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모두가 기다린다· 모두가 외친다·
두 사람의 대치·
소녀는 반로환동한 빙궁의 궁주·
마주한 건 신비한 불길로 빙벽을 날려버린 천화서고 대공자·
현유신녀와 빙궁은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현유가 아직까지 몰라서는 아니다·
도리어 알고 있기에 관여할 수 없었다·
대공자가 말했었다·
‘신녀 주화입마에 대해 아십니까?’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 속에 대공자는 궁주의 주화입마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기억이 회복되어야 끝나는 뜻이냐고 묻자 돌아온 건 웃음·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온전한 기억의 회복입니다·’
왜곡된 기억 잘못된 인지가 바로잡혀야 기억의 회복이라 할 수 있고 그제야 주화입마에서 벗어난 것이라 했다·
현유는 그때 이해했다·
사건 당시 궁주의 기억·
자신은 너무 어렸지만 궁주인 사저는 여덟 살·
그날 뭔가 잘못되었을 것이다·
무언가 틀어졌을 것이다·
궁주인 이사저는 이후 대사저를 원망했고 긴 세월 대사저에게 죽음을 선사할 방법을 찾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이사저가 대사저를 지키고 있다·
‘이것이··· 이사저의 진심·’
그때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그만해· 보내줘· 모두에게 지옥이었단 걸 몰라?”
물론 알고 있다·
그녀는 각자가 지옥이었다고 말한다·
낮에 뜨는 달처럼 보이지 않아도 늘 존재하는 달처럼 현이의 존재는 빙궁에게 두려움이 되었고 현이는 생지옥에 놓였다고 말한다·
알고 있기에 후공은 답했다·
검령에 강기를 발현했다·
검령은 온전히 자줏빛 광채로 뒤덮였다·
그 대답에 소녀도 입술을 질끈 깨무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보였다·
‘내가 지켜·’
소녀는 뒤쪽으로 소매자락을 휘둘렀다·
순간 하얀 광채가 일며 뒤쪽에 있던 현이를 감쌌다·
이윽고
쩌저적!
원형의 얼음벽이 작은 방처럼 현이 주변에 형성되었다·
그 모습에 후공이 미소를 머금었다·
끝은 거의 왔다·
이번에도 현이는 갇혔지만 지금의 의미는 다르다· 이젠 보호받고 있지 않은가·
남은 건 하나·
소녀·
그 소녀가 현음신녀가 되는 것·
스슷!
소녀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흐릿해졌다 싶은 순간 이미 소녀의 앞에 당도했다·
검령이 소녀의 목을 그어갔다·
속절없이 머리가 날아갈 찰나 소녀의 손이 그보다 빨랐다·
오른손으로 검강을 막았다·
고작 손이다· 그것도 조그마한 손·
무모해 보였으나
카앙!
검령이 튕겨졌다·
그저 손이 아니었다· 소녀의 손 앞으로 떠오른 건 작은 쟁반 크기의 투명한 얼음벽· 검령은 튕겨나가고 얼음장벽도 산산이 부서졌다·
그 직후 소녀가 왼쪽 소매를 휘감듯 젖힌 순간 그녀의 손에 들린 건 세 자루의 얼음 비수· 그대로 후공에게 쇄도했다·
“빙뢰!”
“궁주님!”
지켜보는 빙궁 쪽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 탄성이 끝나기도 전 후공은 검령을 휘돌려 짓쳐드는 세 자루의 얼음 비수를 쳐 냈다·
부서지는 얼음 비수 사이로 다시금 검강이 흩뿌려진다·
‘충분히 놀라운 신위다만 조금 더!’
후공이 아는 현음신녀는 이런 수준이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소녀는 더 나아가야만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쯤에 가서야 정기신은 합일을 이룰 터·
그때 온전히 기억이 돌아온다·
슷!
소녀는 맞서기보단 회피를 택했다· 신형을 솟구쳤다· 눈부신 신법이지만 후공에겐 예상된 경로· 방향을 틀어 따라 솟구치며 소녀의 다리를 쓸어갔다·
“헉!”
“안 돼!”
“이 무슨!”
빙궁의 장로들 몇이 놀라 외칠 때 이미 소녀는 위기를 벗어나있었다· 더 위로 솟구쳐올랐다·
허공에 체공한 채로 신형을 휘돌려 왼손은 앞으로 오른손은 뒤로 당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후공은 알아봤다·
투명할 뿐이다·
기운이 흐르고 있고 또한 왼손과 오른손 사이에 드러난 공간의 굴절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건 화살과 화살촉·
‘빙전(氷箭)인가? 마음에 드는군·’
소녀는 예상보다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
소녀가 아닌 현음을 향해·
‘여기에서 조금 더!’
