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3
말라디루트는 지맥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풍부한 곳에서 드물게 자란다고 했다· 마력의 밀도가 짙을 수록 발견할 확률이 크지만 그만큼 마압도 강해서 그 근방에 접근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 조르지아는 조언했다·
초고밀도의 마력이 뿜어져 나오며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아 희귀한 식생들로 가득한 원시림 지대· 그곳은 생각보다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건 바로 내 마스터스 클래스 입학식 장소였던 ‘금지된 숲’이었다·
조르지아는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된 구역이라 이터니아에서 구하긴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나에겐 그건 해당사항이 아니다·
나는 미궁을 헤쳐나갔다· 엘라 교수가 연구소에 찾아가 보라고 한 시각은 아직 한참 뒤였기에 우선 말리디루트부터 찾아 나섰다·
금지된 숲에서 마수가 출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크게 위험한 종은 없다고 했지만 나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포션과 묘목검을 챙겼다·
한동안 나아가 마침내 금지된 숲의 초입부에 진입했지만 나는 별다른 마압을 느끼지 못했다· 금지된 숲과 마압에 관련된 경고들을 생각해보면 내 마압 내성이 얼마나 높은지 새삼 체감되는 부분이었다·
이 땅에서 굉장한 밀도의 마력이 뿜어져 나온다는데···내겐 마력의 존재도 사실 감지가 안 됐다· 내 끔찍한 마법적 재능 또한 여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어찌됐든 이 숲에 원할 때마다 출입할 수 있는 건 굉장한 행운이자 특권이었다·
즈베레프가 말한 최적의 약초 식생 조건에 금지된 숲이 완벽하게 부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보물창고였다·
주류 연금술의 관점에선 이곳은 ‘좋은 조건이나 굳이 찾아갈 필요는 없는 곳’에 그친다·
주류 이론을 배격하고 정체불명의 연금술사의 이론을 따르는 건 일종의 도박과도 같았지만 나는 즈베레프의 이론을 따를 생각이었다· 레시피를 해석하면서 나는 알게모르게 그 철학에 설득당했기 떄문이다·
나는 말라디루트의 생김새를 묘사한 종이를 꺼내고 금지된 숲을 정처없이 헤집고 다녔다· 나침반이 있으니 무계획으로 다녀도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안개에 산란된 햇빛이 은은하게 내려오고 나무들의 간격도 너무 촘촘하지 않아 걷기 좋았다· 구경거리도 제법 많았다·
기척을 감지하면 잎을 오므리는 꽃 숨을 쉬는 것처럼 느리게 점멸하는 덩쿨· 밟으면 하얗게 빛이 나는 흙·
신비한 광경들에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그렇게 시선이 닿는곳으로 무작정 이동하던 중 우연히 사람의 흔적을 발견했다·
흙들이 자극을 받으면 빛을 내는 탓에 누군가의 발자국이 땅 위에서 선명하게 발광하고 있었다·
발자국은 나아가 숲 속 작은 오솔길로 이어져 있었다· 거기에 수상한 흔적 자체는 없었다·
사서나 마도학 연구원같은 미궁 쪽 관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는 허리춤의 목검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발자국을 따라갔다·
멀리 가지 않아 서른 걸음 쯤 떨어진 거리에서 사람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공터· 그리고 그 한켠에 세워진 비석 앞에 누군가가 내게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반묶음으로 등허리에 늘어진 긴 머리카락· 백금색 머리카락에 부분적으로 물들인 것처럼 갈색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익숙한 가면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사람을 잘못 본 것이 아닌가 눈을 의심했다·
귀가 뾰족하다· 그렇다면···이종족을 의미했다·
에르제베트 이후로 살면서 두 번째로 이종족을 보게 된 것이다·
