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천공단이 북해빙궁을 맞이하는 자세·
만빙호·
꽁꽁 얼어붙은 호수로 천공단이 뛰어들었다·
“이게 바다야 호수야?”
“사형 이렇게 넓은데 다 얼었어· 이 정도면 물고기도 얼어붙은 거 아닐까?”
“멍청아 열양화리를 봤으면서 그런 소리가 나오냐?”
“아 맞다·”
거지들이 떠들어대는 사이 이미 다른 이들은 호수의 얼음층에 구멍을 내고 있었다·
얼음은 두꺼웠지만 구멍을 내는 건 천공단에겐 누구 할 것 없이 식은 죽 먹기였다·
“야 거지새끼들아! 구멍 파 놨으니까 얼른 와라·”
“신입 수고했어!”
“우리 신입 마음에 쏙 든다니까!”
낭인왕의 배려에 두 거지가 고마움을 표했다·
이내 각각 자리잡으며 낚싯대를 드리울 때 은앙개가 제안했다·
“여러분! 누가 더 많은 물고기를 잡는지 내기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거 좋지!”
“무조건 내가 일등인데 겁도 없이 내기를 하려고 하네?”
“누가 할 소리!”
“해보자고!”
“가자아아아아!”
[우리도 우리도 할래! 우리도 낚싯대 줘!]
[그윽!]
원래부터 활달한 데다 내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천공단이다· 사소한 일에도 언제나 누가 이기냐로 목청을 높이는 천공단이었기에 발작적으로 동의하며 낚싯대가 드리워졌다·
거기다 우리도 천공단이잖냐며 색관조와 금섬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낚시 자리에 후공은 없었다·
후공은 그저 호숫가에 앉아 천공단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이런 광경인가·’
북해는 후공도 처음이었다·
언젠가는 이곳을 찾을 생각이었지만 천공단과 함께일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그래서 이런 광경인가였고 또 그래서 삶은 알 수 없다고 하나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해빙궁의 궁주 현음신녀의 모습도 떠오른다·
현음신녀는 빙공의 영향으로 멋들어진 은발을 지녔고 팔순이 넘는 나이임에도 외모는 고작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도 얼마 전의 대화처럼 들려온다·
[후공 하루하루가 따분해지고 오늘이 어제와 다를 것이 없어지면 북해로 오세요· 북해 만빙호의 빙어가 별미거든요· 제가 직접 잡아 대접해드리지요·]
[신녀의 말씀을 듣자니 지금 갑자기 따분해집니다·]
[하하하 그럼 당장 함께 가야겠는걸요?]
그렇게 환히 웃은 다음 현음신녀는 진정한 용건을 꺼냈다·
[실은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급한 일입니까?]
[글쎄요···· 본궁이 70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일이니 대답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점에선 급한 일이 아니라고 봐야겠지만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선 급한 일이라 볼 만하지요·]
[크흠···· 그 긴 세월 북해빙궁이 해결 못 한 일을 제가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그때의 부탁은 들어주지 못했다·
정해진 일정도 있었고 빙궁 스스로도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70년의 숙원인 만큼 빙궁이 해결했을 때 얻게 될 성취감이나 자신감도 고려했다·
그래서 그저 언젠가 기회가 닿는 대로 찾아뵙겠노라는 말을 전하였는데 이렇게 천화서고 대공자로 천공단과 함께 찾아오게 되었다·
빙궁은 답을 찾았을까?
현음신녀는 잘 지내고 있는 것일까?
상념은 날아갔다·
“대공자께선 구경만 하실 건가요?”
제갈혜가 다가오며 말을 건네왔다·
귀여운 녀석이 차분한 신색으로 다가온다·
차분한 얼굴도 보기 좋다만 후공은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잘하는 것 중 하나를 꼽으라면 요 녀석을 웃게 하는 일이니까·
“크흠··· 저는 두목이니까요·”
“하하하!”
짐짓 거드름을 피워주자 제갈혜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식이다·
너무 쉽다·
혜의 환한 웃음을 후공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제갈혜의 나이가 스물둘이던가 스물셋이던가·
상관없겠지· 둘이든 셋이든·
한참 꽃다운 때 활짝 핀 꽃처럼 웃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웃는 모습이 푼수처럼 보이는 건 내 눈에만 그리 보이는 것일 테고·
또 어느덧 북교산의 악몽도 먼 옛날 일처럼 기억되는 듯 보이니 그것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고마워요·”
곁에 앉으며 혜가 말한다·
후공은 갸웃해 보였다·
“갑자기 말입니까?”
“소원을 이룬 것 같아서요·”
“크흠 그때 나눈 대화인가 보군요?”