슈슈슈슈슉!
연달아 다섯 발의 얼음 화살이 머리를 향해 맹렬한 기운을 품은 채 쏟아져내렸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현음을 비롯한 빙궁의 장로들 정도만 겨우 알아봤다·
이제 위기는 천화서고 대공자였다· 그렇기에 알아본 이들은 다른 의미로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그럴 것 없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후공이다·
‘환명·’
쏟아져내리는 다섯 발의 얼음 화살 앞으로 떠오른 건 환명· 빠져나갈 수 없는 지옥의 늪·
지이이이잉·
세 개의 환명에 닿은 얼음 화살은 그대로 허공에 멈춰 허우적거렸다·
도무지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광경·
지켜보는 현유와 빙궁의 장로들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녀 또한 마찬가지·
그녀의 눈에도 당혹이 어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조금 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다 펼쳐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소녀의 눈빛이 후공은 마음에 든다·
‘그래 조금 더·’
하나의 환명을 발 밑에 생성하여 딛은 후 도약했다· 폭주하듯 솟구쳤다·
소녀가 그대로 마주쳐온다·
허공에서 서로의 눈빛이 마주쳤다·
검강이 짓쳐든 순간
‘할 수 있어·’
소녀의 왼손에 얼음방패가 떠올랐다·
검강이 방패를 부서뜨릴 때 소녀의 우수는 후공의 어깨에 닿아갔다·
‘끝이야!’
소녀는 승리를 확신했다·
벗어날 수 있을 리가·
하지만 그것이 섣부른 착각이란 걸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신형이 어떻게 틀어졌음인가·
거의 지척으로 닿아가던 소녀의 손은 허공을 갈랐다· 눈앞이 텅 비어 감쪽같이 사라졌다 싶을 때 뒤쪽에서 파공음이 들려왔다·
‘어떻게?’
등 뒤였다· 밀려드는 장력에 놀라 황급히 빙벽을 형성했지만
콰앙!
소녀의 신형은 그대로 날아가 지면에 처박혔다·
꿈틀대며 일어서는 소녀의 귓가로 천화서고 대공자의 차가운 음성이 찾아들었다·
“자비는 여기까지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소녀의 눈에 보인 건 현이를 향해 걸어가는 천화서고 대공자·
“멈춰!”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소녀는 더 크게 소리쳤다·
“멈춰! 그녀는 잘못이 없어!”
멈추지 않는다·
도리어 현이를 보호하는 빙벽을 부수려 검을 치켜드는 모습만이 소녀의 눈에 가득 들어찼다·
그리고 단 일검·
빙벽이 부서졌다·
“제발 죽이지 마! 뭐든지 할게! 하라는 건 다 할게!”
그 말에 천화서고 대공자가 응한다·
현이의 목을 틀어쥐고 들어올리며 소녀를 돌아봤다·
“넌 쫑알쫑알 시끄럽구나· 그보다····”
후공은 눈 앞의 현이에게 시선을 옮겼다·
“현이 마지막으로 할 말은?”
현이가 웃었다·
– 고마워요 대공자·
전음을 발한 후 소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예쁜 아이 착한 아이· 널 보니 좋구나·”
그 순간이었다·
소녀의 몸 안에서 뭔가가 일어났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폭발 혹은 전신을 쓸고 가는 듯한 태풍· 분명 거칠고 난폭하지만 쓸고 지나간 곳곳마다 상쾌함이 깃들어 간다·
이윽고 소녀의 안광이 폭주했다·
“내려놔·”
“응?”