그녀는 비석을 잠잠히 내려보다가 내 기척을 감지했는지 가면을 쓰고 내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시선이 서로 교차한다· 거기엔 아무런 적의가 담기지 않았기에 나는 천천히 경계를 풀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서 숲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비석 앞으로 다가갔다· 풍화가 진행되지 않아 표면이 매끈했다·
그 앞에는 그 여자가 놓고간 것으로 추정되는 새하얀 조화가 놓여 있었다·
나는 비석의 글귀를 확인했다·
[무명 기사단의 위대한 검사· 죽고 난 뒤에 케드웬이란 이름을 되찾다·]
의미심장한 문구· 더군다나 케드웬은 일전에 흑마법사가 언급한 루나와 같은 희생자의 이름이었다·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 케드웬의 친구였을까· 그게 아니면 또 다른 마스터스 클래스였을까·
***
어렵지 않게 말라디루트를 한송이 채집하고 나는 마도학 연구소로 발길을 돌렸다·
연구소 앞에는 가면을 쓰고 가죽 앞치마를 걸친 한 남성이 나를 마중나와 있었다· 그는 자신을 마수학 선임 연구원이라고 소개했다·
“엘라 교수님께 이야기 들었습니다· 도플러를 찾으신다고 말입니다· 어서 들어오시죠·”
“존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이는 내가 한참이나 어릴텐데 그는 나를 깍듯이 대우했다·
“마스터스 클래스는 이터니아에서 가장 소중한 자원입니다· 마땅한 대우이니 어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그는 연구소 로비를 지나 마수 전담실로 나를 안내했다· 복도 양 옆으로 감옥처럼 철창이 늘어졌고 그 안에서 각종 마수들이 사람을 보고 울부짖었다·
“어떤한 연유로 도플러를 찾으시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연금 레시피에 활용하려고 합니다·”
“흠···· 도플러가 어떤 생물인지는 알고 계시는지요·”
“이터니아에 도플러가 침입한 경우가 있다는 것 말고는···잘 모릅니다·”
나는 그게 무슨 종이고 어떻게 생겼는지 하나도 모른다·
일전에 실베린은 미궁이 도플러에 의해 초토화된 적이 있다고 했었다· 어쨌든 위험한 종인 건 확실해 보이는데·
“아아 그런 일이 있긴 했죠· 하지만 도플러는 원래 그렇게 위험한 마수가 아닙니다·”
이터니아를 초토화 시켰는데 위험하지 않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연구원은 말을 이어갔다·
“도플러는 도플갱어에서 따온 겁니다· 한번 본 대상의 외형을 완벽하게 본따는 특성 때문입니다· 도플러의 원형 그 자체는 개나 고양이 정도의 지능이고 야생에서 있을 땐 변신 능력을 포식자의 천적으로 변해 위기를 회피할 때나 쓰입니다·”
“그럼 그게 어떻게 이터니아를 초토화시킨 거죠?”
“그게 인간사회에 있을 땐 문제가 생깁니다· 인간의 모습을 본따서 한 번 본 말과 행동을 그대로 카피하거든요· 도플러가 말하는 걸 들어보면 겉으로는 그럴듯 한데 내용을 따져보면 문맥이란 게 존재하질 않습니다· 생각까지 카피하지 못하고 그냥 무작정 따라하는 것 뿐이죠· 그래서 잡아내기 쉽죠· 다만 패턴 인지 능력이 인간보다 낮더라도 외형을 본따고 행동가지를 따라하는 과정이 수천 수만회 반복되면 도플러들도 점점 패턴을 학습하게 됩니다· 인간과의 기본적인 상호작용이 가능해지죠·”
“····”
“그 다음 단계엔 도플러는 인간 사회에 서서히 녹아듭니다· 그 이후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도플러가 발각되지 않고 인간사회에 녹아든지 30년에서 50년 가량 경과된 이후에 말입니다·”
“흥미로운 생물이군요· 주로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 겁니까?”
“도플러들은 관계성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훌륭합니다· 관계성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포식자에게 잡아먹힌다는 압력 아래에서 진화한 덕일 겁니다· 중요한 건 그게 인간 사회에서도 적극 발휘된다는 겁니다·”
“···?”
“도플러가 누군가를 만나면 그와 관계성이 짙은 인물로 변신합니다· 그리고 상대를 유혹해서 자신의 분비물에 입을 대게 합니다· 그런 뒤엔 결국엔 잡아먹죠·”
설명을 들으니···도플러는 이터니아의 취약점을 파고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취약점을 파고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터니아에 침입한 도플러는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습니까?”
