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최고의 고백·
‘혜야?’
제갈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혜야라니? 무슨 뜻이지? 왜 ‘소저’가 아니지?
이름을 부를 만큼 가까워지고 싶다는 뜻인가?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이건 그런 뜻이 아니다·
제갈혜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건 무례다·
문제는 지금까지 봐 온 대공자가 무례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
대공자는 선이 분명한 사람이다· 자신에게도 천공단에게도 한없이 여유롭고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지만 함께하다 보면 선은 점점 선명해진다·
범접하지 못하고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된다·
누구든 자연스럽게 우러르게 된다·
함께하는 이는 어느 순간 자신이 선 아래 놓인 걸 알게 되지만 묘하게도 그 선 아래에 놓여 있는 걸 좋아하게 된다· 거대한 나무와 같이 대공자의 그늘에서 쉬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선을 오가는 건 오직 대공자·
무시했다가 미소 지었다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면서 대공자는 선을 오간다·
가끔 대공자가 하대를 할 때가 있긴 하지만····
그럴 땐 이유가 있었다·
화산에서 용암이 분출할 때 금적선생을 향해 말하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기에
‘무슨··· 뜻이야?’
제갈혜가 눈으로 물었다·
그 눈을 마주한 후공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
그래 이건 어려운 문제다·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말해주마·
“혜야 조금 늦었다· 깨어나보니 이 몸이었거든·”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동안 본 게 있으니 그동안 스며든 것이 많으니·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렇기에
쩌저저적!
경직되어 있던 제갈혜의 몸에 균열이 갔다·
균열은 심해진다·
쩌저저저저적!
눈은 더할 나위 없이 커졌고 손은 덜덜 떨었다·
제갈혜가 말라버린 입술을 겨우 달싹였다·
“···?”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몸이 갈라지고 흩어지려는 것 같아서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겨우 힘을 냈다·
“백···부님?”
천화서고 대공자가 백부님이었다고?
놀람과 함께 간절함도 따라왔다·
제발 그랬으면·
제발 제발 그렇다고 해줘요·
부탁할게요· 제발 농담이라고 말하지 마요·
농담이라고 말하면 죽일 거야!
“그래· 늦었다·”
그 순간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적!
파앙!
제갈혜가 부서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삽시간에 흩어져 흩날렸다·
모래가 부서져내리며 반짝이듯 빛이 되어 흩어져갔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것들·
지난 날들이 번쩍이며 주마등같이 스쳐갔다·
천화서고 대공자를 처음 만난 날·
한참을 바라보며 미소 짓던 모습·
그때는 왜 그렇게 바라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 이해된다· 그날 백부는 내게 마음으로 인사를 건네고 있었겠지·
또 여우가면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래 그랬어·
어릴 때 만든 ‘여우임’이라고 적힌 조악하고 못난 여우가면이 좋다고 했다·
그때도 백부는 내게 말하고 있었구나·
내가 너의 백부라고·
그때도 내게 마음으로 부르고 있었던 거구나·
혜야 라고·
백부는 내내 그렇게 부르고 싶었던 것이구나·
여우가면을 쓰고 했던 말도 떠오른다·
– 소저 저 어딨을까요? 찾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못 찾을 듯합니다만· 내가 보이는 건 아니겠죠?
