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월토기 (1)
그날 저녁·
용화청이 별채로 향했다·
장서각을 이용하고 싶다는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쉴 틈을 주지 않는구나·’
용화청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신없이 바쁜 하루여서 심신의 고단함이 말로 할 수 없었거늘 천공단이며 대공자는 부지런해도 너무 부지런하다 싶은 것이다·
별채에 도착하자 대공자는 이미 갈 채비를 마친 채 뜰에 나와 있었다·
“바로 가시면 되겠습니까?”
“네·”
“그럼·”
용화청이 천공단 쪽에도 가볍게 목례를 건넨 후 그렇게 걸음을 옮기려할 때였다·
뜻밖에도 귓가로 한줄기 전음이 파고들었다·
– 내색하지 말고 듣기만 해라·
‘금적선생?’
갑작스러운 전음에 용화청은 하마터면 흠칫해 고개를 돌릴 뻔한 걸 겨우 참아냈다· 애써 침착을 유지하고 의문 속에서 걸음을 옮겼다·
‘내색하지 말라니?’
곧바로 전음이 이어졌다·
– 네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장서각으로 안내를 마친 후 곧장 돌아오거라· 단주에겐 비밀로 해야 한다· 결코 낌새를 채게 해선 안 된다· 들키기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라·
용화청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천화서고 대공자 몰래 은밀한 전음이라니· 아니 그보다 놀라운 건 선생의 전음에 묻어나 있는 대공자에 대한 ‘적의(敵意)’였다·
‘금적선생 쪽이 어찌 대공자를 경계한단 말인가·’
충분히 정신없는 하루였거늘 아직 끝난 것이 아닌 모양·
용화청은 자신의 크고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가 대공자에게 들리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대공자와 천공단의 결속이 단단해보였던 건 착각이었을까·
슬쩍 용화청은 곁눈질로 대공자를 바라봤다·
대공자는 태평한 안색·
하지만 금적선생의 전음이 자꾸 떠올라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대공자의 모습이 어쩐지 더 기이하고 사이한 느낌을 주었다·
이윽고 장서각 앞에 도착했다·
용화청은 간단히 주의사항을 설명한 후 물었다·
“대공자 오래 머무십니까?”
“잠은 돌아가서 자야죠· 자정쯤 나올 생각입니다·”
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가벼운 농담조임을 알면서도 용화청은 긴장한 탓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부디 영감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허허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각주····”
대공자가 말을 흐렸기에 용화청이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순간 야릇한 미소가 대공자의 입가에 번졌다·
“안색이 안 좋군요· 좀 경직되어 보입니다· 괜찮은 겁니까?”
“제가요? 하하 아닙니다· 오늘 일이 많아 심신이 고단해서 그리 보였나 봅니다·”
용화청은 최선을 다해 껄껄거렸다·
“그렇습니까? 혹시 무슨 이야기를 들었거나 제게 숨기고 있는 건 아니고요?”
“제가 듣거나 숨겨야 할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까?”
갸웃하며 되레 묻자 대공자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표정 없는 무심하기 짝이 없는 시선·
그 시선이 한동안 머무른다·
단지 그뿐인데
용화청은 왜인지 몸이 뻣뻣해지고 불안해져 눈을 회피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대공자가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됐습니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내 대공자가 장서각 안으로 들어가자 용화청은 맥이 풀리고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뻔했다·
개구리가 된 느낌이다·
뱀을 마주한····
일전에도 안법에 당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은 그때와는 또 달랐다· 그저 무심히 바라보는 것뿐인데 스산함이 말로 할 수가 없었다· 전신의 신경이 움츠러들었다·
‘젠장····’
왜인가·
대공자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느낌을 받는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만남이 잦아질수록 대공자가 커져 보이는 건 무슨 이유인지· 마치 어른과 마주한 아이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눈길을 받을 때면 해부되는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다 아는 듯하고
그 앞에서 숨길 수 없을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금적선생이 보인 대공자에 대한 ‘적의’·
용화청은 장서각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신법을 펼쳐 별채 쪽으로 향했다·
별채에 당도하자 천공단의 분위기가 이전의 날들과 사뭇 달랐다· 평소의 천공단의 자유분방함은 온데간데없고 저마다 심각한 낯빛을 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안에서·”
용화청은 얼떨떨하니 안으로 들어가 천공단과 둘러앉았다·
먼저 입을 연 건 금적선생이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천화서고 대공자는 위험한 인물이다·”
“네?”
