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4
로비에서 삼십 분쯤 기다리고 나서야 연구원이 나왔다·
그는 내게 검은 점액질이 담긴 유리병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연금술 연구 목적이라 하셨는데 부디 복용 목적으로 포션에 첨가한다거나 하시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먹어선 안 된다고 여러 번 강조하는 걸 보면 제법 독성이 강한 모양이다· 빛깔부터가 마시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액체다·
“그 점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모쪼록 계획하신 일에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재료는 이제 다 모였다· 이제 도플러의 피를 말라디루트에 흡수시키고 하루 이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부디 제대로 된 효과가 나타나길·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잠깐 지하에 내려가 봐도 될까요?”
“루나 양 때문입니까? 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적어서 이야기는 나누지 못 할 겁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연구원의 허락을 받고 루나가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철창 사이로 보이는 루나의 모습은 전에 봤던 그대로였다· 창백한 얼굴· 숨은 잘 쉬고 있는 건지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다· 그녀를 보면 착잡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흑마법사가 던져둔 고통의 씨앗은 아직도 온전히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빛의 검이 왜 내게 떨어졌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분명 아무 이유 없이 내게 주어진 것을 아닐 거다· 거기엔 용도가 있고 목적이 있다·
고서와 성서 백과사전 그 어디에도 내 검의 존재 이유를 제대로 명시해 놓은 건 없지만 나는 조금씩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검으로 베어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그건 논리와 이성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건 영적인 울림에 가까웠다·
루나의 일에 내가 매달리는 이유도 내가 베어내야 할 대상이 아직 남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허리춤에서 가죽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 있던 말라디루트를 꺼내 도플러의 체액이 담긴 병 안에다 뿌리를 담갔다·
즈베레프의 레시피가 통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어떻게 되든 나는 결국 방법을 찾아내서 사서들을 몰살시키고 나와 루나의 뱃가죽을 꿰뚫은 그것들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다·
***
트리샤는 약속한 시각보다 일찍 정문에 와서 마차에 들어갔다· 정문에 세워진 마차 의자에 엎드려서 고개만 살짝 들고 데미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멀찍이서 그의 모습이 보이자 트리샤는 대본을 들어서 얼굴을 가리고 안 기다린 척 딴청을 피웠다·
데미안은 다소 기분이 침체된 기색을 보이며 마차 안에 들어섰다· 그러고는 말없이 문을 닫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트리샤는 의자에 누워서 각본을 들고 대사들을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데미안의 얼굴을 한번씩 힐끔거렸다·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것이 아침과 똑같았다·
저녁 인사도 없고 아무런 잡담도 걸지 않는다·
트리샤는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리다 끝내 참지 못하고 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바보데미안·”
그가 슬쩍 트리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잠잠히 있다가 말했다·
“···지금 나 부른 거야?”
트리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니 그냥 혼잣말한 거야·”
“···왜?”
“몰라···근데 세실 언니랑은 만났어?”
“응·”
“무슨 이야기 했는데?”
“별 이야기 안 하고 헤어졌어·”
별일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기분이 침체되어 보이던 이유가 세실과 잘 안 풀려서 그랬던 걸까·
트리샤는 얼굴에 웃음기를 감추지 못하고 답했다·
“세실 언니랑 잘 안 됐구나· 그치·”
“····”
“거봐 상대 잘 안 해주지? 세실 언니 안 친한 사람한테는 엄청 까칠하다니까?”
데미안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트리샤는 어른행세를 하며 그를 놀렸다·
“아구 가여운 우리 데미안 친구 사귀기가 쉽지는 않지!”
“···왜 그렇게 신났어?”
“나 하나도 안 신났는데?”
트리샤는 다시 대본에 눈을 돌리고 신나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이 다시 데미안을 불렀다·
“맞다 너 그거 알아?”
“뭐?”
“내일 모레가 합동 수업 첫날인 거? 준비 좀 했어?”
“···아니 이제 알았어·”
“으이구 나 같은 친구 아니었으면 이런 거 누가 알려줬겠어· 그치!”
“그래 고맙다·”
트리샤는 얼굴을 가린 대본을 슬쩍 내리고 데미안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누구랑 같은 그룹으로 할 건지 정해놓은 건 있어?”
“···너는 어떤데?”
“나는 세실 언니랑 연금술사 베르탕· 정령사 마르타 언니랑 나· 이렇게 넷이 그룹하기로 했어· 그래서 너는?”
“없어· 그냥 남는 사람끼리 해야지·”
누구랑 되든 조금도 신경 안 쓴다는 뉘앙스였다· 트리샤가 눈을 좁히고 불안감을 조성하는 말투로 대답했다·
“에이 너 입학시험 일 등 했다고 너무 방심하는 거 아니야? 전투부 몇몇 애들이 수석 자리 차지하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수련하고 있다는데!”
그리고 트리샤가 전투부 학생에 언급한 것은 전부 사실이었다· 빅터 게일 같은 쟁쟁한 경쟁자들이 필사적으로 칼을 갈고 그룹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시온은 너무 당연한 말이고·
“····”
데미안이 트리샤의 얼굴을 내려다보자 그녀는 대본을 들어서 얼굴을 가렸다·
“흠흠! 아무튼 이번 거는 정말 팀플레이가 중요하대· 너도 잘 맞는 팀원을 구해놔야 다음이랑 다다음 그룹 실습 때 쭉 편해지지 않겠어?”
