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풍제는 궁금해졌다·
나는 무엇이었지?
마교 소교주·
이 강호에서 단일 세력만으로 전 강호를 상대할 수 있는 무력 집단의 후계자·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일면일 뿐이고 착각이었다·
정작 온실 속 화초·
외부의 강한 바람과 비를 맞지 않고 자란 온실 속 화초에 불과했다· 온실은 영원할 것 같았고 태풍은 결코 닿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살아왔거늘····
도운연은 이제야 세상을 자각했다·
온실이 뜯겨나가려 한다·
왜 여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아버지보다 위대한 백부가 무림맹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음에 이른 것이 고작 1년 전이거늘·
아버지라고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천마신교의 지난 역사 속 수많은 반란과 역모 권력쟁투를 공부했음에도 잊고 있었다·
사백 년 전에는 신륜염제가 교위를 찬탈했고 오백 년 전에는 두 무리로 나뉘어 치열한 전쟁을 치르기도 했던 것이 교의 과거요 현실에 드리운 그림자인 것을·
충성의 맹세는 한낱 안개였을 뿐·
도운연은 마뇌를 떠올렸다·
그리고 광명좌사 목호와 광명우사 냉선도·
믿었던 만큼 광마혈성보다 더한 분노가 치밀었다·
너흰 틈이 보이면 언제든지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냐!
도운연의 두 눈이 불타올랐다·
한편으로 떠오르는 건 아버지의 모습· 현실의 냉혹함을 보아서일까·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떠올랐다· 조금은 지치고 힘없는 눈빛의 아버지·
‘아버지··· 이 소자가 갑니다·’
손바닥이 패일 것처럼 주먹을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도운연은 분노를 불태웠다·
그 모습에 주위 모두는 힐끔힐끔·
– 대형 쟤 너무 비장한 것 아닙니까?
도운연의 모습은 소리 없는 아우성· 외침만 없을 뿐 절규가 들리는 것만 같은 것이다·
후공도 턱을 문지르며 힐끔힐끔·
– 후후 재밌으니 됐다·
이래야 마교지·
이래야 풍제지·
지금 이 순간부터 운연의 시간은 다르게 흐를 것이다· 이제 운연에게 하루는 백년이 되고 천년이 된다· 다시는 겪어 보기 힘든 매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후공은 시선을 옮겨 저 멀리 아득하게 보이는 산야를 응시했다·
숲속 어딘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이제야 눈치챘기에 놀라운 자가 아닐 수 없었다·
제곤을 상대할 때도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곤륜의 제곤이 혹시라도 폭주하게 되면 운연을 지키려 저놈이 튀어나왔을지도·
그래 풍제라면 그 정도 대비는 해두었을 것이다·
놈이 튀어나오지 않은 건 나서기 전 끝나버렸기 때문일 테고·
짐작 가는 건 둘·
광명좌사 목호와 광명우사 냉선·
둘 중 하나가 아닐까·
후공은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구나·’
웃으며 그 방향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
‘설마····’
광명우사 냉선의 목젖이 출렁였다·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고 만 탓이었다·
‘···나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건가?’
원래라면 말이 안 된다·
서로 간에 산이 몇 개인가·
그리고 근본적으로 지켜보는 자와 관찰당하는 자는 입장이 다르다· 몰래 살피는 자는 집중하고 있고 관찰당하는 이는 주변에 의식이 빼앗기기에 가까이 있다 해도 알아차리는 건 힘들다·
하물며 이 거리라면·
그럼에도 냉선은 자신이 대공자에게 노출된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웠다·
여태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기 때문·
제곤의 뒤를 밟고 있었고 제곤의 마지막 발악도 보았다·
그때
공처럼 부풀어오른 제곤의 폭주 때 뛰쳐나가지 않았던 건 암향야와 천화서고 대공자의 태연한 모습을 보아서였다·
예상대로였고 또 예상 밖이었다·
막아낼 것이라 예상했지만 암향야가 나설 것이란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나선 건 천화서고 대공자·
그 모든 걸 보았기에 지금 손을 들어 보인 행동이 자신을 향한 인사의 의미로 다가오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솔직히··· 경이롭군·’
쾌운을 찾아내고 겁박한 것까지야 그럴 수 있다 쳐도 자신을 찾아내는 건 다른 문제였다· 하루하루 경지가 오르는 것도 아닐 텐데····
누굴까?
