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녹림왕은 고기를 잘 굽는다·
미녀도·
흑전의 보물 중 하나·
미녀도의 미녀가 말을 걸어온 이후 미녀도 우측 상단에 적힌 숫자는 하루하루 줄어들고 있었다·
무림맹에 있을 때도 백혼곡을 상대할 때도·
그리고 마교에 머물고 있을 때도·
후공은 한 번씩 확인했고 자정을 넘기면 어김없이 미녀도의 숫자는 달라졌다·
저 숫자가 다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알 수 없다·
걱정이 되는가?
그건 아니다·
그래도 대비는 해두어야겠지·
미리 알려주어야겠지·
그런 마음 아래 후공은 미녀도를 펼쳐 허공에 둥실 떠올려두었다·
밖은 저녁· 그리고 객방 안·
풍제와 당명 혜의 시선이 미녀도에 닿았다·
“백부님 그러니까 저기 숫자가 달라진다는 거죠?”
백팔십 일·
제갈혜의 눈에는 백팔십 일이었다·
풍제와 당명의 눈에도 마찬가지였다·
후공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숫자만이 아니다·”
그림 속 미인은 말도 한다· 바람 소리가 들리고 구름이 흘러가고 새가 울고 시냇물도 흐른다·
“안력을 높이거나 집중해 보려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마음으로 시선을 분산해 막연히 바라봐라· 그럼 곧 신기하고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랬을 때 후공은 보았다·
조금씩 이동하는 구름·
바람에 대나무 숲이 흔들리던 모습·
한순간 그림 속 여인이 터뜨린 웃음소리와 긴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여인과 눈이 마주쳤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당신은 내 초대에 응해주실 건가요?
물론이라고 답했었다·
– 좋아요· 기대하죠· 나도 궁금하네요· 나를 볼 수 있는 그대가 누구인지·
초대의 말을 남긴 여인이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켰을 때 그림 위쪽에 있던 숫자가 바뀌었다·
백팔십 일에서 백칠십구 일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백이 일·
아우들과 혜도 볼 수 있을까· 만약 보게 된다면 미녀의 초대를 받게 될까? 초대를 받는다면 바뀌게 될 숫자는 나와 같은 날일까 아니면 백칠십구 일일까?
같은 날이었으면 좋겠다·
함께할 수 있을 테니·
그런 기대감으로 후공은 기다렸다·
순식간에 일식경(약 30분)이 흘렀다·
“슬슬 뭔가 보이기 시작할 텐데? 바람 소리가 들린다든가·”
“아···!”
뜻밖에도 먼저 반응한 건 제갈혜였다·
“오호! 혜야 드디어 뭔가 보이느냐!”
“아니요·”
“그럼?”
“눈이 아파서요·”
혜는 눈을 이제야 깜박인다면서 연신 질끈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후공은 찡찡·
이내 두 아우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너흰?”
“아직·”
“전혀·”
시간은 더 흘렀다·
다시 일식경 그리고 그로부터도 다시 한 시진·
어느새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어때?”
“····”
“····”
풍제와 당명은 묵묵부답·
난감해하는 표정만 띨 뿐이었다·
‘이걸 못 본다고?’
후공은 더 난감했다·
방법까지 알려주었는데 왜 이걸 못 본단 말인가·
시간을 더 주어야 하나? 아니 시간은 충분했다· 이쯤이면 시간이 더 지난다 해도 가망이 없다고 봐야 했기에
“다 나가·”
후공은 나직이 축객령을 내렸다·
꺼지라면 꺼져야 한다· 마교 교주와 사천당가주 그리고 전직 무림맹 군사가 누구는 헛기침을 하고 또 누구는 구시렁대면서 나간 후
‘묘하구나·’
후공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왜 못 보는 건가?
물론 미녀도를 간직하고 있던 흑전주도 보지 못했다· 그는 기이하다고만 했었다· 하지만 풍제와 당명이라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후공은 기분이 묘해졌다·
알 수 없는 일·
걱정은?
없다·
미녀도를 꺼내 볼 때면 여인을 바라볼 때면 유쾌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기대는 어긋났지만 시간 낭비는 아니었다·
모두 의미를 알아들었을 테니·
후공의 짐작대로였다·
풍제와 당명은 의미를 이해했다·
‘시간을 기억해두자·’
‘이 밤이 지나면 남은 날은····’
농담이나 장난일 리 없었다·
농담이라고 하기엔 너무 긴 침묵의 시간을 보냈고 내내 대형의 눈빛은 기대에 차 있었다·
무엇보다 대형은 특별한 존재·
그건 제갈혜도 같았다·
‘이제 백일 일·’
자신의 객방으로 돌아와 날짜를 마음에 새겼다·
백부는 위대한 존재이므로 함께 다니게 되면서 특별함을 보았기에 기억해두었다·
그 밤
그렇게 모두가 생각이 많아진 밤·
생각이 멈추지 않는 밤·
색관조는 금섬과 함께 밤하늘을 질주했다·
아무도 볼 수 없었다·
**
깊은 밤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이들은 무림맹에도 있었다·
모용곽과 요로선인·
바둑판을 중간에 두고였다·
“이거 이거 바둑 두시는 분 어디 가신 걸까요?”
