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처음으로 위로해준 사람· 듣기 좋았던 목소리·
그 밤
빙궁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각각의 처소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 가운데 웃음과 눈물이 뒤섞였다·
감탄의 말도 빠질 수 없다·
천화서고 대공자·
그는 멀리서 와서 빛났다·
빙궁의 별이 되었다·
그를 맞이한 건 빙궁의 행운·
90년· 빙궁의 기나긴 숙원이 생긴 이래 아니 빙궁의 역사상 대공자는 최고의 귀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밤은 어땠을까·
알고 있다·
어제와 다름없는 밤·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벗어놓은 어제를 그대로 입고 ‘오늘’이란 시간을 맞이해야만 하는 나날들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숙원은 끝·
밤은 더 길어도 괜찮다·
빙궁은 이제 밤을 지새워도 힘든 줄을 모른다·
더 이상 아침이 두렵지 않다·
*
다음 날 하루가 고요하게 지나갔다·
어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평온한 밤·
정좌하며 하루를 보낸 후공은 운기를 갈무리했다·
오고 있다·
색관조가 창가로 날아와 알려왔다·
[주인님 손님이 와요·]
“그렇구나·”
[주인님 근데 있잖아요·]
“응?”
[이제 신비를 뭐라고 불러야 해요?]
오고 있는 건 현음신녀·
“크흠 넌 당연한 걸 묻는구나· 궁주님이라고 불러야지·”
[신비라고 부르면요?]
“죽을지도·”
[궁주님! 궁주님! 궁주님! 궁주님!]
색관조가 바쁘게 연습했다·
[주인님 이제 입에 아주 착착 붙어요·]
“후후 잘했다· 네가 마중 나가 공손히 모셔라·”
[넵· 신비에게 다녀 아이쿠 주인님 저 방금 죽을 뻔했어요· 까르르르르르르르르·]
잠시 후 현음신녀가 들어섰다·
소녀의 모습이었고 한쪽 어깨에는 색관조가 앉았고 다른 한쪽에는 어느샌가 금섬이 올라타 있었다·
그 모습만으로는 영락없이 여태 봐온 소녀일 뿐이었다·
“부르시지 않고요·”
“그럴 수 있나요·”
현음신녀가 미소로 응한다·
두 사람은 방 안 탁자에 마주 앉았다·
잠시 말이 없었다·
후공이 차분히 바라보며 기다려줄 때 현음신녀가 입을 열었다·
“기억이란 게 묘합니다· 기억나지 않아도 될 것까지 모두 떠오르니 난감하군요·”
기억을 잃은 소녀일 때의 시간·
생각해보면 즐거운 순간들이었다· 하지만 천진난만한 시간들이기도 했기에 떠올릴 때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현음신녀였다·
특히 눈앞의 천화서고 대공자가 문제·
그의 목에 올라타고 품에 안겨 있기도 했으며 그 앞에서 투정도 많이 부렸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제 그대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요·”
후공은 이해했다·
현음이 몰라서겠는가· 겸연쩍음의 표현일 뿐·
그래서 답을 알려주었다·
“오라버니·”
“················”
그 말에 현음신녀가 입을 꾹 닫았다·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입매가 꿈틀거린다· 그저 웃음을 참고 있을 뿐· 그러다 끝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덩달아 탁자 옆으로 이동해 얌전히 바라보고 있던 색관조와 금섬도 까르르 극극대며 웃어댔다·
덕분에 분위기는 한결 가벼워졌다·
“대공자 아직까지 이 모습이 적응이 되지 않는군요·”
“금방 적응하실 겁니다·”
“그대는 뭐든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제 버릇입니다·”
버릇일 리가·
이쪽은 무려 환혼되었다·
환혼에 비하면 반로환동은 순한 맛·
현음신녀가 웃는다·
“아니에요 대공자· 그대는 정녕 모든 걸 내다보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미 본궁의 숙원을 해결하기도 했고요· 또 현유에게 듣기도 했습니다· 제갈 군사가 들려주었던 말· 많이 놀랐습니다· 그대는 그야말로 강호를 뒤흔들어 놓았더군요·”
“과장된 이야기입니다·”
“제갈 소저가 이야기를 과장하는 성향인가 보군요·”
“제대로 보셨습니다·”
“하하하!”