“네·”
제갈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혜는 얼마 전 제갈세가를 함께 거닐었을 때 나눈 대화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후공은 그 전의 대화까지 포함해 떠올리고 있었다·
무림맹에서 나눈 대화·
[녹림왕이 있는 우왕산 방목장으로 가든지 북해로 가든지 해야겠다· 북해의 현음신녀가 북해 빙어가 그렇게 맛이 좋다며 꼭 와달라고 했거든·]
[어디로 가시든 반년 뒤에는 저도 백부님이 계신 곳에 갈 거예요·]
[아··· 귀찮구만· 내게 왜 그러느냐 도대체·]
[아 몰라요· 인수인계가 반년이 안 걸릴 수도 있으니까 그리 아세요·]
제갈혜의 말대로 되었다·
반년이 조금 지난 시점인 것도 공교롭다·
“조금 묘하다 싶어요·”
“무엇이 말인가요?”
“백부가 아니고··· 곁에 있는 사람들이 바뀌었는데··· 묘하게 괜찮네요·”
“다행입니다·”
바뀌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귀찮지도 않다고 후공은 생각했다·
“또 막상 여기 오고 나니 북해빙궁에 굳이 들어가보지 않아도 괜찮다 싶어요·”
“어허! 소저 말씀이 살짝 언짢습니다·”
“하하하 갑자기 말인가요?”
짐짓 미간을 찡그려주었기에 제갈혜가 아까 했던 말을 따라하며 웃었다· 제갈혜도 진작에 적응 완료한 터· 표정과 말투만으로 농담과 진담을 구별할 수 있었다·
“소저 북해빙궁이 우리를 환영하지 않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서운합니다· 저로 말하자면 천하에 명성 높은 천공단주입니다· 분명 북해빙궁은 문을 활짝 열고 반길 겁니다·”
“아! 제가 미처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소저 앞으론 주의해 주십시오·”
“하하하하!”
제갈혜의 웃음보가 또 터졌다·
이런 식이다·
언제나 쉽다·
“대공자 든든하고 기대되는군요·”
물론 제갈혜는 기대하지 않았다·
천공단주의 명성이 드높은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이곳은 새외· 중원의 소식이 전해지기엔 너무 멀다· 천공단주의 명성이 알려지려면 몇 달은 더 지나야 할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나 천공단의 면면이 북해빙궁에는 더 크게 와닿을지도·
하지만 든든한 건 맞다·
이 젊은 서생은 정녕 두목 답고 누구 앞에서도 주눅 드는 이가 아닌 것이다· 또 매번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 놓는 사람이기도 하고·
멋대로처럼 보인다 싶을 때가 있지만 정작 결과를 보고 나면 멋대로인 적이 없었다·
백부를 떠오르게 하는 이·
백부와 같은 기질을 지닌 사람·
먼 훗날 백발이 되고 뚱뚱해진다면 백부를 보는 것 같을지도·
“크흠···· 어째 안 믿는 눈치로군요·”
“제가요? 대공자 착각이에요· 제가 안 믿을 리가요·”
“저의 착각입니까?”
“그럼요·”
제갈혜는 장난스럽게 말을 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다음에 듣게 될 말을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오고 있습니다· 저쪽을 보십시오·”
“네?”
가리킨 손을 따라 제갈혜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갸웃하고 있으려니 이내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옷을 입은 이십여 명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눈 위를 달리는데도 순식간에 가까워지며 모습이 선명해졌다·
“저들이 북해빙궁인가요?”
“그래 보입니다·”
후공은 추측한 것처럼 답했다·
하지만 자령안으로 확인했다·
다가오는 이들의 상의 허리 위치에 다섯 개의 얼음 조각 문양이 정밀하게 수놓아져 있으니 이는 확정·
이내 북해빙궁의 제자들이 당도했다·
모두 여인들이었고 나이 대는 이십 대에서 사십 대까지 다양했는데 안광을 차갑게 빛내며 바라보는 것이 적의가 명백히 드러났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연배가 있어 보이는 한 여인이 나서며 물었다·
제갈혜의 시선이 대공자 쪽으로 향했다· 대공자의 기대와 달리 북해빙궁이 적대적이니 대공자가 어찌 대처할지 궁금해졌다·
‘···?’
그러다 갸웃했다·
이상한 것이다· 대공자가 빙궁 쪽 인물들을 뚱하니 바라볼 뿐이었고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인가?”
금적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터졌다·
북해빙궁의 제자들이 흠칫해 바라볼 때 낚싯대를 팽개친 천공단 열둘의 신형이 솟구쳐올랐다·
솟구친 상태로 허공에서 목소리를 냈다·
“우리가!”
