
엘라는 하늘로 치솟는 회색 연기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마스터스 클래스는 이곳에 첫발을 내딛으며 입학식을 맞이한단다· 네 입학식이···이렇게 진행되어 유감이구나·”
엘라의 말에서 진심어린 안타까움이 묻어나왔다·
“괜찮습니다·”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그리고···더욱 안타까운 건 너를 포함한 이 많은 사람이 희생하고도 끝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야· 비통해할 시간도···그리 많지 않아·”
“····”
엘라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힘없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누워있던 동안 마법 학회에선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가 빗발쳤었어· 이터니아에만 기습을 감행한 게 아니야· 구울들은 대륙 각지의 성소들을 무작위로 쳐들어갔지· 어떤 곳은 방어에 성공했지만 어떤 곳은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지· 이 사건이 무엇과 연관된 건지 말해줘도 넌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 하겠지· 당장에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이건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설마 실베린이 성도로 떠난 것도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흑마법사는 한 명이 아닌 겁니까?”
“정황상 그럴 가능성이 크지· 다만 이번 사태에서 흑마법사의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증언한 사람은 아직까진 너 하나뿐이야·”
이는 흑마법사를 본 사람은 나를 제외하고 전부 죽었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사실 나도 죽은 거나 다름 없는 끔찍한 상태였다· 이렇게 살아남은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흑마법사는 절 살려둔 겁니까?”
엘라의 눈이 깊어진다· 그녀는 한동안 깊게 고민한 뒤에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단다· 네가 흑마법사를 물리친 건지 아니면 널 확실히 죽일 수 있었는데 물러난 건지· 어쩌면 네가 들었던대로 제물로 이용하려는 것일수도 있고·”
왜일까· 그녀는 나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내게서 원하는 것이 있었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나는 묘한 불쾌감을 뒤로하고 나는 활활 타오르는 제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
장례를 마치고 엘라는 나를 데리고 미궁에 위치한 필라이온 마도학 연구소로 이동했다·
엘라는 바로 그곳에 루나를 보살핀다고 말했다·
연구소로 이동하면서 수호목의 현 상태와 루나가 겪은 일들에 대해 추가로 전해들었다·
“루나도 미궁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겁니까?”
“흑마법사와 접촉하게 된 이상 우리가 관리해줘야겠지· 그 아이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감각이 예민한 아이야· 마스터스 클래스의 존재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직감하고 있었고 가면을 쓰고 있어도 본모습을 전부 꿰뚫어보더구나· 마스터스 클래스에 들어오지는 못하더라도 상황이 좋아지면 앞으로 루나는 우리의 일을 배우게 될 거야·”
“···그럼 저에 대해서도 알고 있겠군요·”
냐는 가면을 쓴 상태로 루나와 마주한 적이 있었다·
“맞아· 루나는 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 전부 털어놓더구나· 정령과 사념체가 전부 사라지는 걸 보고 네 정체를 알아챘다고·”
“····”
“그리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도 하더구나· 마법에 재능이 있는 아이는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거 아니?”
“네 전에 스승님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내 예지몽과 관련해서 실베린이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었다· 마법에 재능이 있는 아이는 미래를 볼 수 있지만 인간의 언어와 지식을 습득하면서 그 능력이 점차 사라지게 된다고 했었다·
“그래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구나· 루나는 인간과의 교류가 적었던 탓에 그 능력이 다른 아이들보다 오래 유지되었어· 지금은 그 능력이 거의 퇴화하긴 했다만 직관의 형태로 희미하게 남아있는 모양이야·”
“····”
“그리고 그 ‘직관’이 데미안 너에게 무언가가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그랬어· 지금 루나와 수호목을 지배하려 드는 그 이계의 정령도···널 극도로 두려워한다고· 네가 무언가를 바꿀 수 있을 것 같다고·”
내게 무슨 기대를 걸고 있는 건가· 그렇다고는 해도 당장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예 존재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것과 뭘 하겠는가·
“···왜 그런지 교수님은 짐작가시는 게 있습니까?”
