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8
부부장 제니아는 연기를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이런데서 화염계 원소 마법을 쓰면 다 번질수도 있는데 참····”
릴리트는 다시 묵묵히 일어서서 흙먼지로 더럽혀진 옷을 툭툭 털어내고 다시 싸울 준비를 한다·
내 기억 속 여리고 소극적이었던 인상과는 다르게 지금은 차분하고 결연하다·
안 보는 동안 수련에 집중하고 있었구나·
“신입아 아는 사람이야?”
“아뇨 아닙니다·”
제니아 부부장이 큰일은 아니라는 것처럼 말한다·
“수련인가? 이건···우리가 굳이 안 끼어들어도 되겠네· 지쳐서 누우면 알아서 공격을 멈출 거야·”
플랜테라의 습성상 전투불능 상태가 되면 건드리지 않는다· 좀 지쳐보이긴 하지만 남의 수련에 굳이 끼어들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비명 소리도 분명 들렸는데 그건 릴리트 쪽에서 나지 않았다는 거다·
그 생각과 동시에 옆쪽에서 누군가가 찢어질 듯한 고함을 내질렀다·
“야! 거기 아니야!”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고함이 난 방향에는 다른 한 무리의 플랜테라가 밀집해 있었다· 그것들은 누군가를 어깨에 들쳐업고 숲속으로 진입하는 중이었다· 입학시험 때 전투불능의 학생들을 이터니아로 운반할 때의 상황과 비슷하다·
제법 거리가 멀어서 얼굴이 잘 안 보였는데 금발 머리카락과 목소리를 미루어 미술부 부장 헤일리가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절박한 외침이 다시 메아리친다·
“꺄악! 신입! 여기야 여기!”
제니아가 한손으로 입을 가리고 큭큭 웃으며 말했다·
“부장님의 마지막 테스트가 남았네· 어서 가서 놀아줘· 저 마법부 여자애는 내가 맡을 테니까·”
검을 나한테 맡기고 필사적으로 배역에 몰입하고 있을 미술부장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웃음기를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하고는 곧장 검을 뽑아들고 헤일리쪽으로 뛰어나갔다·
***
열심히 추격했지만 바로 따라잡지는 못했다·
플랜테라는 부장 헤일리를 들쳐업고 숲속으로 먼저 진입했다·
입부식이 아직 끝난 건 아니니 대충 임해서는 안 된다·
다행히도 플랜테라의 육중한 무게 탓에 흙바닥엔 선명한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발자국을 쭉 따라 숲속으로 진입하자 곧이어 헤일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입! 여기야!”
소리를 추격하니 곧이어 헤일리를 운반하는 플랜테라 무리가 시야에 잡혔다·
그런데 무슨 짓을 한 건지 처음에 봤을 때보다 그 수가 늘어나 열 다섯이 되었다· 가까이 보니 몸집도 꽃동산으로 가는 길에 마주한 것보다 조금 크다·
나는 플랜테라 무리에 달려들었다· 이에 헤일리가 다급하게 소리친다·
“신입! 안돼! 얘들 중급자용이야!”
내가 근접하자 후열에 있는 플랜테라가 반사적으로 부웅 소리가 나게 팔을 휘둘렀다· 파괴음과 함께 근처에 있던 나무 일부가 부서진다·
곧이어 내 존재를 눈치챈 무리의 다른 녀석들이 뒤로 몸을 돌리고 적대적인 자세를 취한다·
부장의 마지막 테스트인만큼 난이도가 조금 올라간 모양이다·
후열의 플랜테라 다섯이 동시에 내게 달라붙는다· 나는 곧장 뒤로 빠져서 불규칙하게 나무들 옆으로 움직였다· 한마리씩 유인해서 처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꺅! 신입! 오지마· 다친다니까!”