“누구냐면!”
“우리는!”
“천!”
“공!”
“단!”
“이!”
“다!”
천공단이 단주 곁으로 부채처럼 펼쳐 내려섰을 때 북해빙궁의 여인들은 놀란 나머지 네 걸음이나 물러났다·
놀랄 수밖에 없다·
미친놈들 같은 것이다·
점잖아 보이는 노인에 험악한 인상을 지닌 자도 있고 거지에다가 또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젊은이들까지 한 글자씩 끊어서 말하며 등장하면 놀라는 건 당연했다·
“천공단이라고?”
아까 나섰던 여인 한유예가 다시 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가장 나이 많은 금적자·
금적자가 즉시 양팔을 옆으로 벌리고 한쪽 다리를 들어 학 자세를 취했다·
“그렇다· 우리 천공단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어 은앙개가 이어받았다·
“천공단의 천은!”
“천화서고의 천!”
“공은!”
“대공자의 공!”
“천공단은!”
“천화서고오오오오오····”
“대공자르으으으을····”
“지키는!”
“사람들!”
“이지!”
“끝!”
마지막을 장식한 건 남궁연이었다·
‘끝’ 하고는 빙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고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왜 빙글 돌아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제갈혜는 그 모습들에 입을 틀어막으며 간신히 웃음을 참아내야 했다·
그녀가 처음 본 건 아니었다· 여정 중간중간 천공단은 이런 등장에 관하여 틈날 때마다 연습했는데 누구 대사가 많냐 적냐로 아귀 다툼이었던 것이다·
그건 남궁연이나 언교운도 다를 바가 없었다·
오직 부끄러워하는 건 유일하게 천산의 후인 설영뿐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금도 설영만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모조리 의기양양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북해빙궁은 잠시 말이 없어졌다·
왜 아직까지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있다·
이제 한유예의 시선은 천화서고 대공자 쪽으로 향했다·
“그대가 천화서고 대공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곳은 북해빙궁의 영역· 외부인의 출입은 불가합니다· 곧바로 그대의 천공단과 함께 이곳을 떠나주십시오·”
“거부하면 어떻게 됩니까?”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무섭군요·”
말과 달리 후공은 빙긋 미소 짓고는 천공단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자 그럼 누가 좋을까요? 무공의 경지가 높은 금적선생이 좋을까요 아니면 항마삼협이나 무산쌍웅이 좋을까요? 그도 아니면 천산의 후인인 설 소저가 말하는 게 좋을까요? 개방 방주의 두 제자도 괜찮아 보이지만 제 결정은 남궁세가의 후계자인 남궁 형이 좋아 보이는군요·”
북해빙궁 쪽의 안색이 달라졌다·
불려진 이름마다 강호의 명성 높은 이들인 탓이었다·
‘금적선생?’
‘항마삼난?’
‘천산신녀의 제자에 개방 방주의 제자라고?’
‘남궁세가?’
후공의 말이 이어졌다·
“남궁 형! 제가 무슨 명령을 내릴지 짐작이 됩니까?”
“네 두목!”
남궁연이 즉시 답했다·
“그럼 남궁 형이 대신 명령을 내려보십시오·”
“네!”
이번 대답도 망설임 따윈 없었다·
여태 보고 느낀 바가 있다· 숨쉬는 것까지 따라하다 보니 이젠 두목의 어감만 들어도 대충 감이 잡히는 남궁연이었다·
스릉!
남궁연이 검을 빼들어 추켜세웠다· 이어 눈을 매섭게 빛내며 소리쳤다·
“천공단은 퇴각하라아아아아아아!”
그런 다음 남궁연이 바라봤다· 두목이 흡족히 엄지를 들어 보인다·
그것이 신호였기에
천공단이 일제히 도주하기 시작했다·
뿔뿔히 흩어졌다가 그쪽 방향 아니라면서 소리쳐 부르는가 하면 은앙개와 소천개는 버려진 낚싯대들을 챙기느라 호수에 뛰어들었다가 미끄러지기도 했다·
“제갈 군사 누나 뭐해! 뛰어!”
혼자만 얼떨떨해 있던 제갈혜는 소천개의 재촉에 그제야 신형을 날렸다·
여간 정신 사나운 광경이 아니어서 멀어져 가는 천공단을 바라보는 빙궁의 빙연대는 퀭해졌다·
그리고 멀어져가는 모습 속에서 생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주인님! 북해빙궁은 알까요? 주인님이 북해빙궁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말이에요?]
[그으으으윽!]
“하하하 몰라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