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6화· 오행을 이루다·
그와 같은 광경에
‘경이롭군·’
후공은 솔직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엽불의 공능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귀기를 두른 놈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경이롭다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단예령이 방비하지 않았음인가·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방비했다· 목이 잡히기 전 단예령은 다가오는 손을 떨쳐내려 했고 복부를 파고드는 손길에는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푸른 기운은 검게 보일 정도로 짙어졌다· 그렇게 목극이 미칠 듯이 일어나 저항했다·
그럼에도 소용없었다·
엽불은 변화를 일으키지도 않은 채 그대로 붙잡았고 또 꿰뚫은 터·
어떤 사기(死氣)이고 어느 정도의 귀기(鬼氣)인가·
또한 이걸 과연 무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그리고 나는····
엽불을 상대할 수 있는가?
자문해 보았을 때 답은 모호했다·
확신할 수 없다·
비록 본래의 경지를 찾았지만 버티는 것이 최선일지도·
그러니 더 나아가야 한다·
지금보다 더·
새로운 경지로·
‘그러기 위해선····’
한편 온 세상은 경악에 물들어갔다·
‘저 여인은 누구?’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은 본 적이 없어·’
세상천지 각자가 선 곳에서 단예령을 본 이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놀랐다가 여인의 목이 꺾이고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는 광경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 무슨····’
놀라움이 큰 건 그녀가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일어났고 이유도 없이 슬퍼졌다·
아름다움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고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의 눈빛에 담긴 당혹스러움과 슬픔도 찰나의 순간이지만 마치 영원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눈빛이 바로 앞에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누군데?
천공단조차 의문에 사로잡혔다·
단주를 따라 천하를 휩쓸고 다녔지만 여태 본 적 없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의문만 품었다·
천공단 누구도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없었다·
지금 단주를 보고 있기도 한 것이다· 단주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떤 동요도 없이 단주가 그저 무심히 바라볼 뿐이니 천공단 또한 마땅히 죽어야 할 이가 죽어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저 여인의 정체가 궁금할 따름·
그런 모두의 시선 속에
단예령은 황망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왜··· 왜 내게?’
천 년이다· 천 년의 재회인데····
울컥울컥 피를 게워내며 단예령은 엽불을 바라봤다·
그동안 오늘의 만남을 얼마나 많이 상상했는지 모른다·
족히 수만 번이었다·
사형이 지어 보일 다정한 미소· 그의 부드러운 손길· 사형은 어떤 말을 내게 건넬까· 나는 그에게 어떤 말을 건네면 좋을까·
허리를 감싸 안는 손길을 꿈에서도 상상했다·
그 손길에 자신이 물처럼 녹아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다가온 건 난폭한 죽음의 손길·
이 만남을 위해 천 년을 살아왔는데 이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이었다·
치유는 기대하기 힘들다·
누군가 자신을 치유해주길 바라고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의 상태는 누구도 치유할 수 없다·
애초에 자신이 취한 오행의 목극의 공능 중 하나가 치유·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 뼈가 부러져도 내부 장기가 손상되어도 급속히 회복된다·
살은 돋아나고 뼈는 새로 자란다·
한데 부러져 바스러진 뼈들은 붙지 않고 그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목을 찔러오고 있었다· 관통된 복부는 여전히 뚫린 채 아물지 않는다·
사형이 내뿜은 검은 기운이 머문 채 치유를 막고 있었다·