내게 제일 먼저 달려든 플랜테라의 정강이에 칼을 휘둘렀다· 두 번은 찍어야 깔끔하게 절단이 됐다· 다리가 절단되어 중심을 잃고 기울어지면 그 틈에 팔을 잘라냈다· 그렇게 유인된 다섯의 플랜테라를 처리했다·
그리고 다시 무리에 다가가니 헤일리를 업는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전원이 내게 덮쳐들었다·
“신입! 포위되면 너 다쳐! 검을 나한테!”
플랜테라의 공격을 두어번 회피하니 그 사이 나는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공격적으로 나가기가 힘들었다· 검 자체는 굉장히 훌륭했지만 손에 잘 안 익었다는 게 문제였다·
팔은 문제가 없다· 하지만 두께가 있는 다리는 통으로 베어내려 하면 중간쯤에 박혀버리고 말았다·
나는 사방에서 오는 공격을 피해냈다· 부서진 나무 뿌리의 파편과 자갈들이 요란하게 튀어댔다·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 빈틈이 보이면 발목을 두세 차례에 걸쳐 깎아냈다· 한놈이 발목이 떨어져 몸이 기울어지고 옆에 놈과 몸이 엉킨다·
급한 상황이다보니 나도 모르게 습관이 나왔다· 몇몇개는 평소처럼 관절 틈에 칼을 꼽고 이음부만 툭툭 끊어 분해하듯이 처리했다·
남은 건 여섯· 남은 게 줄어들 수록 플랜테라를 정리하는 속도도 빨라졌다·
헤일리가 다시 소리친다·
“야! 칼을 나한테 던져!”
나한테 덤벼든 것들을 모두 정리하고 그녀를 붙들고 있는 마지막 플랜테라에 검을 던졌다·
그렇게 쇄도한 검은 마지막 남은 놈의 두 발목을 자르고는 나무 기둥에 박혀버렸다·
나는 빠르게 달려가 고꾸라지는 플랜테라로부터 헤일리를 안아들었다·
됐다·
그제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합격이라고·
헤일리가 소리를 잔뜩 질렀는지 안긴 채로 기침을 해댔다·
나는 헤일리를 땅에 내려놓고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너 뭐야?”
“테스트는 이제 통과한 겁니까?”
그녀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한다·
“알고 있었어?”
“부부장 선배가 알려주셨습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만히 플랜테라의 잔해를 둘러본다· 이게 무슨 일인지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이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듯이 내 양팔을 붙잡는다·
“그보다 너 안 다쳤어? 이걸 한 번에 다 잡는 놈이 어딨어· 나도 저렇게 무식하게는 안 잡아·”
헤일리가 잠시 애매한 반응을 보이자 의심이 들었다· 내가 제대로 한 게 맞나?
“혹시 제가 시험을 잘못 해석한 겁니까?”
그녀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냥 칼만 건네주는 용기만 보여도 합격인데? 플랜테라 잡는 건 내 역할이고·”
“····”
“신기하다· 얼굴만 보면 도련님처럼 자랐을 것 같은데· 너···1학년 맞아?”
***
숲에서 나오는 길에 나는 헤일리와 긴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거 한동안 안하긴 했지· 싸우긴 커녕 다들 쫄아서 도망치기 급급하니까·”
그녀는 갑자기 신난듯이 내 팔뚝을 수차례 찰싹 때리고는 말을 이었다·
“네 덕에 오랜만에 진짜 재밌었어· 너 쪼금 멋있더라· 합격! 합격!”
내가 무리해서 테스트에 임한 덕에 헤일리는 한껏 흥이 돋아 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부원으로 인정한 분위기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야· 교내 대항전에 이제 한시름 덜겠다· 너 딴데 가지마· 알았지?”
“그림 말고는 달리 배우고 싶은 것도 없습니다·”
“이쁘다 이뻐· 위젤 출신이라 그랬나? 방학 때 내가 제국 구경 시켜줄게·”
“기회가 되면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리리아를 찾을 때 도움을 줬던 파벨라 선배에 관한 질문을 조심스럽게 건네니 그녀가 갑자기 폭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아 걔 파벨라 초대로 미술부에 들어온 남자애가 갑자기 사랑 고백을 해서 한때 고생했거든· 심지어 두 명이나· 한 번은 어땠는지 알아? 다같이 그림 그리고 있는데 갑자기 파벨라 옆에 벌떡 일어서서 두루마리를 펼치더니 자기가 쓴 사랑의 발라드를 읊는 거야· 상상이 돼?”
