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천공단주가 천하제일이다·
지천주는 넋이 나갔다·
천화서고 놈의 제안은 정파의 방식이 아니다·
자식을 인질로 삼고 수하들을 죽이라니·
이런 지독함은 그조차도 겪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계속 생각하게 된다·
계속 바라보게 된다·
‘대체 뭐하는 놈인가?’
고작 스무 살가량·
서생이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데 어찌 이리도 태연히 사람을 뒤흔드는가·
지닌 바 무공의 경지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천하제일인의 신검을 유도해내고 자유자유로 부릴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떤 선택이 옳은가?’
강요된 선택·
자식을 택할 것인가 수하를 택할 것인가·
머리가 터져버릴 듯하다·
이걸 갈등하고 고민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해져 머리가 바스러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수하는 언제든지 다시 거둘 수 있다· 지천의 무학은 빠른 성취를 보장한다· 몇 명이든 언제든·
하지만 핏줄은 자신의 전부· 삶의 의미·
문제라면 결과에 대한 신뢰·
확인이 필요했다·
– 그 말을 어떻게 믿지?
– 문서로 남겨 인장이라도 찍어주길 원하나? 원하면 그래주지· 그게 의미가 있다면·
– ····
지천주는 말문이 막혔다·
문서는 태우면 그만이라는 뜻· 그깟 종이·
대공자의 전음이 이어졌다·
– 내 말이 신뢰다· 내 강호의 명성이 약속이다·
– ····
지천주는 자신도 모르게 떠올렸다·
천화서고 대공자의 명성·
천룡의 가문들의 은인이라고 했고 소요파를 바로 세웠다고도 했으며 유령곡으로부터 종남을 구한 이· 그 외에도 수많은 문파와 가문들이 그를 비호한다· 그들이 보내는 신뢰 그가 걸어온 길에 보인 약속들·
거기에 한 문파가 추가되었다·
지천주는 점창파 장문인을 바라봤다·
천화서고 대공자의 곁에서 어떤 발언도 주장도 없이 그저 지켜볼 따름인 장문인· 구대 문파 중 하나인 점창의 수장이 마치 수하인 듯 천공단과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점창이 대공자에게 보내는 신뢰가 실로 무한하다·
그 속에 나도?
어림없다·
애초에 결이 다르다·
하지만 구대문파 중 하나인 점창 장문인과 장로들 앞에서 꺼낸 약속이라면····
‘정파의 길은··· 신뢰할 만하다·’
기묘한 역설·
명문정파의 신뢰를 의지하고 있는 자신의 꼴이 우스웠지만 지금으로선 답이 없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지천주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속에 배신이 담기고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참담함이 담겼지만 각주들은 알 수 없었다·
군보와 군호는 아버지에게 버려진다고 오해해 구겨진 채로 보자기 안에 들어있는 채로 두려움에 떨었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끝도 없이 이어지는 웃음에
각주들도 오해했다·
‘주군은··· 정을 떨쳐냈구나·’
지천주가 아들들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이게 옳은 답이다· 이 길밖에 없긴 하다· 불리함 속에 최선의 선택· 이리 되면 상황은 비로소 간단해진다· 쉬워진다·
이대로 땅속을 파고들어 흩어져 밤이 오길 기다린다· 밤은 지천의 세상· 그렇게 처절한 복수를 거행· 피는 피로써 씻어낸다· 점창은 불타오를 것이고 천화서고는 돌 하나 남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쉽게 죽지 못한다·
그 누구도····
그런 생각 그런 각오는 한순간 끊어졌다·
파파팟!
상념 속에 있던 각주들이 눈을 부릅떴다·
점혈되어 몸이 굳어지면 그럴 수밖에 없다· 점혈한 이가 지천주라면 더욱 더·
누구도 점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바로 곁·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인물 거기에 화경의 극에 이른 고수의 손속이다·
“왜···?”
각주 중 하나가 물어왔다·
지천주의 대답은 여전한 웃음·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웃음 아래 일곱 개의 지풍이 쏘아졌고 누구 할 것 없이 머리가 관통당하며 허물어졌다· 여섯 각주와 방에 머물러 있던 군보의 호위까지·
단말마의 비명조차 없이 무너져내리는 광경에 놀란 건 점창과 천공단·
‘무 무슨···?’
