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9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의실로 학생들이 속속들이 모여든다· 흑마법사의 침공으로 미뤄졌던 합동 수업이 드디어 본격적으로 시작을 앞두고 있었다·
1학년 전부가 이렇게 한 자리에 다시 모이는 건 입학시험 이후로 두 번째다· 그때는 입학 지원자들까지 포함되어 분위기가 어수선했지만 지금은 어느정도 적당한 긴장감이 잡혀 있었다·
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미리 결성한 그룹원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강의실로 누군가 들어올 때마다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며 바쁘게 논의를 나눴다·
시온의 얼굴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일찍이 맨 뒤 쪽 구석에서 턱을 괴고 관망하고 있었다·
입학시험 당시 나와 한판 붙자고 했던 걸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부디 바쁜 아카데미 생활에 치여 깜빡 잊었기를 바란다· 난 싸울 생각 전혀 없으니까·
내 주변 몇몇 학생들이 혼자 앉아 있는 시온을 보며 어떻게 같은 그룹으로 데려올 수 있을까 소곤거렸다·
역시나 제일 많은 관심을 받는 건 학부별 수석과 차석을 차지한 학생들이었다·
아쉽게도 이곳에 마법부 수석 루나는 없다· 그녀가 이 수업에 참여했으면 하는 바람이 컸지만 아직 후유증이 큰 모양인지 소식이 없다·
강의실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학생들이 들어온다· 내가 아는 얼굴이 몇몇 섞여 있다·
여자 셋에 남자 하나· 트리샤까지 포함한 세실 그룹이었다· 그들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앞쪽 책상에 자리 잡았다·
그들 또한 다른 학생들과 다를 거 없이 자기들끼리 한동안 떠들어댔다· 그러다 트리샤가 돌연 몸을 뒤로 돌려 강의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크게 소리쳤다·
“데미안!”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는 크게 손을 흔든다· 이 많은 사람 틈바구니에 숨어있던 나를 어떻게 찾아낸 건지 눈썰미도 참 좋다·
세실을 비롯한 그룹원들이 일제히 몸을 돌리고 나를 올려다본다·
자기들끼리 뭐라 중얼거렸는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들을 수는 없었다·
트리샤의 목소리가 주의를 집중시켰는지 다른 학생들 수십명이 슬쩍 내 얼굴을 바라본다·
나는 수첩을 꺼내 읽는 척 하며 얼굴을 가렸다·
***
세실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쟤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들은 쉽게 데미안을 알아보았다· 외형적으로 특징이 뚜렷했던 덕에 부연 설명이 필요 없었다·
“응!”
“연극부라서 친해진 거야?”
“아니! 쟤는 미술부에 들어갔어·”
“신기하네· 서로 교집합이 하나도 없는데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친해졌어?”
“말도 마 언니· 쟤가 먼저 나랑 친해지자고 끈질기게 접근했다니깐·”
세실은 트리샤의 말을 온전히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그래· 엄청 따라다녔겠구나·”
그녀는 귀엽다는 듯이 픽 웃어넘기고는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베르탕이 중간에 끼어서 딴지를 걸었다·
“친해진 거 맞아? 얼굴도 가리고 인사도 안 하는데·”
트리샤가 눈살을 살짝 구기며 말했다·
“쟤 관심받는 거 싫어해서 그래요·”
베르탕의 친해지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트리샤는 동기인 그에게 꼬박꼬박 존대했다·
그는 심지어 데미안이보다 먼저 알고 지낸 사이였다· 데미안이란 녀석은 트리샤가 먼저 인사를 건넬 정도인데 베르탕은 아직 말조차 편히 나누는 단계조차 안 됐다·
베르탕은 정색하는 트리샤를 보며 자신이 뭘 놓친건지 고뇌했다·
그러던 중 수업 시간에 딱 맞춰 어느 노교수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교수의 등장에 어수선하던 강의실이 단번에 정숙해졌다·