‘사형···· 왜 날 잊었나요? 나를 봐요· 사형을 기다리기 위해 회영부주가 되어 천 년을 버텨왔는데···· 제자의 패륜까지 참아낸 나를··· 왜···· 그러니 바라봐요· 제발··· 정신 차려요· 지금이라도··· 나를 알아봐 줘요·’
그렇게 단예령이 한없이 바라봤지만
엽불은 관심이 없었다·
바라보지도 않았다·
엽불에게 단예령은 무생물과 같았다·
괴상한 년이기도 했다·
사형이라니· 자신이 주란이라니·
모습이 같다고 그 사람이 되는가·
믿는다고 그 사람이 되는가·
모습이 달라져도 알아볼 수 있다·
그저 느껴진다·
그 사람만의 향기가 있다·
마음이 맡을 수 있는 향·
저기 저곳·
기이하게도 붕대를 휘감고 있는 여인이 주란·
드러난 두 눈빛만으로 엽불은 주란을 알 수 있었다·
먼 과거 사랑했던 여인·
보고 있는 중에도 보고 싶은 감정이 샘솟고 돌아서면 그 순간부터 그리워지기 시작하는 여인·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 느껴지는 안도감 충만함 아련함· 그런 기억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기억뿐이다·
한낱 먼지 같은 기억이요 감정이다·
사랑·
사랑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헛된 환상이다·
영원히 살 수 없기에 인간이 종족 보존을 위한 수단으로 품게 되는 감정·
엽불의 눈에 비친 주란은 그런 존재였다·
특별할 게 없다·
수많은 사람 중 하나·
똑같은 귀기의 재료·
그리고 저 처연한 눈빛이 말해 온다·
방해가 되는 존재 중 하나라고·
엽불은 나직이 불렀다·
“주란·”
그의 음성은 기이하게 울려 나왔다· 마치 동굴 안에서 말하는 것처럼 깊게 공명하면서 멀리 퍼져 나갔다·
주란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단예령을 바라보고 있었고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제자와의 천 년의 악연이 비로소 종지부를 찍은 것에 회한이 밀려들었다· 한데 왜 후련하지 않는가·
그만큼 세월이 길었기 때문일까·
서우가 말한 대로 되어서일까·
예지의 능을 지닌 서우가 말한 대로 제자가 죽어가고 있고 서우가 보았던 대로 그런 제자를 자신이 바라보고 있었다·
삶이란 정해져 있는가·
서우를 볼 때면 그런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만약 정해져 있다면····’
그 결과가 사형을 막은 것이라면 좋겠다·
그런 것이면 좋겠다·
주란이 엽불을 바라봤다·
“사형 날 기억하고 있군요·”
“넌 잊은 것 같군·”
“저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요·”
귀기를 이해하게 되면서·
두려워서·
이런 만남이 될 것 같았기에 잊을 수 없었다·
“한데 넌 왜 내게 오지 않느냐· 왜 그곳에 서 있느냐·”
“그 답은 사형이 찾아야 해요·”
수많은 시체들· 해골들· 지독한 악취·
수십만에 달하는 죽은 자들이 일어났다· 이곳에 있다·
그러니 답은 사형 스스로 찾아야 했다·
귀기의 집합체에 삼켜져 존재마저 희미해진 사형이 스스로 일어서야 했다·
“주란 내게 오너라· 내 곁으로 오거라·”
갈 수 없다· 갈 수 없다·
“난 널 그리워했다· 모든 날 동안 널 기다렸고 오늘 보았다·”
동굴처럼 울려 나오는 목소리는 다정했다·
과거 어느 땐가는 사무치도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고 언제까지나 듣고 싶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주란은 마음 가득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아니다·
아직 사형이 아니다·
이 다정함은 분명 과거의 사형·
자신의 전부였던 남자·
다정하지 않을 때조차 사형은 자신의 전부였다· 어떤 시련이 와도 사형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고 누군가 그대의 열망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사형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니다·
사형이 아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구별하지 못했다· 엽불의 목소리만으로 온 천하는 잠시 매료되었다·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왜 눈물이 날 것 같지? 왜 심장이 요동치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오가는 대화를 온 세상이 귀담아들었지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후공은 손을 뻗었다·
단예령을 향해서였다· 울컥 피를 토해내면서 천 년의 삶의 마지막 지점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단예령이 눈 깜짝할 사이에 후공의 손아귀에 빨려들었다·
바스러져 흐느적거리는 목이 다시 붙잡힌 단예령이 눈을 부릅떴다· 목이 아파서는 아니었다· 왜? 왜 이 상황에서 날? 놀란 단예령의 눈동자에 후공의 얼굴이 가득 담겼다·
‘설마?’