‘왜 갑자기?’
‘저 새끼 뭐야! 왜 저래?’
‘설마····’
‘혹시··· 거래?’
천공단 중 몇몇만이 어렴풋이 상황을 유추했다·
하지만 곧 모두가 알게 되었다·
“천화서고 대공자 너의 말대로 되었다· 내가 약속을 지켰으니 너도 약속을 지켜라·”
‘아···!’
‘거래였구나·’
‘전음이 오간 것이었어·’
두 아들을 살려주는 조건임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천에 남은 이는 이제 셋·
지천주와 두 아들·
‘아쉽지만····’
점창 장문인 초광도 받아들였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나 이 결정에 반발할 수 없다·
대공자가 아니었다면 지금 지천의 모습이 점창의 모습이었을 터· 딸도 잃은 지 오래였을 것이다· 어디 딸 뿐인가· 점창은 적이 누군지도 모른 채 멸문의 화를 당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에겐 어떤 결정권도 없었다·
그건 점창의 장로들도 마찬가지·
점창은 주장할 수 없다·
점창이 순순히 거래의 결과를 수긍힐 때
대공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지천주 약속이라니?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뭐 뭐라고?”
지천주의 눈이 불타올랐다·
“넌 좋은 꿈을 꾸었나 보구나· 그 꿈 속에서 내가 그리 말하더냐? 각주들을 죽이면 네 아들들을 살려준다고· 하지만 이런··· 쯧쯧 그건 꿈이다·”
“네 네놈이 어찌 감히····”
황당해하고 놀란 건 지천주만이 아니었다·
점창도 놀라 멍해지고 말았다·
꿈일 리가 있는가·
대공자는 분명 그런 약속을 했을 것이고 확신도 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성사된 거래였을 텐데 대공자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틀어버린다·
설득한 것도 놀라웠지만 약속을 뭉개버린 건 더 놀라웠다·
이 정도면 누가 사악한지 구분이 안 갈 지경· 천화서고 서생이 아니라 마도 서생이었다·
하지만 천공단의 반응은 점창과는 사뭇 달랐다·
이미 몇몇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실실거렸고 몇몇은 잊지 않으려 머릿속에 되풀이해 새겨넣었다·
적보다 더 독하게!
적보다 더 잔혹하게!
정파의 올곧음을 도리어 이용한다·
정파의 신뢰를 적을 무너뜨리는 무기로 활용한다·
적에게 돌이킬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반드시 끝을 본다·
지금의 지천이 거기에 해당된다·
피를 복용해야만 하는 이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들의 손에 사라졌겠으며 또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유없는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갑작스러운 가족의 죽음 갑작스러운 가족의 실종·
누군가 맞이할 슬픔· 어느 누군가의 불면 또 한없는 기다림·
그러니 이런 류는 반드시 끝낸다·
거짓 웃음과 거짓 신뢰를 통해서라도 멸절한다·
누군가에겐 경악·
누군가에겐 비웃음·
누군가에겐 가르침·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깨뜨리면서도 당당한 태도에 점창이 경악하고 정파의 본질을 모르는 지천의 모습에 항마삼협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으며 남궁연과 은앙개 언교운 등에게 있어서는 앞으로 걸어갈 길의 이정표로써 가르침이 되었다·
하지만 지천주에겐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공허함 뿐·
자신이 죽인 각주들의 주검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이제 텅 비었다·
공허함 속에 비로소 냉정을 찾으니 현실이 보였다·
잘못된 결정이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 내 말이 신뢰다· 내 강호의 명성이 약속이다·
천화서고 대공자의 말뜻이 이제 이해되었다·
신뢰는 점창이 받고 있을 뿐이며 그가 얻은 강호의 명성을 되짚어보면 애초에 이 약속은 지천의 멸절을 의미했다·
약속은 애초에 없었던 것·
그럼 내 아들들은?