흰머리에 수염이 나 있고 얼굴엔 인자한 느낌의 주름이 파여 곧 은퇴를 앞둘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꼿꼿하게 핀 허리와 힘있는 걸음걸이 덕에 노쇠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는 단상 앞에 서서 학생들을 쓱 둘러보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자 빈자리가 보이긴 하지만 빠진 사람은 없으리라고 믿는다· 첫 수업부터 지각하는 멍청이는 없겠지· 다들 이터니아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을 거다· 나도 그렇다· 북부에서 복귀한 지 아직 채 하루도 안 지났으니·”
나이와는 다르게 발성에 힘이 실려 있었다· 그 덕에 맨 뒷자리에 앉은 학생에게도 단어 하나하나가 귀에 박혔다·
“소개부터 하지· 나는 마법부 교수 라캄이다· 세부적으론 결계술과 방어 마법을 다루지·”
그러고는 학생들의 표정을 살핀 뒤 씩 웃었다· 그는 뒷짐을 지고 산책하듯 옆으로 걸으며 말을 이었다·
“표정을 보니 당황한 친구들이 조금 있구만· 무슨 생각인지 안다· 연금술 수업이라 그랬는데 갑자기 마법학 교수라니 정보가 잘못된 건가? 아니 정확히 알아본 게 맞다· 이건 연금술에 관한 수업이다· 마법하고는 별 상관이 없지·”
“대관절 뭘 하려길래 연금술 하나를 위해 전 학부 1학년을 불러다 모은 걸까 싶겠지· 빌어먹을 연금술이 대체 전투술이랑 마법이랑 마도학이랑 무슨 상관일까· 자네들 머릿속엔 연금술이란 학문이 어떤 이미지로 각인된 건지 잘 안다· 귀부인들을 꼬드겨 ‘회춘의 약’을 팔아 넘기는 돌팔이들이 연금술의 위상을 크게 높여놓은 덕이겠지·”
몇몇 학생들이 웃음소리를 냈다· ‘젊어지는 약’은 대륙 어디를 가도 있었다· 이는 돌팔이 연금술사들의 대표적인 사기 품목 중 하나였다·
“자네들에게 몇 가지 물어보지· 이 중에 대륙의 10대 소드마스터 이름을 전부 아는 학생이 있나? 있으면 거수해보게나·”
절반이 넘는 인원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 다음으로 4대 대마법사에 대해서는 아는 학생은?”
이번에는 대부분의 학생이 거수했다·
“그럼 3대 대마도학자는?”
이전과 비슷한 수가 손을 들었다·
“전기 좀 열심히 읽었나 보네· 그럼 물어보지· 연금술 마스터 단계에 이른 현자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 있는가?”
손을 든 학생은 고작 세 명뿐이었다·
“이것 보게· 자네들은 연금술에 관심이 없어· 연금술에 필요한 게 있으면 누가 만든 걸 돈을 주고 사면 된다고 여길 뿐· 연금술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아무것도 모르지· 직접 연금술의 원리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은 시간 낭비라 여기고· 심지어 연금부 학생들조차 말이야·”
강의실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이 가라앉았다·
“연금술은 포션 제조학이 아니야· 그건 인간과 자연과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계의 순환 원리를 이해하고 통합하는 학문이다· 마법학 마도학과 결은 다르지만 결국 추구하는 건 같지·”
교수가 신호를 주자 문 쪽에 서 있던 조교 둘이 사람 키만 한 두루마리를 들고 교단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이를 벽에 높이 걸고 매듭을 잘라 두루마리를 풀어냈다·
그것은 이터니아를 포함한 그레이스 산맥의 지도였다·
“연금술의 시작과 끝이 뭐라고 생각하나· 대부분은 책 속에 있다고 생각하겠지· 진리는 양피지 속에 있는 게 아니라네· 진리는 길에서 보이는 민들레에도 있고 산들바람에도 있고 심지어 소똥에도 있지· 현자들은 본래 연금술사가 아니라 여행자였다네· 그들은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진리를 터득했어·”
라캄은 마침내 이 수업의 본 목적을 드러냈다·
“자네들은 연금술이 무엇인지 깨우칠 필요가 있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말이야· 그래서 자네들은 연금술의 기본을 익히기 위해 일주일 동안 순례를 떠날 거다·”
강의실이 웅성거렸다·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교수가 허락하자 한 남학생이 질문을 던졌다·
“순례라 하면 그냥 여행을 다녀오면 된다는 겁니까?”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지· 식량과 포션을 비롯한 여타 물품들을 자유롭게 챙겨도 된다·”
그리고는 지시봉으로 뒤쪽에 펼쳐진 지도에서 한 부분을 툭툭 쳤다·
“그레이스 산맥을 가로지르는 이터니아 강을 따라 하류로 쭉 내려가면 소더튼이라는 원시림 지대가 있다· 강물에 쓸려온 그레이스 산의 마력과 비옥한 흙이 수만 년간 퇴적된 데다 정령들이 오랜 기간 점령한 덕에 다른 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순환계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지· 바로 소더튼 원시림이 자네들이 가야 할 목적지다· 자 다른 질문 있나?”
