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무영보의 환(環)
정오를 막 지난 시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천화서고 호위대 전체가 대주의 호출을 받았다·
한적하게 차를 마시고 있던 후공도 송화의 보고를 통해 그 상황을 인지했다·
“공자님 잠시 호위대 소집이 있어서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내게 그런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다·”
“전 공자님의 그림자인걸요·”
“크흠·”
총 32명의 호위가 일사불란하게 소 연무장으로 모여들었다· 거의 9할이 검수였고 나머지는 권장법을 다루는 이들이었다·
정렬한 호위대 앞 작은 연단에 호위대주 천규인이 섰다·
호위대의 노고를 치하한 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너희를 부른 것은 최근 밖에서 벌어진 한 사건 때문이다· 어떤 사건인지는 잘 알리라 믿는다· 그렇다· 바로 대공자께서 외출하셨을 때 벌어진 소란에 관한 것이다· 그 일로 너희들에게 두 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첫째 호위대의 과한 대처다· 이는 지적받아 마땅하다·”
호위대주의 시선이 잠시 송화 쪽을 스쳤다가 돌아왔다·
“최근 대공자께서 과거를 떨쳐내고 달라진 것을 모두 알고 있을 터· 대공자는 본 서고를 이을 후계· 천화서고를 대표하는 분이다· 외부의 명망 있는 이들과도 교류하실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에 호위대는 보호의 임무뿐 아니라 위신이 떨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것이다·”
호위대주가 구체적인 품위와 예법 등에 대해 말을 이어갔다·
“···두 번째는 이번에 시비가 발생한 상대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광휘문에 속한 이들이다· 문파의 이름이 광휘라 하여 그들이 광휘를 내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호위대 몇이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은 최근 세를 불리고 있는바 이번에 당한 수모를 갚고자 본 서고를 벼르고 있다는 정보다· 가주님을 비롯한 세 분 공자님 본 서고의 학사들 아니 천화서고 그 누구라도 털끝 하나 다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그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다· 세부적으로는····”
호위대주가 말을 멈췄다·
그의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온 부대주 온소가 귓속말을 전한 탓이었다·
천규인이 놀라 갸웃했다·
“대공자가 나를 찾는다고?”
“네·”
“지금 바로 말이냐?”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라고 하시더냐?”
“듣지 못했습니다·”
이어 천규인은 대공자의 부름이 있음을 호위대에 전했다·
못 다한 말은 부대주에게 맡기고 서둘러 대공자의 처소로 향했다·
**
“대공자님 호위대주입니다·”
마침 좌정 중이던 후공이 눈을 떴다·
‘호위대주?’
분명 호위대 전체 소집이 있다고 했거늘· 송화는 그럼 어딜 간 거지? 내게 거짓말을 했을 리 없는데?
안광을 가다듬고 잠시 후 답했다·
“무슨 일입니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공손한 목소리였다·
‘송화가 거짓말을 한다? 그럴 리가·’
여태 지켜본 송화는 돌려 말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생각 없이 진심을 다 말해버리는 것이 도리어 문제다 싶을 정도·
‘호위대주라·’
범항의 기억 속에 남겨진 호위대주는 흐릿한 인물이었다·
그저 이름과 얼굴을 알 뿐이고 대주라는 직위를 고려해 존대했다 정도여서 아예 관심 밖의 인물·
뭐 만나보면 알겠지·
“들어오십시오·”
자리를 권하고 탁자를 사이에 두고 천규인과 마주 앉았다· 후공은 바로 의문점을 물었다·
“방금 전 송화에게 호위대가 소집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맞습니다· 하지만 워낙 중요한 사안인지라 머뭇거릴 수 없었습니다·”
“그 사이에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천규인이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덧붙였다·
“저는 대공자님을 적극적으로 돕고자 합니다·”
목소리가 은근했다·
후공이 빙긋 웃었다·
‘날 돕는다고? 웃기는 놈이로군·’
수염이 덥수룩한 사십 대 중년 남자가 은근해 봐야 구역질이 돋고 의구심만 깊어질 뿐이다· 도움 따윈 구한 적도 없거늘· 굳이 돕겠다면 각자 제 할 일을 얌전히 하고 있으면 그것이 최상이었다·
“들어보죠·”
천규인이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
비수였다·
날카로운 칼날이 번쩍거렸다·
“대공자께선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죽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런 미친·’
“허허····”
후공은 어이가 없어 너털거리고 말았다·
호위대주도 히죽 웃었다·
“대공자께선 어째 칼을 보니 반갑습니까? 이제 죽을 수 있어서 기쁜 겁니까?”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아닙니다· 지금이 적기입니다· 굳이 여기에서 더 늦출 필요 없습니다· 밖을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날이 화창한 것이 이보다 더 죽기에 좋은 날을 찾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렇게 된 건가· 후공은 상황을 명백히 이해했다·
호위대를 소집한 이유는 단둘만의 자리를 만들어 자결시키려 함이다· 대체 언제 시작되고 어디까지 연루된 것일까· 역시 총관일지도·
“흐음····”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눈이 반쯤 떠질 때 눈 흰자위까지 전체가 검은색으로 물들었지만 눈을 다 떴을 때는 흰자위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삼대 호신기 중 하나인 전혈의 시전·
그것은 너무도 찰나였다·
“그러니까 대주는 아직까지 제가 죽기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하하 물론입니다·”
“하하 제가 그럴 마음이 없다면요?”
“사내의 다짐이 변해서야 되겠습니까·”
“대주 난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그런가요?”