“카피가 가능한 인간의 수가 많을수록 위험도가 높게 측정됩니다· 그 도플러는 대략 팔천 명을 카피할 줄 알았습니다· 만났던 이들의 대화 방식 습관같은 것들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사회 정세에 관한 가벼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지성을 지니고 있었죠·”
“타고난 패턴 인지 능력이 인간보다 좋지 않기에 성장 속도가 더디지만 도플러는 성장 한계선이 없는 게 문제입니다· 인지 능력도 일정 선을 넘으면 상승폭이 가파르고요· 마법학회에선 제국의 수도 같은 대도시에도 도플러가 산재하고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죠· 막대한 횟수의 상호작용으로 그곳의 도플러는 인간과는 구분할 수 없을 수준으로 진화했을지도 모릅니다·”
성장한계선이 없다는 말이 제법 섬뜩하게 다가온다·
“검술이나 마법에는 어떻습니까?”
“인간 사회에 녹아든 도플러는 정말 탁월합니다· 마법은 불확실했지만 최근에는 하급 마법을 다루는 도플러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고등급의 지적 진화가 가능하다는 게 입증된 사례죠· ”
“····”
“마법 학회의 몇몇 학자들은 인간 사회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도플러가 자리잡고 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음모론 정도로 취급되지만 나름의 근거는 있는 이야기입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군요· 이터니아에서 보관하는 도플러는 괜찮습니까?”
“저희가 데리고 있는 도플러는 굉장히 안전합니다· 애초 연구 목적으로 포획한 것이라 카피한 인간이 두 명에 불과합니다· 저희는 이천 명까지는 안전한 선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의 도플러는 생물이라기보단 신비한 마도구나 장난감에 가깝죠·”
“도플러가 이계종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혹시 그거에 관한 근거라도 있습니까?”
“죽음의 땅에 대해서는 얼마나 들으셨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곳이 이계종의 근원지입니다· 도플러들은 죽음의 땅에 가길 극도로 두려워하는데 그곳에 가면 태초의 모습으로 분해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사념체 덩어리로 말이죠· 학계는 도플러를 차원계에 떠도는 사념체가 모종의 힘을 받고 물질계에 현현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거기에 어떤 힘이 작용했는지는 아직 연구중에 있습니다·”
복도의 끝에 다다르니 강철로 이루어진 사각의 케이지가 앞을 가로막았다· 거기엔 두터운 문이 하나 달려있을 뿐 내부는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조그만 구멍하나 뚫어놓지 않았다·
“이 안에 도플러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어떻게 생겼는지 굉장히 궁금하네요·”
“아쉽게도 데미안님은 도플러를 확인하실 수 없습니다·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입니다·”
“····”
“혹시 모를 위험을 줄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입니다· 로비에서 기다려주십쇼· 도플러의 체액은 제가 책임지고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
연구원은 데미안을 로비로 보낸 뒤 장비를 챙겼다· 하나는 유리병 다른 하나는 ‘죽음의 땅’에서 가져온 돌칼이었다·
연구원은 특수 케이지의 자물쇠를 풀고 내부로 들어갔다·
그 내부는 새하얀 철창으로 또 절반이 나뉘어 있었는데 그 철창 안에서 팔다리에 쇠사슬이 연결된 도플러가 쪼그려 앉은 모습으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그는 소리가 새나가지 않게 문을 굳게 닫았다·
도플러는 가면을 보면은 인지 오류가 일어나 기억에 있는 인물을 무작위로 끄집어내서 말을 쏟는다·
하지만 이 도플러가 모든 형태를 온전히 기억하는 사람은 단 한명이기에·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끄집어냈다·
“···우리 언제쯤 볼 수 있을까?”
도플러를 가로막은 철창 맞은편에 한 소년의 초상화가 놓여 있다· 연구원은 그 그림에 검은 천막을 씌웠다·
“같이 바다 보기로 한 거 기억나? 우리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같이 살기로 약속했었잖아·”
도플러의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변했다·
데미안에게 도플러의 위험성을 일부러 부각하고 그가 도플러의 능력을 교란하는 가면을 썼음에도 이곳에 들이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미술부에 들어갔어· 내가 뭘 그리는지 알면···너도 분명 좋아할거야·”
이 케이지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한 소녀를 위해 제작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소녀의 인형놀이를 위해·
그렇게나마 불안하고 괴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소녀로 변한 도플러가 돌연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지켜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연구원은 빠르게 끝내기 위해 칼을 뽑고 철창 문을 열었다·
리자 파스칼의 그림자는 그렇게 눈물을 쏟아내며 읊조렸다·
“데미안···데미안 보고싶어···너무 보고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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