그러자 웃음이 흘러나온다·
‘처음부터 죽은 것이었거늘·’
어리석게 미련을 가졌다·
점창 장문인의 딸을 죽이려 잡을 때부터 이미 끝난 일이었다· 타협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하다는 따위의 말이 아니더라도 포기했어야 했다·
화경의 중에 이른 각주들을 살리고 후일을 도모했어야 했건만 복수만이 최선의 선택이었건만 어리석게 휘말리고 말았다·
마음이 가라앉으니 지천주의 눈길도 차분해졌다·
머리는 더없이 명료하다·
격동이 사라진 눈길로 지천주가 둘째 아들을 바라봤다·
쌍둥이· 얻지 못할 줄 알았는데 갖게 되어 더없이 소중히 여겼던 아들들·
본래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흉측하게 일그러졌지만 여전히 사랑스럽다·
“···지·”
아버지라는 말조차 제대로 못하는 모습이지만 사랑한다·
만져보자·
손을 내밀어 한 손에 들어올 듯 작아진 아들을 쓰다듬었다·
손길이 젖어갔다· 작별을 감지한 군호의 눈물이 손에 닿아갔다· 울지 마라· 내가 미안하다·
지천주는 손으로 아들의 머리를 덮었다·
내력이 발산된 순간 아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죽었다· 그럼에도 왜 아들이 눈물을 계속 흘리는지 지천주는 알 수 없었다·
지천주는 울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 담담한 시선으로 창 너머 보자기를 바라봤다·
그렇게 큰 아들과도 작별의 인사를 나눈 후 적의 얼굴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새겨두자·
천화서고 대공자 점창파 항마삼협 무산쌍웅 낭인왕 개방 남궁세가 진주언가 모용세가····
하나씩 하나씩 머리에 새겨넣었다·
삶의 미련따위는 없다·
자식을 죽인 순간 자식을 버려두고 떠난 순간 끝·
빈자리는 많다·
빈자리가 크다·
군림의 욕망 끝없는 강함에 대한 갈망 모든 이의 질시어린 시선과 명성 천하제일인의 신검을 취한 기쁨 아들들을 향한 무한한 애정· 그 모든 것이 날아가버린 빈자리 속에 넉넉히 채워넣었다·
마음에 남은 건 오직 하나·
복수·
밤이 오면 모두의 마음에 어둠이 찾아올 것이다·
모두가 공포에 떨게 될 것이다·
시작은 천화서고다·
안휘 북부· 먼 여정이나 그곳이 먼저여야만 한다·
지천주는 행선지를 알리듯 천화서고 대공자를 바라본 후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세 줄기 자줏빛이 지면을 뚫고 튀어나왔다·
카르르르르릉!
방향을 선회하는가 싶더니 번이 앞서고 친과 검령이 뒤따른 채로 다시금 땅을 파고들었다·
후공의 신형은 이미 원래 자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
솟구쳤다가 환명을 연거푸 딛고 허공을 질주한 다음 지면을 빛처럼 돌파해갔다·
‘천화서고인가?’
지천주의 방향은 북동쪽·
너는 결코 닿을 수 없다·
밤이 되기 전 밤이 된다 해도·
남겨진 점창과 천공단이 천공단주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점창 장문인 초광이 신형을 뽑아올리며 외쳤다·
“이곳의 수습은 천공단분들이 수고해주십시오!”
원래 점창의 일이었다·
점창은 지천의 마지막을 대공자에게만 맡기고 뒷짐을 지고 있을 순 없다· 또한 상대는 화경의 극에 이른 고수·
“어····”
“뭐여····”
천공단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점창이 떠나서도 자신들만 덩그런히 남아서도 아니었다·
“형님 신형 본 사람?”
“····”
“····”
“····”
아무도 어떻게 사라졌는지 보지 못했기에 멍해진 터·
“어째 적응됐다 싶으면 더 놀라게 되냐·”
“검은 왜 또 따라다니는데····”
“그러게·”
“점창 장문인 따라갈 수는 있는 거야?”
“그러게·”
걱정은 없었다·
걱정해야 할 이는 지천주·
천공단주가 천하제일이다·
천공단은 어느샌가 그렇게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