웃으며 바라보는 가운데 현음의 기분은 묘해진다·
대공자 이 젊은 서생의 여유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기억을 잃고 소녀일 때는 그저 다정한 오라버니였는데 모든 걸 알게 된 지금은 경이로움· 마치 절대자의 그림자가 엿보이는 듯하다·
이 나이에 가능한 일인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가 해냈다는 것·
대공자는 누구를 신뢰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모두를 기다리게 했으며 방법을 찾아냈다· 그 전에 대사저의 아픔도 헤아렸다·
가장된 차가움과 거짓된 도발로 자신의 주화입마도 끝내 주었다· 말로는 쉽지만 어느 것 하나 간단치 않은 일이거늘 이 복잡한 실타래를 아무렇지 않게 풀어냈다·
‘그래서겠지?’
천룡의 가문들이 대공자를 좋아하고 소요와 종남이 은인으로 여긴다는 말이 믿어진다·
이제 그들과 같다·
북해빙궁도 같아졌다·
“궁주 현이신녀의 회복은 어떻습니까?”
“대사저는 빠르게 좋아지고 있어요· 본래의 수행이 높은 데다 대사저의 근본은 극음지체· 거기에 오늘 본궁의 빙정을 흡수했지요· 모두 대공자 덕분입니다·”
“다행입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답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편히 말씀하십시오·”
“어제 빙벽을 녹인 화염· 그대는 화정을 취했나요?”
“네 운이 좋았습니다·”
“아!”
현음이 탄성을 터뜨리고는 말을 이었다·
“화정이 그토록 강대한 기운이었군요· 그동안 본궁에서는 화정이 빙정에 비해 보잘것없다고 판단해 왔는데 새삼 겸허해집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빙정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으나 화정이 월등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제의 일은 우연히 상성이 들어맞은 것뿐입니다·”
겸양만은 아니었다·
어제 펼쳐 보인 건 화정이 아닌 화극·
화정은 화극에 비하면 달빛 아래 반딧불 정도·
화정으로는 대성한다 해도 현이의 빙벽을 녹여내지 못했을 것이다·
“대공자 그대의 겸손은 따라가기 힘들군요·”
소녀일 때는 다정한 오라버니였는데 궁주가 된 모습 앞에서는 여유 속에 예의를 다하니 현음은 대화가 즐거웠다·
하지만 밤이 깊다·
이제 대화를 정리해야 할 때였다·
“닷새 뒤· 연회를 베풀까 해요· 그대와 천공단이 서둘러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크흠 닷새라····”
“어려운가요? 그럼 날을 앞당기도록 하죠·”
“그게 아니라 한 달 정도 머물 생각이었습니다만· 낚시하러 온 터라 빙어도 잡아야 하고요·”
“하하하!”
현음이 소녀의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녀로선 무엇보다 반가운 소리였다·
연회도 연회지만 대공자에게 줄 것도 있다·
대공자는 빙궁의 은인·
그에게 무엇을 준다 해도 아깝지 않다·
그 웃음에 언제 끼어들까 노리고 있던 색관조와 금섬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좋다며 펄쩍거렸다·
**
다음 날·
설산파는 손님을 맞았다·
50대의 여인이었다·
설산은 그녀에게 극진히 예를 갖췄고 장문인께 인도했다·
“어찌 한 장로께서 직접 오셨습니까?”
설산 장문인 설곽이 반기며 자리를 권하니 여인이 미소를 머금었다·
“스승님께서 다녀오라 하셨습니다· 장문인 이리 말씀드리면 이해하시겠지요?”
“스승이시라시면···· 아!”
설곽은 이해했기에 탄성을 터뜨렸다·
눈앞의 여인 한오는 빙궁의 장로이자 궁주의 대제자·
이는 소녀 반로환동한 현음신녀가 기억을 찾았다는 뜻이었다·
“스승님께서는 설산에 큰 폐를 끼쳤으며 또한 장문인이 베푼 아량에 감사한 마음이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허허··· 폐라니요 감당하기 힘듭니다·”
설곽은 너털거리며 손을 저었다· 하지만 웃음 끝에 아쉬운 마음이 파고든다·
느낌상 천화서고 대공자와 천공단이 훌쩍 떠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 설산에 꼭 들르겠다 했거늘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그래야만 했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괜히 서운해지는 설곽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혹시··· 천화서고 대공자는 떠났습니까?”
