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2
즈베레프는 북부로 향했다·
그는 북부 텐타켈 지역의 어느 한 유목 부족과 합류해 한동안 그들의 생활 양식과 연금술 전통을 배웠다·
그들은 플랜디어스 족이었다· 물고기와 말젖을 주식으로 삼으며 원시적 전통을 유지하는 평범한 부족이었는데· 다만 특이한 건 그들은 변덕이 심하고 극한을 오가는 북부의 기후에 수백 년간 완벽하게 적응했다는 것이다·
어떤날은 우박이 내리고 또 어떤 날엔 눈보라가 쏟아지는 생존이 어려운 기후에서 적응하고 번영할 수 있었던 데엔 한가지 비밀이 있었다· 바로 ‘영매’의 힘이었다·
놀랍게도 플랜디어스 부족은 인구의 1할이 영매였는데 그들은 자연과 감응하고 급변하는 날씨를 예측해 미리 대피하도록 부족을 지휘했다·
영매들은 우리들의 관점에서 볼 땐 바로 ‘정령사’였다·
즈베레프가 찾아다니는 ‘테브리스’ 인자가 무엇인지 정확한 설명은 없었지만 그는 플랜디어스 족을 두고 ‘테브리스’ 인자의 연관성에 대해 언급했다·
즈베레프는 그 정체불명의 인자가 ‘영매’의 능력을 발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플랜디어스 족의 활동 지역은 대륙의 최북단에 위치한 ‘죽음의 땅’과 접경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연구를 위해 더 북쪽으로 이동하려 하자 부목민들이 모두 그를 말렸다·
그리고 부족장에게서 기이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부족민들은 즈베레프의 마법 지식을 보고는 그 또한 ‘영매’의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고 ‘영매의 힘이 있는 이는 절대 죽음의 땅에 가선 안 된다’며 경고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즈베레프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팔다리가 사슬로 구속된 채로 관 안에 감금된 한 청년이었다· 그 청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관짝에 감금된 청년과 죽음의 땅이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묻자 그들이 답했다·
죽음의 땅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있다고 했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으며 그 안에는 악귀와 혼돈의 에너지가 활화산처럼 꿈틀댄다고 이야기했다·
그들은 그곳을 ‘악마의 구덩이’라고 칭했었다·
그 안에는 빛을 삼키는 어둠이 뿜어져 나왔다· 이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 근방에선 횃불과 빛을 내는 마석이 힘을 잃는다고 했다·
그리고 더욱 기괴한 이야기를 전했다·
‘죽음의 땅에 다녀온 영매들은 전부 미쳐버린다·’
관짝에 구속된 청년은 우연히 죽음의 땅에 발을 디뎠던 영매였다·
증상은 전부 비슷했다· 영매들은 ‘악마의 구덩이’에서 수백 수천에 달하는 사념체들이 비명과 괴성을 지른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 다녀온 뒤로는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
처음엔 환청을 듣다가 검은 형체의 환영을 보고· 종국엔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정신이 지배당해 ‘악마의 구덩이’에 달려가 몸을 던져버렸다·
‘악마의 구덩이’가 이들의 육신을 강하게 잡아당기는 탓에 사슬로 묶고 관짝에 넣어 구속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루나의 증상과 대부분 일치하는 사례였다·
그들은 즈베레프에게 도움을 청했다· 부족의 강인한 전사들이 영매를 괴롭히는 그 검은 형체와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해 달라고 말이다·
즈베레프는 마압 지대에 사는 토르니카 부족에게서 얻은 지식을 활용하여 한가지 레시피를 고안했다·
거기에 필요한 재료는 단 두 가지·
말라디루트 그리고 도플러의 피였다·
***
다만 이는 실험실에서 검증된 것이 아니라 즈베레프의 가설을 기반으로 고안된 레시피였고 플랜디어스족과 그 관짝에 갇힌 청년의 뒷이야기 또한 적혀있지 않았기에 확실한 해결책이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그렇지만 충분히 시도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첫번째 재료인 말라디루트는 대지에서 마력이 뿜어져 나오고 강한 마압이 형성되어 있는 지대에서 서식하는 희귀 약초였다·
독특한 점은 마압이 강한 곳이라면 그 어떤 지형 기후 심지어 오염된 환경에서도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약초의 특별함은 무형의 에너지를 물질화 시켜 뿌리에 저장하는 데에 있었다·
정령체가 많은 숲에서 자란다면 정령체가 남긴 에너지를 먹고 이를 물질화시켜 뿌리에 저장하고 사념체가 가득한 곳이면 사념체의 에너지를 먹고 저장했다· 영적인 기운을 물질계로 환원시키는 힘을 지닌 것이다·
더군다나 환원하는 과정에서 독소와 독기를 중화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이 뿌리를 태운 연기를 들이 마시면 그 안에 담긴 에너지 성분에 대한 감응력이 일시적으로 증가했다·
몇몇 소수 부족들은 말라디루트를 순환계를 관장하는 토착신과의 소통과 제사에 활용하기도 했다·
즈베레프는 죽음의 땅에서 자란 말라디루트 혹은 이계종이라 밝혀진 도플러의 피를 먹고 자란 말라디루트라면 ‘검은 형체’에 대한 감응력이 좋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활로는 찾았다만 희귀 약초와 이계종 마수의 피를 어떻게 구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나는 바로 조언을 구해볼만한 사람을 찾아나섰다·
***
미술부 고문 조르지아는 조교가 건넨 서류 뭉치를 받아들고 물었다·
“이게 다 뭐야?”
“미술부 관련 서류예요·”
“그러니까 왜 이렇게 많냐고· 쥐꼬리만한 특기부에 뭐가 이렇게 요구하는 게 많아?”