천화서고 대공자라는 걸 알면서도 또 묻게 된다·
그런 생각도 잠시
냉선은 왼팔을 내밀었다·
창공을 날던 검붉은 깃털의 새가 팔에 내려앉았다·
마조(魔鳥)는 냉선이 전서를 적고 다리에 묶을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가 이내 날개를 펄럭였다·
한 번 펄럭였을 뿐인데 마조는 어느샌가 까마득히 멀리 나아가 이내 작은 점이 되었다·
‘점점 재밌어지는군· 소교주님과 대공자는 어디까지 돌파할 수 있을까?’
*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마조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늘을 선회하다가 내려앉을 사람을 찾았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번쩍번쩍·
작은 키에 뚱뚱한 대머리 노인·
마뇌라 불리는 이·
햇빛에 반사된 머리가 눈부셨기에 바로 내려앉았다·
전서를 확인한 마뇌가 갸웃했다·
정황은 짧고 엉뚱하게도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길었다·
거의 극찬·
그 대상이 소교주가 아니라 천화서고 대공자라는 점에서 마뇌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흥! 굉장하군·”
광명우사가 누군가를 칭찬한 적이 있었던가?
최근 5년 동안· 그래 있다· 2년 전이다·
소교주가 두 개의 염혼을 생성하는 데 성공했을 때 광명우사는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때를 제외하곤 본 적이 없다·
광명우사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염세적이고 부정적이다·
지존과 소교주를 제외하곤 그냥 다 버러지 취급이었다· 이 세상에 사람인 건 지존과 소교주 외에는 없다고 보는 편·
그런 광명우사가 타인을 극찬하다니·
미쳐버린 건가? 약을 하나?
툴툴댄 것도 잠시
마뇌는 이내 처소로 들어갔다·
“한숨 자자· 잠이 들면····”
침상에 올라 누워 눈까지 감았다·
잠이 들면 꿈속에서 지존을 만나게 된다·
순간 바닥이 열리며 침상이 푹 주저앉았다·
아래쪽으로 쭉 내려간 다음 침상은 반 바퀴 회전· 다시 회전해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땐 마뇌는 없었다·
처억·
지하 바닥에 내려선 마뇌는 어두운 지하 통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불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익숙한 길 눈을 감고도 갈 수 있고 잘 보이기도 했다·
잠시 후 마뇌는 석벽을 마주했다·
이 석벽 너머가 지존의 폐관 동부(洞府)·
지존께서 머물고 있다·
즉 이 통로와 석벽은 폐관 동부의 비밀 문·
그르르르르릉·
석벽이 열리는 모습에 마뇌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볼 때마다 좋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
왜 안 그렇겠는가·
교내 서열은 십 위·
하지만 지존께서 폐관 중이실 때면 이 통로를 통해 지존을 만날 수 있는 이는 교 내에 자신뿐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르르르릉 소리는 들을 때마다 다르게 들린다·
지존의 최측근!
지존의 핵심 심복!
이런 소리로 들린다·
쿠웅·
석벽이 온전히 열렸다·
마뇌가 흥얼흥얼 옅게 콧노래를 부르며 그렇게 한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꾸엑!”
마뇌는 목이 틀어잡혔다·
목을 틀어쥔 손이 천천히 몸을 들어올리니 그제서야 비로소 마뇌는 상대를 볼 수 있었다·
“으헉····”
끔찍한 괴물·
묵빛의 연기가 흐르는 팔과 그 너머로 보이는 머리도 묵빛의 연기가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얼굴은 마땅히 있어야 할 코와 입을 찾아볼 수 없었고 보이는 건 오직 두 눈뿐이었다· 그 두 눈만이 새하얗게 소용돌이치며 응시하고 있었기에
“주 주군··· 접니다· 마 마뇌입니다·”
마뇌는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
자신을 붙잡은 건 주군의 염혼·
왜 주군께서 자신을 향해 분노를 발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순간
[크크크크····]
염혼이 웃음을 발했다·
붉은 입이 생성되면서 붉은 연기를 피처럼 뚝뚝 흘리며 웃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마뇌는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염혼은 본시 눈만 있을 뿐이다·
의식의 연계로 주군은 염혼이 보는 것을 볼 수 있고 염혼 또한 주군의 시선을 공유한다·
염혼이 말을 한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그 결과 마뇌는 끔찍한 생각이 떠올랐다·
“주 주군· 설마··· 염혼이 되신 겁니까?”