“그는 이미 문서해독을 마쳤다·”
“무 무슨··· 그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용화청이 눈을 부릅떴다·
동공이 멋대로 흔들리는 걸 진정하기 힘들었다·
‘말도 안 돼·’
충격이자 공포가 엄습했다·
오늘로 고작 3일이다·
3일 만에 문서해독을 끝냈다는 것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그걸 대공자가 숨기고 있었다 싶으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또 그것을 천공단이 파악하고 자신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상황이라니·
‘도대체 내가 지켜본 3일은 무엇이었다는 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작 대공자와 천공단은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대공자는 아닌 척 해독한 사실을 숨기고 있지만 우리 눈을 속이진 못했지· 너는 그가 왜 갑자기 장서각에 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하느냐?”
“설마?”
용화청이 마른침을 삼켰다·
금적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생각한 것이 맞다· 약왕문주가 말한 보물이 장서각에 있기 때문이다·”
“헉!”
용화청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암호문서가 ‘보물’을 칭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암호의 근원이 아버지라는 것까지 천공단이 알고 있다는 건 문서가 해독되었다는 확증이었다·
“우리가 왜 갑자기 멧돼지를 잡고 그 소란을 피웠을까·”
“대공자를 속이기 위함이었습니까?”
“그래 허술하게 보여야 했다·”
너무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 용화청은 머리가 어질거려 정리가 쉽지 않았다· 오늘 하루 벌어진 일들도 아직 머릿속에서 정돈되기 전인데 모든 것이 뒤집혀버렸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보물을 독차지하려 한다
천공단은 그걸 막아서는 구도·
이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대공자놈이 장서각에서 나오는 순간 덮칠 것이다· 약왕문도 준비하거라· 어떤 형태의 보물인지 모르나 놈은 분명 찾아 나오는 것일 테니·”
호칭마저 이제 ‘놈’으로 변했다·
“천화서고 대공자의 무공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흐음····”
금적자가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그는 무서운 자다· 본신의 힘을 숨기고 있지· 하지만 우리 전부가 힘을 다한다면 제압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 그 정도란 말입니까?”
용화청은 숨이 턱 막혔다·
이미 몸소 체감했고 그래서 범상치 않을 것이란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공단 전부와 맞설 수 있다니 실로 놀라운 경지가 아닌가·
“각주 걱정할 것 없소·”
“정의는 언제나 승리하는 법이니·”
위로의 말을 건넨 건 무산쌍웅이었다·
용화청이 멍하니 흉악한 인상의 무산쌍웅을 바라봤다·
평소와 달리 ‘클클’거리지 않고 말하는 것이 낯설었다· 또 한편으로는 험한 얼굴로 정의 운운하니 이상하게 든든하기도 했다·
순간 뇌리로 한 생각이 떠오른 용화청이 질문을 던졌다·
“혹시 난화서원의 묵공자를 호위한 의도가····”
무산쌍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왕문 입장에선 오해하여 붙잡아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소· 아니나 다를까 약왕문이 뒤쫓더구려· 난화서원의 묵공자는 무지렁이일 뿐 아무것도 모르오·”
“아····”
용화청은 마음이 급해졌다·
서둘러 형님께 보고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때 은앙개가 입을 열었다·
“장서각에 감시의 눈은 있습니까?”
“물론이네· 2층으로는 진법의 생문을 통해서만 진입이 가능하고 진법 너머로 둘을 붙여놓았네· 1층에서는 알아차릴 수도 존재여부도 알 수 없지·”
“그렇군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용화청이 몸을 일으켰다·
“대공자가 자정쯤 나온다 하였으니 미리 그 전에 준비를 마치고 돌아오겠습니다·”
용화청이 바로 별채를 빠져나갔다·
용화청이 빠르게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자 금적자가 천공단을 향해 돌아서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나 좀 그럴싸해 보이지 않더냐!”
“엄청 진짜 같았어요!”