“····”
“그 정도면 여자들 진짜 트라우마 생겨· 나 같아도 좀 경계했을 거야· 예민해도 네가 이해해줘·”
“알겠습니다·”
숲에서 벗어나 꽃동산으로 다시 나오자 플랜테라의 잔해 위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릴리트와 마주쳤다·
“어머 쟤 내가 유인해 온 플랜테라랑 엮여서 고생 좀 했을텐데·”
그 많은 플랜테라가 어떻게 모였나 했더니 헤일리가 직접 하나하나 유인한 거였구나· 나는 무슨 선배들만 아는 전용 페로몬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수련하는 줄만 알았던 릴리트는 사실 영문도 모르고 그거에 엮인 모양이었다·
릴리트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어깨가 축 처지고 기운이 없어보인다·
그리고 다행히 나에겐 관심도 없는지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헤일리가 릴리트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였다·
“너 괜찮아? 미안해· 나중에 미술부에 찾아와· 내가 치료해주고 포션도 챙겨줄게·”
릴리트는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를 하고는 말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 자리가 불편한지 그녀는 힘없이 그 말만 남기고 자리를 피했다·
***
다사다난한 미술부 첫 수업을 마쳤다·
나는 트리샤가 말했던 오후 6시 연극부의 소극장 입구 앞에 대기했다· 일정을 마감했으니 이젠 함께 귀가할 시간이었다·
소극장 출입문에는 ‘타 부원 출입금지’ 라는 글귀가 큼직하게 걸린 탓에 차마 들어갈 순 없었다·
극장 입구에 드나드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연극부는 아직 일정이 안 끝난걸까· 다들 지나갈 때마다 한 번씩 나를 유심히 훑고 지나쳤다· 시선들이 은근 따갑다·
그렇게 한 십여 분을 기다렸을까· 소극장 안쪽에서 쿵쿵거리는 요란스런 발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트리샤였다· 무슨 급한일인지 머리도 살짝 헝클어져 있다·
그녀는 밖에 나와서 문을 거칠게 닫고는 잠시 등을 기대고 헐떡이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미처 숨을 다 고르지도 않고 내게 들러붙어서 어깨를 꽉 부여잡고 말했다·
“데미안 너 여기 있으면 안 돼! 절대 절대로!”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중범죄라도 저질렀다는 것처럼 굉장히 다급한 기색이다·
“네가 여기로 오라고 했잖아·”
연극부로 데리러 오라고 크게 소리를 질러 놓고는····
“그건 나중에 이야기 하고!”
그녀는 내 등을 떠밀며 서둘러 극장에서 벗어났다·
길을 벗어나서 정원수가 빽빽하고 인적이 드문 곳 한 가운데로 날 계속 밀어냈다·
“트리샤 일단 진정부터····”
나는 멈추려고 저항했지만 트리샤는 내 가슴을 계속 밀어냈고 결국 나무뿌리에 걸려 주저앉고 말았다·
트리샤는 추격자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한 번 슥 살피고는 내 다리틈에 들어와서 쪼그려 앉았다·
“너 지금 엄청 위험한 거 알아?”
“···내가?”
“응! 연극부 선배들이 너 괴롭히려고 작당하는 거 들었어· 너무 야만적이고 불쾌한 방식이었어· 앞으로는 연극부에 얼씬도 하지 마·”
“····”
“내가 너 지켜내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안된다고 그렇게 설득하고 애썼는데 말을 듣질 않아· 네가 내 친구 아니었으면 진작 포기했을 거야·”
“연극부에선 나한테 왜 그러려는 건데?”
