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귀주까지·
난화서원 가주 묵선은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침착하자· 냉정을 유지하자·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정리해 보자·’
통천회주는 적·
한편 천공단은 와줬으면 하고 바라온 아군·
한데 적과 아군이 함께 왔다·
둘은 어떤 관계인가?
통천회주는 왜 피투성이인가?
천공단이 통천회주를 제압해 끌고 왔다면 가능한 상황인데 거기에 화기애애는 뭔가?
‘정리가··· 안 돼!’
천재들의 단점이라면 생각이 많다는 것·
생각하지 않아도 될 변수까지 고려하는 탓에 스스로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많은데 지금 가주가 그랬다·
하지만 더 뛰어난 천재는 다르다·
모든 걸 감안하면서도 직관적이고 상황을 단순화하기에 거침이 없다·
묵영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눈으로 확인하시는 편이····”
“아! 그렇구나!”
허우적대던 가주가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그렇게 가주와 가솔들은 마주했다·
안개 너머 무리와 거리는 이십여 장(약 70미터)·
진법에 의해 외부에서는 짙은 안개만 보게 되나 난화서원 측은 선명히 볼 수 있었다·
그런 탓에 묵영의 얼굴에는 이미 환한 웃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버지 천화서고 대공자입니다· 천공단도 맞습니다· 그리고 모용진도 천공단이 되었나 봅니다·”
천룡대전에서 인사를 나눴던 이들이 다수이고 대공자뿐 아니라 죽마고우인 모용진까지 보이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니 의심이 뭔가·
모용진은 당장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졌다·
하지만 가주의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도 모용진을 보았지만 문제는 통천회주였다·
통천회주가 다녀간 것이 간밤이다·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이 짧은 시간에 통천회주의 마음이 바뀌었다고?
천공단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너무 빠른 변화였다·
피투성이는 여전한 의문·
아들은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지만 자신은 가주·
책임이 따르는 위치이니
모든 결정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가 앞으로 세 걸음을 딛었다·
그렇게 진식에 닿은 채로 입을 열었다·
“통천회주 자주 보는군· 그대가 말해보라! 왜 그대가 천공단과 함께 있는 것인가?”
진식에 닿은터라 목소리는 변조되었고 외부로 전해졌다·
통천회주가 바로 답했다·
“천공단에 잡혔소! 내 아내와 아들이 인질이 되었고 나는 칼에 다섯 번 찔리고 절벽 아래로 던져졌다오· 한데 밑에 그물이 쳐져 있었소· 칼에 찔리긴 했는데 지금은 괜찮아졌다오· 하하하 두꺼비가 콱 물고 나니 상처가 아물지 뭐겠소· 신기한 두꺼비였소·”
“···?”
가주는 황급히 한 걸음 물러나 진식에서 벗어났다·
“저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듣긴 했는데 모두 의문만 깊어졌다·
상처를 낫게 하는 두꺼비는 뭐고 인질극은 또 뭔가· 그런데 웃어? 왜 웃는 건가?
물론 그 가운데 묵영은 예외·
묵영은 알 것 같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대공자와 천공단의 행사는 원래 이해의 범주가 아니고 설명한다고 이해시키기도 어려운 것이다·
약왕문에서 돼지를 잡던 천공단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고 천룡대전에서 수만 마리의 벌레들이 대공자의 손아귀로 빨려들던 광경은 잊을 수 없다·
가문으로 돌아와 겪은 바를 설명했을 때도 이해시키는 데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 그러니 지금은 잠자코 있는 편이 나았다·
그때 모용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모용진이 인사드립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저를 믿고 반겨 주십시오·”
그 뒤로 여러 목소리가 줄을 이었다·
“저기요! 안에 모용 형아 없어? 형아 우리 만났었잖아! 나 기억 안 나는 거야?”
“술도 함께 나누고 그랬으면서 이거 섭섭하네·”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성질을 안 내면 천공단이 아니다·
“아니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얼굴 봤으면 됐잖아! 우리가 통천회주에게 포섭이라도 됐을까 봐?”
“설마 우리 모두 역용한 가짜라고 생각하는 건가?”
“선비들은 이게 문제야!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생각 좀 적당히 하고 이제 얼굴 좀 봅시다!”