“교수님 그 중 절반은 입부 신청서예요·”
“···뭐?”
조르지아는 즉시 서류를 받아들고 한장씩 넘겨보았다· 정말이었다·
한 학기에 고작 예닐곱 명에 그치던 입부 지원자가 서른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개중엔 연극부와 무용부 이력이 찍혀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 입부 경쟁 치열한 곳을 버리고 미술부로 온다는 게 상당히 의심스러웠다· 거기에 이어 조르지아가 바라던 남자 입부 희망자는 단 두 명에 불과했다·
“참내·”
조르지아는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는 조교에게 물었다·
“얘 이게 무슨 일인지 알고 있어? 뭐 학교에 떠도는 소문이라던가· 아니면 황자님이 미술에 취미라도 생겨서 갑자기 제국에 유행이라도 생긴 거야?”
조교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소문을 본인입으로 말하기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교수님도 잘 아시잖아요· 이번에 미술부에 들어간 남자애가 제법 눈에 띄는 외형이라····”
조르지아가 미처 생각도 못했다는 듯이 이마를 쳤다·
“내가 돌아버리겠다· 돌아버리겠어·”
“저 교수님 궁금해서 그런데 저도 나중에 한 번 찾아가도 되나····”
“야! 너까지 이러면 어떡해!”
“앗 죄송해요····”
여학생 보겠다고 지원한 남자들은 숱하게 봐왔지만 그 반대의 경우로 여자 지원자가 몰리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지원자가 많다고 좋아할 게 아니었다· 이러나 저러나 미술이 본 목적이 아니면 분위기를 흐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도 심사를 좀 꼼꼼하게 해야겠어·”
그러던 중 누군가가 교수실 문을 노크했다· 조르지아는 입부자 처리 문제 때문에 뒷목을 주무르고는 말했다·
“들어와·”
한 소년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이를 본 조르지아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재밌게도 그 사람은 한바탕 입부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인 바로 데미안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다름 아니라····”
그녀는 중간에 말을 끊었다·
“어머 얘 마침 잘 됐다· 이리와· 여기 앉아·”
그녀는 응접용 소파를 가리키고는 앉게 했다· 그리고는 주전자에서 허브티를 타고는 데미안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딱 좋을 때 왔다· 마침 온 김에 우리 말 좀 맞춰야겠어·”
“예?”
“너 이제 미술부 나간거야·”
“···?”
“아니 진짜 나간 게 아니라· 누가 혹시 물어보면 이번주까지만 그렇게 말 해· 너 미술부 나갔다고·”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니 너하고는 아무 문제 없어· 걱정하지 마· 아무튼 알겠지?”
데미안이 나갔다는 소문이 퍼지면 불순한 목적으로 온 이들은 쉽게쉽게 걸러질 것이었다·
데미안은 잠잠히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거야?”
“다름아니라· 개인적으로 연구해보고 싶은 약초가 있는데···그에 관해서 교수님께 몇가지 여쭈려고 찾아왔습니다·”
조르지아는 차를 한 잔 홀짝이고는 말했다·
“뭔데 우리 미술부원이 도움이 필요하다는데 들어줘야지· 무슨 약초를 연구하려는데?”
“말라디루트입니다·”
산만했던 조르지아의 기세가 일순 잠잠해지고 눈꺼풀에 힘이 들어갔다·
“흠···· 말라디루트라·”
그녀는 잠시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관자놀이에 손을 짚고 데미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 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꾹 참았다·
1학년 학생들은 곧 합동 수업을 맞이한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그 수업에서 최우수 성적을 받으려고 치열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조르지아는 그게 전부 헛수고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노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본질을 보는 것이었다· 말라디루트는 그 본질에 다가가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였다· 그 누구도 심지어 연금부 학생들조차 말라디루트엔 조금도 근접하지 못했다·
근데 연금술엔 관심도 없을 것 같은 곱상한 전투부 학생이 이에 대해 묻는건···굉장히 흥미로운 일이었다· 물론 말라디루트만 알아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섣부른 기대는 금물이만· 지켜볼 가치는 있었다·
“연금···아니 전투부라 그랬지?”
“네 맞습니다·”
“재밌네· 그래서 말라디루트에 대해서 뭐가 알고 싶은 건데?”
***
“도플러? 도플러는 왜?”
“연구 용도입니다·”
엘라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물었다· 그녀의 옆에는 서류가 전에 찾아왔을 때보다 훨씬 늘어 있었다· 굉장히 바쁜 모양이었다·
“도플러를 어디서 보냐고? 직접 찾아나서기라도 할 거야?”
“할 수만 있다면 그럴 생각입니다·”
“가면은 도플러가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특수 인챈트가 걸려 있어· 가면을 쓰고 리그베드에서 한사람 한사람 붙잡고 말을 걸면 언젠가 얻어 걸리긴 할거야·”
“그 방법 말고는 없는 겁니까?”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야· 도플러에 대한 연구가 쌓이지 않았을 땐 이터니아가 진짜 그 짓거리를 해서 도플러를 잡아냈었거든·”
“····”
“네가 직접 찾을 필요는 없어· 도플러는 마도학 연구소에 수용하고 있으니까· 네가 원한다면 도와줄 수 있는데 문제는···네 용도를 알아야 해· 도플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거야? 아니면 도플러에서 나오는 재료가 필요한 거야?”
“후자입니다·”
“그거면 가능해· 다만 도플러의 피나 분비물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래선 안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단순해· 거기엔 신경독이 있어· 절대 입에 대면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세 시간 후에 마도학 연구소를 찾아가· 마수학 연구원한테 준비해놓으라고 말해둘 테니까·”
“감사합니다·”
엘라는 손을 휙휙 흔들어서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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