“그건 나중에 이야기해줄게· 한동안 숨어지내는 게 좋겠어·”
해봐야 짓궂은 장난 정도겠지· 크게 걱정은 안 한다만 나도 미술부 선배한테 비슷한 이야기를 듣긴 했으니 일단은 적당히 수긍했다·
“···그래·”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이자 트리샤가 안도한 듯이 숨을 내쉰다· 그런 그녀의 숨결에서 묘한 단내가 난다·
“근데 무슨 냄새야· 너 연극말고 다른거 해?”
“냄새? 뭐? 아! 이것 때문이야·”
트리샤가 주먹만한 가죽 주머니를 하나 꺼낸다·
그 안에서 먹기 좋게 세로로 토막낸 당근을 한조각 집어들었다·
“갑자기 웬 당근?”
“1학년들은 복잡한 배역은 소화를 못해서 우화극으로 연습하고 있어! 나는 토끼고·”
“토끼 역할에 몰입하려고 먹는거니·”
“응 비슷해· 퓨리키오산 스위트 캐럿이야· 이거 엄청 달다?”
그러고는 한입 베어물고는 오물거렸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나한테도 권유했다·
“너도 먹어·”
“아니 괜찮····”
트리샤는 본인이 한입 베어문 것을 내 입술에다 강제로 비집고 넣었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내 입을 막아버렸다·
“친구끼리는 콩 한쪽도 나누는 거랬어·”
갑작스레 들어온 이물질에 당황하자 트리샤가 나를 사근사근 달랬다·
“꼭꼭 씹어· 옳지 옳지·”
마지못해 씹긴 했다만···맛은 좋다· 일반적인 당근과는 다르게 달달한 맛이 깊고 진하다·
트리샤가 보조개를 띄우며 수줍게 웃더니 내 옆골반을 아기 달래듯이 토닥거린다·
“아구 잘했어요·”
“····”
“원래는 너랑 말 한마디도 안 하려 그랬는데 말 잘 들어서 봐줄게·”
아침의 일을 말하는 건가· 난 아직도 토라졌던 이유조차 감이 안 잡히지만···그냥 군소리 없이 받아들이는 게 덜 골치아플 것 같다·
곧이어 제법 가까운 곳에서 한 여학생이 그녀를 애타게 불러냈다·
“트리샤! 얘는 대체 어딜 간 거야?”
트리샤가 깜짝 놀란 듯이 몸을 움츠리고는 내 귀에 대고 소곤소곤 말했다·
“가면 어딨어· 가면!”
“···안주머니에·”
그녀는 멋대로 내 품안을 뒤지더니 가면을 꺼내 내 얼굴에 씌웠다·
“이거 쓰고 있어· 그리고 정문에서 기다려· 금방 갈게!”
트리샤는 정원수들을 뚫고 불쑥 튀어나갔다· 잠시 뒤에 그들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저 여깄어요·”
“트리샤 네 친구 이 근처에 있었다면서 어디로 간 거야?”
이 둘의 말소리가 점차 멀어져간다· 나는 가만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모르겠어요· 기다리다 먼저 떠났나봐요·”
“그래? 에이 아깝네· 내가···해서···할라 그랬는데·”
점차 멀어지는 탓에 말소리를 전부 파악할 수는 없었다· 트리샤가 살짝 언성을 높힌다·
“안돼요! 걔 그런 취향 아니래요 언니!”
“무슨 취향인데? 혹시···야?”
“아뇨! 눈처럼 하얗고 긴 머리···대요·”
“···뭐야 걔 할···니 좋아해?”
“아니···아니라····”
“야 복잡할 거 없어 남자는···같아···맛보면···빠져····”
“이잉 아니····”
트리샤가 어떤 애를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 대해서 이상한 소리는 안 둘러댔으면 좋겠다·
나는 잠시 나무에 몸을 기댔다·
뭘까· 기분이 이상하다· 오늘 하루 동안의 일이 전부···기묘한 연극처럼 느껴진다·
모두가 대본을 꿰고 있고 관객은 나 하나뿐인 그런 연극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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