“콜록 콜록!”
“여어~ 여기 계셨군요· 저는 또 주무시러 가신 줄 알았습니다·”
“콜록 콜록 콜록!”
맹의 군사 모용곽의 조롱에 요로선인은 연신 헛기침을 남발했다· 바둑판은 온통 점령군· 요로는 좀처럼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엎을까 말까 엎을까 말까·’
이 판을 지면 3전 전패·
‘엎자!’
바둑판을 엎고 요로가 깽판을 치려 할 때였다· 뜻밖에 소리가 들려왔다·
[뻐꾹 뻐꾹·]
“응?”
요로와 모용곽이 바라볼 땐 색관조와 금섬이 창가에 내려앉았다·
[뻐꾹! 뻐국! 뻐어어어꾹!]
[큭큭큭!]
“오호!”
요로선인과 모용곽이 반색했다·
“콜록 콜록! 대공자가 온 게로구나·”
[아니랍니다·]
“그럼?”
색관조가 안으로 들어와 모용곽의 머리에 내려앉았다·
[주인님께선 천화서고로 돌아가시는 중이세요·]
“근데?”
[전하라 하셨어요· 무슨 일이 생겨도 연락하지 말라고요· 하늘이 무너져도 귀찮으시대요· 까르르르르르르르르! 주인님은 늘 귀찮아하셔!]
“그래?”
[네 그게 전부에요· 근데 바둑 두고 계셨나 봐요? 으음 가만 보자·]
색관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다 이내 소리쳤다·
[찾았다! 신의 한수!]
내려와 바둑돌 하나를 집어 한 지점에 과감히 착수했다· 그러곤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별을 고했다·
[우린 갈게요· 너무 고마워할 건 없어요! 까르르르르르르·]
[그윽 그윽!]
웃음소리는 어느샌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렇게 다시 바둑판을 바라본 요로선인은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것일까?
‘망했네·’
이미 패색이 짙었는데 색관조의 한 수로 아예 멸망·
대마가 죽었다·
“콜록 콜록 쿠에에엑 콜록 콜록!”
“하하하하하하!”
모용곽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바둑판을 정리하고 각자 처소로 돌아가는 길·
두 사람은 대공자를 떠올렸다·
백혼곡을 끝낸 이·
천하제일인의 신검을 다루는 이·
그가 전해왔다·
천화서고에 있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는 말이었다· 기억해두었다·
**
어느샌가 호북 중부·
늦겨울의 아침을 질주하는 세 사람은 오늘이 가진 의미를 되새기고 있었다·
‘오늘·’
‘오늘이 그날·’
‘백부님의 날·’
미녀도의 날은 한참 멀었다·
오늘은 다른 의미·
천하제일인이 떠난 날이었다·
원래라면 기일·
하지만 떠난 적이 없고 모습만 바뀌었으니 오늘은 두 번째 생일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축배를 들며 의미를 새겨야 하지 않을까·
그런 마음에 청했다·
“대형!”
“응?”
“오늘은 기쁜 날이니 이 하루는 특별한 요리와 비싼 술을 항아리째로 마시며 취하는 건 어떻습니까?”
“왜?”
“허허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당명이 너털거렸다·
물론 후공은 알고 있었다·
오늘은 환혼된 날·
천화서고의 대공자가 된 날이다·
하지만 후공은 기쁜 날이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내겐 기분 좋은 날이 아니다·”
“····”
당명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풍제와 제갈혜도 같은 상태·
그저 내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생각을 못 했다·
대형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했다· 천하제일인의 입장에서 오늘이 기쁜 날일 리가· 분노의 날로 기억될 날이다·
아니나 다를까 후공이 씩씩거렸다·
“오늘은 최악의 날! 내가 애써 가꾼 멋진 몸을 강탈당한 날이 아니냐! 난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
멋진 몸이라기엔····
앉을 때마다 의자가 매번 삐그덕거렸····
분명 제 눈엔 멋져 보였지만····
풍제와 당명 제갈혜가 내심 반박할 때 후공이 외쳤다·
“그런 의미에서 마시고 죽자!”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세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은 천하제일인이 돌아온 날·
다른 모습이 된 날·
하지만 달라진 건 없어 보인다·
그의 말투 언행 그리고 유쾌함은 그대로였기에 한순간 지금 모습이 원래의 모습으로 보일 정도였다·
“백부님 어디로 갈까요?”