그땐 그 말에 그저 웃음을 터뜨렸는데
이제 그 의미가 생각 난다·
그 말은··· 어릴 때 내가 여우가면을 쓰고 백부에게 했던 말·
– 백부님 나 어딨을까? 못 찾겠죠? 하하 아무도 날 못 찾을 거야· 감쪽같으니까·
백부는
엉터리같은 여우가면을 고를 때도 그렇게 내게 말하고 있었구나· 내가 여기 있다고· 이미 네 곁에 있다고·
그리고···
약속도 잊지 않았어·
지켜주겠다고 그 누구도 날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했던 그 말도 지켰어·
북교산에서 추락할 때 원망했었다·
약속해 놓고 왜 나타나지 않느냐고 떠나지 않았으면 날아올 수 있는 거잖아 바보 멍청이 뚱뚱보야 라고 소리쳤을 때 백부는 나타났다· 여우가 되어 나타났다·
백부였던 거야·
천화서고 대공자도 여우도·
– 제갈 소저 날개도 없으면서 왜 뛰어내린 겁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붙잡은 후 그렇게 말했다·
그 상황에 이런 농담을 하는 모습이 백부와 같다고 생각했는데 백부였다·
여우가 되면서 날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하고 가면 속 눈빛이 다정했던 건 백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제 모든 게 이해가 된다·
의아하게 여겼던 모든 것이·
왜 갑자기 멀리 떠난다고 했는지
왜 그곳이 북해빙궁이었는지도 이해가 된다·
나쁜 기억을 잊게 해주려고·
먼 여행길에 마치 오래된 일인 것처럼 만들어 주려고 그랬던 거야·
그렇게 내내 백부는 나와 함께 나누었던 대화를 잊지 않고 있었던 거구나·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던 거구나·
– ···북해의 현음신녀가 북해 빙어가 그렇게 맛이 좋다며 꼭 와달라고 했거든·
– 어디로 가시든 반년 뒤에는 저도 백부님이 계신 곳에 갈 거예요·
– 귀찮구만· 내게 왜 그러느냐 도대체·
전혀 귀찮아하지 않고 멋진 선물을 내게 주었다·
그저 천화서고 대공자가 멋진 추억을 남겨주려는 것인 줄 알았는데··· 백부가 약속을 지켰다·
신검은 원래 주인에게 돌아간 것뿐·
신검들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 건지 무림맹의 밤하늘을 자줏빛으로 수놓던 신검들이 왜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는지도 이해된다·
그렇기에 제갈혜는 더 이상 부서지지 않았다·
똑바로 마주 보았고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더 확실히!
제갈혜가 입을 열었다·
“맹주님··· 제갈혜입니다·”
목이 갈라져 이상한 목소리가 나왔지만 해냈다·
후공은 씨익 웃었다·
이 순간 혜가 자신을 맹주님이라고 부를 리 없다·
이건 그저 마지막 확인·
그날이겠지·
검성이 마화한 날·
그날을 떠올리며 후공이 답했다·
“무슨 일이냐?”
“급히··· 보고 드릴 일이··· 있습니다·”
“바쁘니 한 시진 뒤에 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그래 놓고 들어섰다·
이어지는 대화는
“이리 오너라· 같이 먹자·”
“살쪄요·”
“사람이 통통해야 매력적인 게야·”
“백부님이 매력적이긴 하죠·”
“아니 다행이구나·”
“하하하하하!”
그날처럼 제갈혜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미 얼굴은 눈물 바다·
이 대화를 누가 있어 똑같이 해낼 수 있을 것인가·
제갈혜의 눈물 속에서 보았다·
보이는 건 분명 천화서고 대공자였지만 이제 다르게 보였다· 백부의 뚱뚱한 모습이 겹쳐 보였다· 완연히 백부로 보였다·
그건 후공도 마찬가지·
언제나 그랬다·
펑펑 울며 웃고 있는 제갈혜는 후공의 눈에 언제나 서너 살 꼬마 아이의 모습이었다·
아이의 어릴 때를 기억하고 있는 모든 부모의 눈에 보이는 모습이 그런 것처럼 귀여운 꼬마 여자아이가 있을 뿐이었다·
“백부님 너무 싫어! 정말 싫어! 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 진작 말했으면 좋았잖아요!”
제갈혜가 울며 원망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유는 알고 있다·
누구보다 제갈혜가 그 이유를 이해하고 있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말로는 이해시킬 수 없다· 마음에 젖어들어야 한다·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백부 스스로도 당황했을 테지·
또 모든 무공을 잃었을 테고·
적정 수준의 무공을 회복할 시간도 백부에겐 필요했을 것이다· 삼악을 취한 것도 그 이유·
그럼에도 원망했다·
“앞으로 보고 싶지 않아! 가버려!”
“후후····”
후공은 그저 귀여울 뿐·
한없이 귀여워 웃음이 날 뿐이었다·
어떻게 된 게 이 녀석은 자라나지 않는 것인가·
“크흠 가라면 가야지·”
“얼른 좀 가요!”
“진짜 가야겠군·”
“가지 마! 가지 말라고!”
“하하하하!”
후공이 웃음을 터뜨리자 비로소 제갈혜도 눈물을 훔쳐내며 웃음을 머금었다·
“쯧쯧 푼수가 따로 없구만·”
“제가요?”