“···조만간 구해야지·”
데미안은 머리카락을 뒤로 한 번 쓸어내고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에 매달리고 있는 건지 합동 수업을 코앞에 두고서도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인상이었다·
트리샤는 다시 슬쩍 대본을 내리고 데미안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말인데···· 너···우리 그룹으로 올 생각은 없어?”
“너네는 이미 네 명 다 찼다며?”
“세실 언니가 조장이 될 게 분명하니까···한 번 물어보려고· 베르탕을 빼고 너를 넣는 건 어떠냐구···· 우리 조는 칼 쓰는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
“베르탕이라는 애랑은 사이가 안 좋아?”
“아니! 근데 같이 다니기 엄청 불편해· 세실 언니도 껄끄러운 관계인 거 알고 일부러 나랑 격리해주고 있어· 아무튼···올 거야? 나까지 있으니까 편할 거 아니야·”
데미안은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지근한 표정을 지었다·
***
베르탕은 같은 그룹원인 마르타와 세실을 테이블 맞은편에 앉혔다· 세실은 피로에 절었는지 의자 등받이에 몸을 늘어트렸다·
“내가 너희를 다 불러 모은 이유가 있어· 이번 거는 중요한 정보야· 이번 합동 수업은 사실 정령술보다 연금술이 더 중요해·”
세실이 물었다·
“왜?”
“그 수업을 담당하는 교수가 전부 연금부 교수거든· 그리고 그룹에서 조장은 반드시 연금부 학생으로 해야 한다네· 엄밀히 말해서 이번 그룹 편성은 연금부 학생들을 중심으로 다른 부 학생을 붙여주는 방식이야· 그룹의 계획이나 활동 방향성은 전부 연금부 조장이 맡아서 하는 거지·”
그의 말을 들은 세실과 마르타는 떨떠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실은 미덥지 않은 사람을 리더로 삼아야 한다는 게 영 안 내켰다·
세실이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말했다·
“난 이 수업 마음에 안 들어· 이런 제한을 거는 게 어딨어?”
마르타도 한마디 거들었다·
“연금술사가 굳이 필요해? 없이 해도 되잖아·”
“야야 못 미더운 건 알겠는데 나도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최선을 다할 거야· 그리고 그룹 편성에 한가지 변수가 있어·”
“뭔데?”
“그룹원을 교체할 때마다 그룹장하고 해당 그룹원은 점수가 깎인다는 거야·”
세실이 반문했다·
“···그럼 우리랑 해당 사항이 없는 거 아니야? 우리는 굳이 바꿀 일이 없잖아·”
베르탕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최초의 그룹 편성은 전원 제비뽑기로 정해서 감점은 피할 수가 없어·”
***
루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신체 감각이 이전과는 묘하게 달랐다· 지금처럼 피로감 없이 개운하게 잠에서 깨어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기분도 좋았다· 왜인지는 그녀도 몰랐다· 자는 사이에 새로운 포션을 투여받기라도 한 걸까·
행복하고 평안한 꿈을 꾸고 눈을 뜨면서 그 꿈의 기억은 증발한 건지도 모른다· 실체는 사라지고 뭔지 모를 감정적 여운만이 남은 듯한 기분이었다·
머리맡에는 그녀의 친구들이 보낸 편지들이 놓여 있었다· 루나의 가족 일부만이 그녀가 처한 상황을 알고 친구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친구라 해봐야 고작 세명 뿐이지만· 그들은 루나의 모습을 이해해주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친구들은 루나가 이터니아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루나가 이터니아에서 수석을 했다는 말을 듣고 기뻐했고 이터니아에서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싶어했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수업을 듣고 어떤 멋진 일들이 일어나고 이터니아에서의 생활은 얼마나 즐거운지·
저주로 몸이 망가지고 수업은 커녕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철창 안에서 팔다리에 쇠사슬이 엮인 채로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녀는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양피지를 꺼냈다· 그리고 차분히 친구들에게 보낼 답장을 적었다·
그렇게 루나가 써내려간 건 꿈 이야기였다·
그녀가 오랫동안 꿈꾸고 있던 것들을 실제 이야기처럼 적어내렸다·
이터니아의 아름다운 풍경은 매일 봐도 새롭고· 그래서 이따금 학생 광장과 그레이스 산에 산책을 나간다고·
괴짜 마도학부 학생이 이상한 실험들을 해서 웃기고 황당한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고·
너희들만큼은 아니지만 밝고 힘이 넘치는 동기들을 만나 힘차게 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리 잘생긴 것도 능력이 잘난 것도 아니지만 자신과 같이 상처가 많은 사람과 교류하면서 이성에게 마음을 여는 법을 조금씩 배워나가는 중이라고 적었다·
그래서 지금 너무 행복하다고·
우습게도 몸과 영혼은 이미 진창이라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아 하루하루 두려움에 떨며 잠에 든다고는 적지 않았다·
마침표를 찍고 루나는 잠시 무릎을 감싸고 얼굴을 묻었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몸이 부르르 떨렸다·
깨어있는 시간의 일부는 이렇게 괴로움을 지워내려 애쓰다 흘러갔다·
그러던 중 루나는 문득 어딘가에서 희미한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는걸 느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철창 밖에 못 보던 것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누군가가 그녀가 있던 곳에 다녀간 것일까·
유리병· 그리고 그 안에 뿌리를 뻗은 한 식물이 보였다·
물조차 담기지 않은 빈 병에 뿌리를 붙이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병의 입구 위로 희미하게 마력이 흘러나오는 꽃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검붉은 색의 기이하고 아름다운 꽃·
이제 막 봉오리를 피운 것처럼 싱그럽고 생명력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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