“어쩌면···네 검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어· 세상에 레이스를 베어낼 수 있는 검은 극소수야· 검기를 둘러도 레이스를 잡는 건 불가능해· 그것들은 우리의 세계에 묶인 존재가 아니야· 죽은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니지· 레이스를 베는 게 가능하다면··· 네 검은 다른 차원의 존재도 죽일 수 있는지도 몰라·”
“혹시···과거 기록 중에 제 검에 관련된 이야기가 담긴 건 없습니까? 정령과 사념체를 죽이는 검이라던가····”
엘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단 하나도 없어· 적어도 아직까지는· 어쩌면 인간과 교류가 단절된 엘프들의 기록보관소에 있거나 북부의 ‘죽음의 땅’에서 발견되지 않은 채로 있을지도 모르지· 우리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죽음의 땅을 탐사하는 것뿐이야·”
“죽음의 땅은···어떤 곳이죠?”
엘프들의 기록보관소나 북부의 죽음의 땅이나 나에겐 생소한 것이었다·
평범한 방법으로 내 검의 본래 용도를 찾기는 불가능하단 것· 그거 하나만은 확실히 알겠다·
“급하게 알아내려고 애쓸 필요는 없어· 마스터스 클래스에 들어온 이상 너도 자연히 알게 될 거야· 이 미궁의 존재 자체가 그곳을 위해 만들어진 거니까·”
엘라는 회중시계를 들고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우선···루나의 상태를 확인하러 가지·”
***
엘라는 루나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정확히는 봉인되어 있는 장소라 표현하는 게 맞겠지만·
루나와 수호목에게 저주를 내린 ‘검은 정령’은 지금도 루나를 지배하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정령사와 정령 간의 지배구조가 역전 된 상태와 유사한 상태였다· 그것들은 루나에게 지배권을 행사하고 그녀의 마력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수호목에 저주를 걸었다· ‘검은 정령’의 진짜 주인은 흑마법사인 게 확실해 보였다·
이터니아는 루나의 마력을 고갈시키고 힘을 봉인함으로써 저주의 진전을 막았을 뿐 근본적으로 해결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루나의 몸상태는 이전보다 많이 좋아지고 의식도 회복했지만 극도의 피로감을 유발하는 ‘마력 고갈’상태로 있어야 했기에 하루 중 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 정도에 불과했다·
내가 찾아갔을 때도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연구소 지하 겹겹이 쌓인 반투명한 결계와 새하얀 철창으로 사방이 막힌 감옥같은 곳· 그 가운데에 침대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 위에 누워 있는 루나의 팔과 다리는 새파랗게 발광하는 쇠사슬로 구속되어 있었다·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녀는 죄인처럼 구속되어 있었다·
가슴에 무게추를 단 것처럼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언제까지 저러고 있어야 하죠?”
“연구가 빠르게 진전된다고 해도 이번 학기는 아무것도 못하고 보내야 할 거야·”
곧 다가올 합동 수업은 정령사에게 굉장히 유리하다고 들었다· 어쩌면 루나의 독무대가 될지도 모르는 자리다·
재능을 펼치고 주목받을 기회도 그대로 날려버리게 되겠구나·
“루나는···특별히 원하던 특기 활동이 있었습니까?”
엘라는 내 질문이 다소 의아하다는 듯이 대답한다·
“루나의 집사가 말하길··· 사람들하고 접촉하는 걸 꺼리는데 연극 보는 건 굉장히 좋아했대·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요·”
“의식이 돌아올 때면 항상 ‘카나리아와 광대’ 희곡을 반복해서 읽더라고· 왜 책이라도 가져다 줄 생각이야?”
“···아뇨·”
난 루나와 친해질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가진 모종의 상처 때문에 나와는 친해지기 어렵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냥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고 힌트가 될까 싶어 물어본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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