그때 염혼이 갸웃·
그 모습에 막 눈물을 쏟으려던 마뇌도 갸웃했다·
“아니었나요?”
[넌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냐!]
염혼이 포악하게 입을 벌리며 말했기에 마뇌는 황급히 목을 움츠렸다·
[쯧쯧 미련한 놈·]
“아!”
그쯤에서야 이해한 마뇌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하하하하하 주군! 염혼의 경지가 오르신 걸 감축드립니다·”
비로소 이해했다·
이번 폐관으로 주군의 염혼은 진일보·
이제 의식의 연계 속 시야만이 아니라 염혼을 통해 주군은 말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런 자각을 하고 보니 염혼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주군 제가 맞춰보겠습니다!”
[후후 좋다·]
“저는 주군의 최측근입니다·”
주군의 새로운 경지를 처음 보는 영광을 받았다·
그리고 주군께서 보여주고 싶어 하셨다·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시고 기다리셨을 걸 생각하니 마뇌는 목이 잡혀 있어도 뿌듯함이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아니다·]
“···네·”
[괘씸한 놈·]
“····”
마뇌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어리석게도 겁먹은 채 염혼이 되신 거냐고 물었으니 얼마나 불경한 것인가·
[들어보자·]
이내 손이 놓인 마뇌는 거대한 체구의 염혼과 마주앉았다· 염혼은 가부좌를 틀었고 마뇌는 무릎을 꿇은 채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하니
[천화서고 대공자····]
염혼이 턱을 괴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네 실로 기이한 자입니다· 곤륜의 탕아인 제곤의 폭주를 홀로 막아낸 것도 놀랍고 쾌운을 찾아낸 것이며 광명우사를 간파한 것도 놀랍습니다· 그가 소교주를 대하는 태도가 호감이 많은 것도 그렇습니다·”
[그보다는··· 당명· 당명의 호칭이 문제다·]
“저 또한 의문입니다· 암향야의 성향은 거만하기 이를 데 없지 않은지요·”
[그래·]
풍제도 그 점이 거슬렸다·
당명은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거만하기 짝이 없어 구대 문파의 장문인들에게도 존대라는 걸 모르고 말을 툭툭 던질 뿐·
그런 당명이 ‘형님’이라고?
이게 가능한 일인가·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기에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주군 혹시 암향야가 약을 한 건 아닐까요?”
분위기를 풀어보려 마뇌가 실없는 소리를 던졌지만 염혼은 무심히 허공에 시선을 둘 뿐이었다·
이윽고 염혼의 시선이 마뇌에게 옮겨졌다·
[마뇌·]
“네·”
[이제 광마혈성과 그 측근들은 의미 없다·]
“물론입니다·”
[그들 중 신기마군은 잔혹하게 죽여라·]
“존명!”
[그리고 수라마정대를 보내 운연을 시험한다· 복마군이 통솔하게 하라· 그들이 어디까지 돌파하는지 보자·]
“존명!”
수라마정대는 서열 12위의 무력대·
복마군은 칠마군 중 하나·
[물러가라·]
마뇌가 예를 취하고 돌아섰다·
자신의 처소로 올라온 후로 일다경 후·
여러 전각에서 각각 북소리가 울렸다·
둥둥둥 둥둥둥!
옅은 소리였고 섬세한 북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나왔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한 전각에서 광마혈성이 머리를 부여잡고 뛰쳐나왔다· 바닥을 미친 듯이 구르면서 피를 울컥댄 것도 잠시 이내 숨이 끊어졌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마뇌가 히죽거렸다·
“내가 너 때문에 한심해 죽는다· 고독(蠱毒)이 뇌에 박힌 것도 모르고 기고만장이면 어쩌자는 건지· 북소리만 나면 죽을 놈이·”
“십 년 전이었나?”
“이십 년 전·”
광명좌사 목호의 말에 마뇌가 정정해주었다·
이십 년 전이었다·
주군의 명에 의해 광마혈성의 몸에 고독이 틀어박힌 시간이· 그리고 그 측근들에게도·
“재밌어! 아주 재밌어!”
“하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