쏟아지는 불만에도 가주는 변함이 없었다·
“아버지····”
묵영이 채근해도 가주 묵선의 굳은 얼굴은 그대로였다·
이해가 되지 않는 걸 어쩌란 말인가·
가주는 다시 나아가 진법을 딛고 입을 열었다·
“모두 돌아가시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 내일 다시 이야기합시다·”
그 말에 천공단이 발작을 일으켰다·
너무하지 않느냐 뭘 얼마나 생각한다는 거냐 내일이라고 달라지냐며 원성을 쏟아냈다·
심지어 통천회주까지 비난에 가세해 여기 보라며 옷을 들어 상처 자국을 내보였다가 상처 자국까지 말끔히 사라진 걸 새삼 확인하고는 시무룩하게 옷을 내렸다·
내일이라고 달라질까·
후공도 같은 생각이었다·
서운하거나 비난하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난화서원의 대처를 보고 있으려니 천화서고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서문세가와 맞설 당시 천화서고도 마찬가지였다·
얼굴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라는 글자를 표정에 띄운 채로 전전긍긍 생각만 많았다·
천재들은 설득이 안 된다·
설득할 필요가 없다·
그저 보여주면 그만·
“가주! 제가 들어가서 뵙겠습니다·”
“흥!”
가주 묵선이 콧방귀를 뀌고 진법에서 물러나 아들을 향해 물었다·
“저자가 천화서고 대공자인가 보구나?”
“네·”
“너는 어떻게 보느냐? 저자가 우리 난화서원의 연환심무진(連環沈霧陣)을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불가능합니다· 하루가 지나고 열흘이 지나도 불가능합니다·”
묵영이 거짓말했다·
말은 의미없다·
아버지는 눈으로 직접 봐야 한다·
천화서고의 천재는 약왕문주의 암호를 반시진 만에 풀어냈다· 애초에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존재·
그렇기에
원래 해야 할 대답은
‘일각·’
그것도 꽤 길게 잡아서였다·
굳이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
아버지도 겪어보셔야 한다·
그때 가주가 목소리를 높였다·
“천화서고 대공자! 그대가 오늘 안으로 진법을 통과하여 내 앞에 이른다면 내 모든 의심은 씻은 듯 사라질 것이네!”
그 말에 후공이 바로 화답했다·
“내일까지는 안 되겠습니까?”
“후후 내일까지도 좋네·”
“약속하셨습니다·”
그 말과 함께 후공이 성큼 안개 속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천공단과 통천회주의 시야에서 사라졌기에
“흐음 내일이라고 될지 모르겠군·”
통천회주가 근심을 드러냈다·
곁에 있던 항마삼협이 낄낄거렸다·
“통천회주 걱정해주는 거야?”
“흐흐 누가 보면 천공단인 줄 알겠네·”
통천회주가 헛기침을 했다·
“허험 걱정은 무슨· 기다리기 지루해서 그렇지·”
“지루할 일 없어· 지켜 봐·”
“난 일각·”
“난 반각·”
혹독하게 당한 주제에 통천회주는 제법 잘 어울렸다· 힘에 대한 열망이 큰 그였지만 거기에 비례해 힘에 대한 존중의 마음도 지니고 있어 이미 천공단주와 천공단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진법의 안개 안으로 들어선 후공의 안광은 자령안으로 인해 이미 자줏빛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광경은 고스란히 난화서원의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어···?”
“무 무슨···?”
가주를 비롯 모두가 놀라 주춤 물러났다·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이었던 탓이었다·
모두가 예상한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다·
진법을 파악하려 고심하는 모습·
한데 정작 대공자의 모습은 마치 절세고수가 진법을 통째로 완파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후공은 그저 파악하고 있을 뿐·
난화서원이 공들여 설치한 진법을 날려버릴 생각은 없었다·
자령안에 의해 안개의 결이 드러나고 그 너머로 난화서원의 몇몇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볼 수 있는 것과 다가감은 다르다·
이곳은 미로·
벽이 없어도 수많은 벽이 존재한다·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다가갈 수 없다·
계산해 보자·
이내 호신강기를 둘렀다·
소맷자락과 옷자락이 거칠게 펄럭인 것도 잠시 그대로 기운을 외부로 방출했다·
파아아앙!