“그럼 누굴까?”
제갈혜가 두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하하하 푼수여도 좋아요! 밤하늘을 달려보고 싶어· 백부님이 달려왔던 것처럼 나도 달려보고 싶어! 그렇게 해줄 수 있죠?”
곧바로 후공은 찡찡해졌다·
“귀찮구만· 괜히 말해가지곤·”
“이제 놓아줘요· 제가 달려볼게요!”
“그러든지·”
그 말과 함께 후공이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와아아아아!”
제갈혜가 하늘을 달릴 수 있을 리가·
하지만 달빛을 받은 구름 위로 추락해가는 제갈혜에게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추락하며 탄성을 내지를 뿐·
후공이 그 모습에 혀를 끌끌 찰 때
카르르르르르르릉!
크르르르릉!
크아아아아아아앙!
네 자루 신검이 자줏빛 광채를 뿜어내며 제갈혜를 향해 쏘아져갔다· 순식간에 제갈혜에게 도달해 그 주위를 선회하다 번이 제갈혜의 발을 받쳤다·
척!
번은 떨어지는 속도를 조금씩 완화시키며 밀려났다가 충격이 완전히 상쇄된 후에 허공에 그대로 멈춰 섰다·
“하하하하하하!”
자줏빛 광채를 발하는 번을 딛고 선 제갈혜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걸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오히려 기대 이상·
그리고 보았다·
하늘 길· 밤하늘에 자줏빛 길이 열려 있었다·
눈 앞으로 신검들이 간격을 둔 채 징검다리가 되어 떠 있었다·
“너무 멋져!”
제갈혜가 신형을 날려 쾌를 디뎠고 이어 친을 디뎠고 그다음 검령을 디뎠다· 그다음 기다리고 있는 건 어느샌가 그다음 디뎌야 할 자리에 놓인 번·
하늘에 놓인 징검다리는 움직인다·
계속 앞으로 옮겨져 끝이 없이 딛을 자리가 생겼기에 그야말로 혜는 하늘을 달렸다·
마치 그녀는 자신이 세 살 때로 돌아간 것 같았고
후공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놀아주는 부모는 빨리 지친다·
“혜야 이제 그만 가자!”
“싫어요· 조금 더요!”
하지만 아이는 원래 지치지 않기에 후공은 다시 찡찡해지고 말았다·
***
제갈혜가 돌아왔다·
거의 반시진(약 1시간) 만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제갈혜에겐 짧은 시간이었지만 결과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화설난과 설영에겐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화설난과 설영은 제갈혜를 보자마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 군사는 차였구나·’
‘거절당했어!’
꼭 말로 물어야 하는 건 아니다·
얼굴을 보면 알게 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 운 건지 제갈군사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머리도 다듬는다고 다듬었지만 평소의 단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확실히 선을 그어버린 것이겠지·
얼마나 상심했으면
얼마나 좋아했으면····
“군사····”
“언니····”
화설난과 설영은 위로의 말을 차마 건넬 수조차 없었다·
제갈혜가 그 퉁퉁 부은 눈으로 애써 웃고 있으니 무슨 말이 위로가 될 것인가·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제갈혜가 손을 저었다·
“두 사람 마음 쓰지 말아요·”
“그래도····”
“언니····”
애써 태연한 모습이 안쓰러워 이미 화설난과 설영도 눈물을 글썽였다·
눈물이 눈물이 부르는 법이라지만 제갈혜는 그저 웃음만 나왔다· 도대체 이 두 사람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건가·
“결과가 궁금한 거죠? 결과는 최고였어요·”
“정말인가요?”
“언니 진짜예요?”
제갈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자에게 깨끗하게 차였어요· 완벽하게· 하하하하하하!”
“네?”
“그게 왜 최고···?”
“하하하하하 기분이 너무 좋아요·”
결국 화설난과 설영의 눈물이 터져버렸다·
“군사!”
“언니!”
도대체 얼마나 상심이 컸으면 이렇게 웃는단 말인가·
미쳐버린 건가 싶을 정도여서 화설난과 설영은 제갈혜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하하하하하하!”
제갈혜만 웃었다·
그녀에게 생애 최고의 고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