소천개가 엄지를 추켜세우자 금적자가 기분이 좋은지 수염을 느긋하게 쓰다듬었다·
그때 항마삼협이 입을 열었다·
“각주가 미친놈처럼 달려가는 걸 보니 제대로 먹히긴 한 것 같은데 영 기분이 언짢네·”
“왜요? 먹혔으면 된 거 아니에요?”
묘빙빙이 물었다·
항마삼협이 오만상을 찡그렸다·
“그게 아니라 형님을 무시하는 건 아닌데··· 솔직히 그렇잖아· 우리 전부와 맞설 수 있다는 말은 사람 새끼면 안 믿어야 하지 않냐는 거지· 뭔 개소리냐고 장난하냐고 의심해야 맞지· 무슨 대가리가 장식용인 양 아무 말이나 덥석덥석 물어 아주·”
곧바로 무산쌍웅이 인상을 구겼다·
“듣고 보니 좀 열받는군요·”
“아주 몰상식한 놈이 아닌가!”
“각주 아저씨는 멍청이야!”
소천개도 호응했다·
은앙개가 낄낄거렸다·
“오늘 하루 각주가 바쁘고 정신없었잖습니까· 평소라면 먹혔을 리 없어요· 뭐 어쨌든 우리의 개수작을 믿어주면 된 거죠·”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계획된 것이었다·
그저 상황극·
명명된 최초 이름은 ‘수작’이었는데 자꾸 거론되는 과정에서 다들 ‘개수작’으로 부르게 되었다·
최초 제안자는 금적자·
약왕문의 축 처져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자는 취지였다· 약왕문주의 보물을 그냥 찾아다 건네주는 것은 너무 심심하니 요란하게 판을 벌이자는 뜻·
후공이야 이런 거 다 쓸데없다며 한심하게 바라봤지만 천공단이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탓에 ‘재미는 있겠다’며 수락하여 오늘 실행에 옮겨진 것이었다·
물론 덕분에 후공의 수고도 늘었다·
개수작에 맞춰주느라 장서각에 들어가기 전 용화청을 향해 야릇한 미소를 지어야 했으니·
“자 연습해 보자고!”
천공단은 즉시 예행연습에 돌입했다·
연습이라 봐야 단순했다·
약왕문과 함께 장서각을 포위하고 있다가 단주가 나오는 순간 천공단은 환영 인사를 건네는 것·
격전을 준비하던 약왕문은 놀랄 것이고 그때 껄껄껄 웃어주며 상황 설명을 하면 끝이었다·
“자 이제 장서각에서 단주가 나오는 거야· 하나 둘 셋!”
금적자의 말이 끝나자 천공단이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단주 수고했네!”
“두목 기다리고 있었다고!”
“형님 보물은요~~·”
“형아~~·”
다 제각각의 외침·
그리고 예를 취함도 각각 달랐다·
누구는 포권을 취하고 누구는 한쪽 무릎을 꿇었고 소천개 같은 경우는 손을 흔들었다·
그 결과 새로운 분쟁이 시작되었다·
“아니 다 따로 놀면 어떡해요! 진짜 막장이야· 이것 하나 딱딱 못 맞추면 어쩌자는 거예요!”
묘빙빙이 신경질을 부렸다·
곧바로 항마삼협이 받아쳤다·
“미리 정해놓은 것도 없었잖아! 왜 화를 내는 건데!”
“야식 먹을 준비도 해야 하는데 이러고 있으니까 지금 화가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그건 그래·”
“얼른 연습 마치고 또 멧돼지 구워먹어요·”
“그러자고!”
천공단에 다시 활기가 돌 때였다·
“다들 쉿!”
금적자가 주의를 준 후 숲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갸웃하며 미간을 좁히던 항마삼협과 무산쌍웅이 이내 뭔가를 감지했는지 눈매가 가늘어졌다·
숲에서 인기척이 잡힌다·
숫자는 넷·
별채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잠시 후 숲을 뚫고 네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더는 다가오지 못하고 엉거주춤 멀리서 천공단 쪽을 보며 멈춰 섰다·
소천개가 웃으며 손짓했다·
“형아들 멧돼지 잡은 거 들었나 보구나?”
“야 거기서 뭐하냐· 왔으면 인사를 해야지·”
“얼른 이리 와라·”
천공단이 태미와 세 쌍둥이를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