후공은 갸웃해보였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제 끝이다·
소녀의 정기신· 그 합일이 이루어져간다·
현음이 되어간다·
순간 소녀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싶을 때는 이미 지척·
후공이 현이를 내려놓고 검을 그어갈 때 잡혔다·
하얀 서리가 맺힌 소녀의 손을 검강은 어찌하지 못했고 그대로 잡힌 순간 얼어붙었다· 이어 뻗어온 손길은 후공의 가슴에 닿았다·
단지 그뿐·
쩌저저적·
후공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채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얗게 서리가 덮인 채였다·
그 모습을 소녀는 넋이 나간 듯 바라봤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을 죽인 것이다·
다정했던 오라버니였다·
“미안··· 내가 미안해·”
소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 다정함은 거짓이 아니었고 그 무엇보다 따뜻했다는 걸 알기에 그녀는 눈물을 쏟아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
소녀는 한 걸음 나서 모두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말이 없고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다·
모두가 숨조차 내쉬지 않고 소녀를 바라봤다·
소녀가 입을 열었다·
“날 원망해· 날 욕해· 하지만 막아서지 마· 그 누구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현이는 빙벽 속에서 지옥을 보냈어·”
“····”
“····”
“····”
모두가 그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마음으로만 내는 소리·
‘이제 곧·’
‘이제 곧····’
“이제 곧이야····‘
소녀의 외침이 이어졌다·
“그녀가 보낸 그 끔찍한 세월은 상상조차 할 수 없어· 그녀는 누구보다 빙궁을 사랑했어! 그녀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어! 그녀가 빙벽 안에 갇힌 것도 빙궁에 남고 싶었기 때문일 뿐· 그리고 그녀가 내게 남긴 말 대사저가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은····”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쾅!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며 기억이 쏟아지듯 소녀의 머리로 휘몰아쳤다·
혈사의 그날·
원망에 찬 눈으로 바라보던 자신의 귓가로 들려온 대사저의 마지막 전음·
– 나의 사매 현음···· 내가 사랑하는 사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길···· 그때··· 네가 날 용서할 수 있다면 그때··· 네가 날 이해할 수 있다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 왜 대사저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어렸다· 사랑한다는 말에도 어렸다는 핑계로 기억에 남기고 싶은 말만 새겼고 왜곡했다·
언젠가 다시 볼 날을 기대한다 라고·
그 말만·
혼란과 공포 속에 그 말만을 대대로 전한 것은 자신·
빙궁의 지옥도 그 긴 세월 빙벽 안의 지옥도 더 빨리 끝낼 수 있었건만 숙원이라는 이름으로 지워내려고만 했던 시간들·
만약 진심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일부러 잊으려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시간들·
‘나는 빙궁의 궁주···· 현음·’
현음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어린 소녀의 몸·
이 또한 떠오른다·
암자의 동혈에서 주화입마· 도움을 청하려 소리쳐 봤지만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비틀대다 연못으로 추락·
거동할 수 없어 귀식대법· 그 이후 깨어나 듣게 된 다정한 목소리는····
‘그는 천화서고 대공자·’
거기에 생각이 미친 순간 현음은 소스라쳤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내가 그를··· 죽였어·’
방금 전의 일까지 모두 떠오른 탓에 현음은 슬픔을 이기기 힘들었다·
그런 그녀의 귓가로 들려온다·
“현음신녀·”
다정한 목소리·
‘이 목소리는?’
놀라 돌아보자 천화서고 대공자가 미소 짓고 있었다·
“어 어떻게?”
어찌된 일인지 현음으로선 알 수 없다·
뼛속과 모든 피까지 얼어붙고 심장마저 멈추었을 텐데 그래서 건드리면 부서질 조각이 되었을 텐데 어찌된 일인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버젓이 서 있는 것이다·
현음은 모른다·
후공은 화극을 품은 자·
그저 마지막 각성의 순간을 위해 얼어붙은 것뿐·
“운이 좋았습니다· 기억을 찾으신 듯하니 기쁩니다·”
“어···?”
안도하는 마음 한편으로 현음은 의문이 든다·
그녀의 시선은 대공자의 미소를 보고 이어 그 곁에 서 있는 대사저 현이를 향했고 다시금 돌아가 빙 둘러 서 있는 모든 빙궁인들과 천공단을 향했다·
미동은 없지만 이제 모두의 표정은 살아있다·
그제야 현음은 상황을 이해했다·
‘아! 모두가 알고 있었구나· 날 기다리고 있었구나· 내가 현음이 되기를····’
그 순간 우렁찬 외침이 터져나왔다·
“빙궁이!”
“궁주님을 뵙습니다!”
외침은 이어졌다·
“빙궁이 현이신녀 님을 뵙습니다·”
그 외침에 현음과 현이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를 보며 웃었다·
서로를 보며 울었다·
마치 그날과 같았다·
현이신녀는 그때로부터 늙지 않았고 현음신녀는 소녀가 되었기에 그날과 같았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지옥은 아니다·
외침은 마치 햇살과도 같이 어둠을 몰아내고 있다·
외침은 이어졌다·
“북해빙궁이 천화서고 대공자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지옥의 끝을 알리는 외침은 듣기 좋았다·
거기에
왜 천공단이 함께 외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