“물론입니다·”
둘 다 웃고 있었지만 웃음 아래 서늘함이 오갔다·
“그렇다면·”
파팟·
천규인의 손이 후공의 가슴팍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거궐혈과 기문혈 두 곳을 점혈했는데 이는 마혈이었다·
이 두 곳이 점혈되면 전신이 마비되어 손가락조차 까닥할 수 없게 된다·
점혈법은 무림 각파마다 방식이 다르나 혈도의 조합에 대한 것이며 점혈자의 내력 고하에 따라 마비나 여러 효용을 발휘하고 유지 시간도 달라진다·
“대공자께선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제가 친절합니다· 제 손으로 자결시켜드리겠습니다·”
“허허허허····”
“왜 웃습니까?”
“웃기지 당연히·”
“대공자 말이 짧아지셨습니다· 후후····”
“죽고자 할 때는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살고자 하니 죽음이 이렇게 쉽게 다가오니 웃음이 날 수밖에· 범항 녀석도 참 운이 없지·”
천규인이 갸웃하다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어찌 자기 자신을 남처럼 말씀하십니다그려· 어쨌든 사람이 변하면 곤란합니다· 그럼 못써요· 어차피 죽는 것이 소원이었잖습니까· 자 떠올려 보십시오· 못 죽어서 안달하던 때를 생생히 떠올려 보세요· 말씀드렸다시피 지금이 죽기에는 최적의 시기입니다· 지금보다 좋을 수가 없지요· 모두가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체력단련에 외출 명문가 자제들과도 교류했습니다· 이제 누구도 대공자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아 이런 육각망을 잊을 뻔했군요· 그런데 이렇게까지 하고 자결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파멸입니다· 가주도 죽고 심약하기가 초식동물 같은 대공자의 숙부도 죽고 이공자 삼공자도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겁니다· 술독에 빠지고 골방에 틀어박혀 폐인이 되겠지요· 그렇게 다 끝내버릴 수 있습니다·”
‘자결한 모양새가 되어야 한다는 거군·’
후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 혼자는 아닐 테고 누가 연루되어 있지?”
순간 천규인의 눈빛이 악독해졌다·
“이 새끼 구질구질하게 굴래? 너저분하게 왜 그래·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들어야지· 머리 좋으니까 들어도 달라질 거 없다는 것 정도는 알 거 아니냐·”
“눈을 무섭게 뜨네·”
“···?”
천규인이 흠칫 몸을 떨었다·
후공이 나직한 목소리를 냈다·
“생각이 바뀌었다·”
“···??”
천규인은 이제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천히·
대공자의 손이 올라와 팔짱을 낀 것이다·
“어 어떻게··· 어떻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천규인으로서는 눈앞의 상황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지금 보고 있기는 한 건지 자신의 눈이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꿀꺽·
분명 혈도를 정확히 점혈했다· 마혈을 점했으니 몸이 움직여지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후후····’
놀라는 호위대주를 향해 후공은 팔짱 낀 한 손을 들어 턱을 쓰다듬었다· 점혈은 애초에 당한 적이 없었다· 이미 후공은 자신의 삼대 호신기 중 하나인 전혈을 펼쳐 혈도의 위치를 옮긴 터·
육각망을 복용하기 전까지만 해도 전혈에 예비 시간이 필요했지만 복용 후로는 찰나면 충분해졌다· 눈이 검게 물드는 전조는 감았다 뜨는 것만으로 끝이었다·
후공이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누군가와 실전을 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와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대공자 놀랍구려· 묘한 한 수를 지니고 있었어· 하지만!”
순간 천규인이 탁자 위 비수를 집어 들었다· 그대로 후공의 목을 그어갔다·
후공이 무릎을 차올렸다·
탁자가 위로 튕겨 올라 천규인을 가로막았다·
천규인이 소맷자락을 휘둘러 탁자를 옆으로 치울 때는 후공도 어느덧 일어나 뒷짐을 지고 있었다·
천규인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 기민함은 대체 뭐지?’
아니 그보다 여유롭다·
천규인의 눈에 의문이 짙어졌다·
후공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물건 부수지 마라·”
“이놈이!”
순간 천규인이 좌수로 어깨를 잡으려 내뻗었다·
구부러진 손가락 형태가 호랑이인가? 용인가?
아니 고양이 같다·
벽력수라는 말은 천규인의 손속이 그만큼 빠르기 때문에 붙은 것이었지만 안력이 증대된 후공의 눈에는 어찌나 느린지 다가오는 손 마디 손금까지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오른쪽 어깨에 닿으려 할 찰나 후공이 아슬아슬하게 사선으로 물러났다· 회피는 언제나 간발의 차이일수록 좋다· 그래야 상대가 당혹하고 다음 공격에 지연이 생긴다·
연달아 두 걸음의 무형보(無形步)·
처음 윤을 상대할 때와 지금의 무형보는 다른 영역에 있었다· 육각망의 녹혈은 그에게 여유로움을 선물했다· 보법뿐이 아니라 기운에 반응하는 기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옷자락 앞에서 손이 빗나갔음에도 천규인의 입가에는 득의만면한 웃음이 떠올랐다·
후공도 웃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결정 짓는 건 오른손의 비수라는 생각이겠지·’
비수가 회피 방향으로 찔러 들어왔기에 그대로 방향을 이어가면 심장을 갖다 바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럴 수야·’
후공은 신형을 멈칫하며 흔들었다·
무영보의 환(環)·
이는 얼핏 봐선 나아가는 게 좋은지 물러나는 것이 옳은지 갈피를 못 잡는 것처럼 보인다·
그 머뭇거림이 미묘해 천규인의 비수는 다시 허공만을 찔러 들어갔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멈칫한 모습을 어설프다 곡해한 천규인이 여유를 찾았다·
“대공자 운이 좋군· 하지만 언제까지 운이 따라줄까!”
“네게 오십 초까지 기회를 주마·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봐라·”
“대공자 욕심이 많아졌소이다· 오십여 초나 살고 싶어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