스무 명가량의 학생이 동시에 손을 번쩍 들었다· 교수가 손으로 지목하며 질문을 받아냈다·
“그냥 그곳에 다녀오기만 하면 목적은 완수하는 겁니까? 점수 책정 기준은 무엇입니까·”
“소더튼의 중심부까지 다녀오면 된다네· 그곳에서 잘 적응하면 돼· 우리에겐 적응도를 측정하는 방법이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소더튼에 발을 디디기만 해도 아주 좋은 점수를 받을 거야· 근데 거긴 생각보다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야· 내 장담하지· 자네들 중 절반은 진입했다가 다시 뱉어질 걸세· 목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해주자면 이번 수업의 목적은 ‘순환계로의 편입’이야·”
데미안은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즈베레프 또한 연금술사이자 여행자였고 그의 레시피는 순환계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고 순환계의 존재를 배제하는 주류 연금술 학파를 강도 높게 비판했었다·
다른 학생이 질문을 이었다·
“최고의 성과를 내는 학생에게 보상이 주어진다고 들었습니다· 그 보상에 대해서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아아 그래 그거에 관해서 말해주지· 자네들 중에는 소더튼에 순례길을 떠나고 돌아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을 거야· 최고의 자리에 서고 싶은 이들 말이지·”
수석 자리를 노리는 학생들을 겨냥한 말이었다·
“소더튼 지역 중심부엔 독특한 마력의 장이 펼쳐져 있다네· 그곳에는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신비한 광석과 약초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환수가 살고 있지· 그 환수는 소더튼의 순환계를 지배하고 있어· 말하자면 토착신에 가깝지·”
교수는 안주머니에서 강철로 된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서 손가락만 한 유리병을 꺼내 학생들 앞에 내보였다·
“원래는 비밀스럽게 전달하는 게 맞다만 소문이 돌대로 돌았으니 보상을 공개하도록 하겠네· 그 위대한 환수의 뿔을 가져온다면 이번 수업 최고 평점을 주는 동시에 연금술 연구에 지대한 기여를 한 보상으로 이 포션을 수여할 거야·”
뒤쪽에서 앉아서 가만히 교수의 말을 듣던 데미안은 학생들 사이에 동요가 이는 것을 보고는 기이하게 여겼다·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가 그 포션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 한 병을 제작하는 데만 무려 십년이 넘게 걸린다네· 그마저도 레시피를 한 명이 독점하고 있어서 천운이 따라야지만 구할 수 있지· 이거야말로 연금술의 정수가 담긴 포션이야· 포션 하나로 인간의 영혼을 지배할 수 있으니까· 물론 완전하지는 않지만·”
수백 명이 모인 강의실이 숨소리조차 안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
“1등에게는 바로 이 ‘사랑의 비약’을 수여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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