천화서고 대공자· 너는 날 구할 셈이냐?
그런 자비는 필요 없어!
내게 필요한 사람은 사형뿐·
온 세상도 보았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여인을 끌어당겼어!
단주가 저 여인을 구하려는 건가?
큰아이가 왜? 알고 있는 사람이었나?
이제까진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음인가?
그런 물음에 후공이 답했다·
단예령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세상의 몇이 잠깐 눈을 깜박였을 때였다·
화르르르르르르르·
화극의 지옥불에 단예령이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그건 마치 환상을 본 것만 같았다·
단예령은 자신이 소멸되는 걸 느낄 새도 없었다· 보고 있는 이들조차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불 불길····’
‘거 거짓말!’
‘사 사라졌어!’
불길이 피어났을 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인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보고 있었음에도 모두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불길이 잦아들었을 땐 잿가루조차 보지 못한 것이다·
여인이 사라지고 불길조차 사라졌을 때는 녹색의 광휘가 맴돌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아름다운 여인은 어디로 갔고 불길은 어떻게 된 거지? 또 녹색 광휘는 뭐야!
녹색 광휘는 오행의 정화 중 목극·
작은 구슬 형태가 아닌 광휘로 떠돈 건 단예령이 극의를 넘어 각인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꽈리를 틀듯 맴돌던 녹색 광휘는 한순간에 후공의 손아귀로 빨려들었다·
그렇게 오행의 마지막 빈자리가 채워진 순간
쿠콰과과광!
후공은 폭발했다·
후공의 두 눈이 자줏빛 광채로 폭주하니 그 광채가 귀무를 뚫고 먼 하늘까지 뻗어 나갔다· 그 광채가 짙어지고 번지니 후공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
동시에 목생화(木生火)의 이치에 화극이 발현하면서 주위가 붉게 물들어갔다· 금극도 호응하면서 전신에서 번개가 쳤고 천둥 소리도 터져 나왔다·
쿠르르르 쿠콰쾅!
천둥과 함께 폭풍이 일었다·
흙과 돌들이 떠오르고 수극은 수생목(水生木)하면서 목극이 가공할 속도로 각인되어 갔다·
삼악은 미칠 듯이 요동치면서 더할 나위 없이 증폭되어 갔다· 자연경의 중을 지나 극을 향해 나아갔다· 세상이 작아 보인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들린다· 의식의 증폭에 한꺼번에 세상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한 건 후공이었고 또 엽불이었다·
‘조금 더·’
아직이다·
각인을 이루어야 한다· 각인까진 고작 한차례의 호흡·
후공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고
‘놀랍군·’
엽불의 붉게 타오르는 눈은 웃었다·
예상을 뛰어넘은 터· 성취가 느껴지기도 했다· 이 짧은 순간에 눈이 부실 정도의 성취를 이룰 것이라곤 그조차 짐작하지 못한 것이다·
천 년의 세월로 완성한 자신의 귀기에 버금간다·
아니 위협이 될 정도·
하지만 염려는 없었다·
괜찮다· 놈의 약점은 명확하다·
그 순간 후공은
마지막 한 호흡에 목극이 각인·
후공이 엽불을 바라본 순간
주인의 의지에 신검들이 호응하며 네 줄기 자줏빛 용이 되었다· 울부짖으며 엽불을 향해 쏘아졌다·
천지를 찢을 듯한 굉음이 함께했다·
다가오는 네 마리 용을 엽불이 보았기에 온 세상도 볼 수 있었다·
‘용이야!’
‘용이 내게 다가와!’
마치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것 같았기에 온 세상은 질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