“내가 앞장서마·”
“백부님께서요?”
“그래 이 부근에 고기를 잘 굽는 놈이 살고 있거든·”
**
호북 장귀산·
녹림총채에선 대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천하각지의 녹림십팔채의 채주들과 부채주들이 도열했고 녹림총채의 오백 수하들도 함께한 가운데
녹림왕은 연설 중·
“지난 밤 우리는 제사를 지냈다· 누구의 제사였느냐!”
긴 머리에 부리부리한 눈·
호랑이 가죽을 두른 기골이 장대한 녹림왕의 물음에 모두가 입을 모아 답했다·
“후공!”
“드높은 이름!”
“천하제일인!”
온 산야가 쩌렁 쩌렁 울렸다·
잦아들길 기다린 녹림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할 만큼 했다· 천하제일인이 떠나고도 1년· 마치 천하제일인이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소를 키우며 지냈고 제사도 지냈다! 이 정도면 최선을 다한 것 아니냐!”
“옳은 말씀이십니다!”
“녹림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쩌렁 쩌렁!
“저기 저 날아간 산봉우리를 봐라·”
녹림왕이 손을 들어 좌측을 가리켰다·
원래는 산봉우리였던 곳이나 지금은 산악보다 큰 거인의 칼날에 잘려나간 듯 매끈하게 썰려나간 지점이었다·
“후공이 이렇게! 응 이렇게! 손을 들어 긋자 저 지경이 되었다· 소를 안 키우면 저렇게 된다는데 내가 소를 안 키울 수 있었겠냐! 없었겠냐!”
“키워야 했습니다!”
“내가 약한 게 아니다! 우리 녹림이 약한 게 아니다! 상대가 나빴을 뿐 상대가 강했을 뿐! 하지만 이젠 아니다· 후공은 떠났고 떠난 지도 1년이 지났으며 우리도 할 만큼 했다· 지난밤에는 제사도 지냈으니 나 녹림왕은 선언한다! 이제 오늘부터는 본래의 우리 모습으로 돌아간다!”
“녹림의 모습으로!”
“본래의 모습으로!”
“소는 그만! 소고기는 그만!”
모두가 외치니 산은 다시금 쩌렁쩌렁·
그 모습을 바라보는 녹림왕은 화통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제 소는 지긋지긋하다·
이 강호에서 소고기를 잘 굽는 게 무슨 소용인가·
칭찬해줄 후공도 없는데·
“으하하하하하하! 오늘부터 녹림은 다시 표물을 약탈하고 강호에 적극 개입한다· 그동안 녹림을 떠올리면 소였지만 이젠 모두가 공포를 떠올릴 것이다! 녹림은 모두의 두려움이 될 것이다! 으하하하하하하하! 으하하··· 자 잠깐! 저건 뭐냐?”
웃던 녹림왕이 놀란 눈이 되어 우측 하늘을 바라봤다·
모두가 그곳을 바라보았다가 동요했다·
처음 보는 괴생물체!
그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묵빛 연기가 사람의 형태를 한 채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고 있으면 술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내
쿠웅!
녹림왕 앞에 내려섰다·
눈이 있고 입도 있었다·
눈은 소용돌이치고 벌어진 입에서는 핏물이 흐르듯 붉은 연기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녹림왕은 여태껏 이런 괴생물체를 본 적이 없었고 흘러나오는 파괴적인 기운도 처음이었다·
“누 누구세요?”
바로 공손해졌다·
누구는 누구인가·
풍제의 염혼이다· 의식이 공유되니 실상은 풍제·
염혼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녹림왕 네놈이 그렇게 고기를 잘 굽는다고?]
“제 제가요?”
[아니야?]
“어 어디에서 그런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아니야?]
두 번째 아니야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터져나왔기에 녹림왕도 크게 외쳤다·
“정확히~ 알고 오셨습니다!”
[크흠····]
“왜 그러시는지·”
[조금 미심쩍은데?]
염혼이 갸웃하자 녹림왕은 기분이 크게 상했다·
“제가 제일 잘 굽습니다! 천하제일인께서 인정해주셨습니다· 제가 천하에서 제일 고기를 잘 굽는다고요· 믿어주십시오오오오오오!”
녹림왕은 한쪽 무릎을 굽히기까지 하며 답했다·
[그래?]
“네! 틀림 없습니다!”
방금 전까지 모두의 두려움이 되자고 선언했던 녹림왕이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