“은인께선 본궁에 계십니다·”
“···?”
설곽이 갸웃했다·
‘은인이라니?’
다행이고 기쁜 마음이 들면서도 의아함을 떨쳐내기 힘들다·
반로환동하고 기억을 잃은 궁주를 찾아낸 것이 천화서고 대공자이니 은혜임은 틀림없지만 한 장로의 어감이 문제였다·
대공자를 칭하는 한 장로의 음성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공손함이 깃들어 있지 않는가·
그 모습에 한오가 미소를 머금었다·
“은인께서 본궁의 숙원을 해결하셨습니다·”
“그 그게 무슨···?”
설곽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대공자가 그 빙벽을 부수고 현이신녀를 죽였단 말입니까?”
설곽으로서는 듣고도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날의 혈사·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랐다·
“은인께선 그보다 더 대단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그보다? 아니 잠깐만···· 비 빙궁에 그런 게 또 있었습니까?”
설산의 장문인이 멍청한 표정이 되었기에 한오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손으로 가려야 했다·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설산의 장문인은 너무 놀라 말을 잃었고 그 가운데 빙궁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
연회를 하루 앞둔 밤·
현이는 빙궁의 밤을 거닐었다·
혼자였고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디뎠다·
발에 와 닿는 지면의 감촉을 마음에 새겼다·
‘꿈이면 어떡하지·’
현이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여전히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 감촉 이 바람 이 공기·
그녀는 꿈 같아서 그런 마음이 들어 천천히 느껴본다·
생생히 느껴보려 천천히 걷는다·
그러다 멈춘 곳은 빙벽 앞·
저곳에 있었다·
저곳에서 보았다·
사랑하는 이들의 원망에 찬 눈동자를 보았고 원망에 찬 음성을 들었다·
견디기 힘든 시간들·
그 눈길을 마주하면서 모두가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가 돌아간 밤은 더 힘들었다
밤의 어둠은 쓸쓸한 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도 고단한 하루 그리고 또 하루 또 하루· 어느 날부터인가는 스스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또 어느 날부터는 스스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생각한 것들·
저곳을 걷고 싶어·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싶어· 옷자락의 펄럭임도 보고 싶어· 누군가의 손을 맞잡고 미소 지으며 천천히 걷고 싶어·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언젠가는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언젠가는··· 웃을 날이 오지 않을까·
또 누군가의 손을 잡고 빙궁을 거닐 수도 있지 않을까·
또 어느 밤은 떠올랐다·
어느 곳의 밤은 귀뚜라미가 운다던데 어떤 소리일까? 궁금해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웃었다· 혼자 울었다·
그러다 잠들어 깨어나 보면 몇 년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은 성장한 현음과 현유를 보며 알아갔다·
나이 들어가는 사저들을 보며 또 꿈을 꾸며 보냈다·
오늘은 오늘은 오늘은····
다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시간들·
한데 듣지 못했다·
한데 들려왔다·
– 현이신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얼마나 외로웠습니까·
천화서고 대공자·
다정한 목소리였다·
빙벽 안이라서 다행이었다·
표정이 그대로여서 다행이었다·
아니면 펑펑 우는 모습을 그에게 보이고 말았을 것이다·
멋진 사람·
그와 같은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잠들었겠지·
그때 들려왔다·
“현이신녀·”
현이가 돌아봤다·
그녀는 잠시 넋이 나갔다·
‘거짓말·’
천화서고 대공자였다·
“함께 걸으시겠습니까?”
현이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괜히 마음이 들킨 것 같아 뺨만 붉어졌다·
그러다 답했다·
“좋아요·”
그렇게 두 사람은 밤을 걸었다·
이십 대 초반의 남녀·
하지만 한 사람은 환혼된 천하제일인이며 한 사람은 극음지체를 타고 난 빙궁의 절세 고수였다·
말은 없었다·
그럼에도 현이는 좋았다·
생각하게 된다·
‘꿈만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