휘몰아친 기운에 안개가 일시적으로 흩어졌다·
진법 또한 기운의 조합·
허와 실이 있고 벽이 있다·
내뿜어진 기운은 이내 반탄되어 돌아왔고 후공은 일일이 반탄되어 돌아온 기운을 받아들였다· 어떤 방위는 빠르게 어떤 방위는 느리게 각각의 시간차뿐 아니라 가벼움과 무거움까지 분류해냈다·
그 반향을 두뇌가 빠르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오행과 구궁 거기에 뒤섞여 역으로 작용하는 팔괘의 운행까지 분석을 마쳤을 때는
길이 드러났다·
그건 오직 후공의 눈에만 보이는 길·
당연히 일직선은 아니었다· 꼬불꼬불 뒤틀리고 작게 회전할 필요도 있었고 어떤 곳에선 나아갔다가 다시 두 걸음 물러난 다음 발을 내디뎌야 할 자리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눈앞에 떠올라 있기에
후공은 그대로 경로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휘돌고 멈추고 물러남이 있었지만 너무 빨랐다·
“어? 어···? 어····”
모든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가주의 눈에는 그저 뭔가 번뜩이는 것처럼 보였고 멍하니 한마디씩 내뱉던 가주는 한순간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바로 눈앞·
환상처럼 천화서고 대공자가 미소 짓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 어 어떻게···?”
“운이 좋았습니다·”
“우 운이라고?”
“운이 아니면 가주께서 길을 열어주신 것이로군요·”
그럴 리가·
운으로도 될 리 없고 길을 열어준 적도 없다·
그리고 놀랍게도 반각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제야 가주는 이해했다·
아들의 말·
약왕문에서 겪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천룡대전에서의 일·
그러자 통천회주도 이해되었다·
지난밤의 통천회주와 지금의 통천회주가 왜 다른가·
연환심무진을 질주하듯 관통해버린 자가 무얼 못할까·
“대공자····”
“말씀하십시오·”
“환영하네·”
“하하하하 반가운 말씀입니다·”
“하하하하하하 열렬히 환영하네· 부디 내 무례를 용서하게·”
난화서원의 늙은 천재의 두 눈동자에는 진심어린 경외가 어렸다·
*
사람은 변한다·
늘 같을 수 없다·
어떤 계기 어떤 상황 어떤 환경 어떤 다짐을 통해서도 바뀔 수 있다·
통천회주도 그렇게 바뀌었다·
그는 성취를 이뤄 경지가 높아지게 되면서 힘을 증명하고 싶어 했고 그로 인해 태평세월을 보내던 귀주를 뒤흔들었다·
그런 통천회주는 다시 바뀌었다·
“하하하하! 가주 이 노부는 하늘이 된 줄 알았소이다· 한데 더 높은 하늘을 만나게 되니 내가 작은 하늘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었소이다·”
난화서원의 가주 묵선도 따라 웃었다·
그도 오늘 하늘을 본 것이다·
내내 아들의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했는데 오늘 겪어보고서야 자신의 아둔함을 깨달았다·
“하하 저도 같습니다· 맞아봐야 아픈 줄 아니 저 또한 실로 아둔한 자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가주는 이상했다·
분명 지난밤이었다·
산을 불태우겠다던 통천회주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한데 지금은 자신이 통천회주와 함께 웃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 때문이다·
가주 묵선이 술병을 들었다·
“대공자 잔이 비었군· 자 한잔 받게나·”
“감사합니다·”
*
그 한편
천공단은 별채에서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 깔깔대고 있었다·
“오늘부로 귀주까지 먹었네·”
“안휘 산서 섬서 꿀꺽했고 또 어디였지?”
“북해빙궁·”
“아 맞다· 북해가 있었지· 그 다음은?”
“사천도 절반은 우리가 먹었다고 봐야지·”
“운남도 먹었습니다만·”
“하하 그렇지· 점창파도 이미 천공단이나 다름없지· 자 그럼 이제 어디 어디 남은 거야?”
유람을 하고 있는데 겸사겸사 천하제패가 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천공단은 누구 할 것 없이 모가지에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