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죽어보면 안다· (2)
이내 두 사람은 탁자에 마주 앉았다·
후공이 입을 열었다·
“첫 번째는 지나갔고 지금은 두 번째다·”
“····”
“두 번의 아량은 없어·”
“···네·”
죽음은 유예 상태·
이 자리에서 입을 잘못 놀리면 죽는다·
칠비단혼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왜인지 대공자라면 당연히 그리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다시 묻어버리든 썰든·
그리고 또 희한한 점이 있었다·
대공자의 하대가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일방적으로 맞고 묻혀봐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장담하건데 그런 건 아니었다·
칠비단혼은 불현듯 약왕문 부문주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멋진 사람입니다·]
글쎄· 멋진 건 모르겠다·
하지만 대공자가 기묘한 자임에는 틀림없었다·
대공자에게선 정점에 선 자들이 뿜어내는 특유의 존재감이 엿보인다· 고작 20세 전후의 서생이 그런 느낌을 들게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유는?
그것도 모르겠다·
타고난 본질인지 드러내지 않은 큰 힘이 얼핏 보여서인지·
그래서
“제가 무례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칠비단혼은 짧게 그리고 정중히 말했다·
원래는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 원망의 말도 꺼낼 참이었다· 남궁세가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냐며 슬쩍 떠보려고도 했는데 다 접었다·
은앙개의 조언도 조언이지만 자신의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너저분하게 구질거리면 안된다고·
“무례한 건 맞고 용서는 아직이다·”
“네·”
후공은 차갑게 말했지만 내심 흡족히 여겼다·
태도를 보고 있자니 파묻은 보람이 있었다·
확실히 혼자만의 시간 속에선 누가 됐든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법이다·
과거 청성파 장로 운규도 그랬다·
겁을 상실한 듯 대들기에 원래 답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땅에 파묻었더니 나온 후에는 순한 양이 되어 있었다· 당시 땅을 파는 데 일조했던 당문의 문주 당명이 놀라 소리쳤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 이야~ 짐승이 사람 되는 덴 죽어보는 것만 한 게 없나 봅니다· 후공! 앞으로는 누구든 일단 파묻고 시작하시죠·
녀석은 잘 지내려나·
문득 당명이 떠오른 후공은 절로 미소가 났다· 강호 평판으로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인물로 알려졌지만 실제 사석에서의 당명은 유쾌한 녀석이었다·
후공은 시선을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문 너머의 인기척을 감지했다·
“흠····”
그리곤 이내 칠비단혼을 향해 입을 열었다·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보도록 하지·”
“네· 그럼 이만··· 네?”
칠비단혼이 엉겹겹에 대답했다가 이내 반문했다·
‘내일 아침에 본다고?’
왜인가? 이야기는 끝난 것 아닌가? 지금 시각이 늦은 것이야 맞는 말이지만 내일 아침에 왜 또 봐야 하는지 칠비단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이곳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임무는 실패했다·
자신은 작별을 고하고 대공자와 그 일행은 천화서고로 돌아간다· 그것이 전부였다·
“내일 아침이란 건 무슨 말씀이신지····”
“크흠····”
후공이 미간을 찡그리고 한심하다는 듯 바라봤기에 칠비단혼은 더욱 영문을 몰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말씀을 해주셔야····”
“내가 일일이 그 이유까지 설명해야 한단 말이냐·”
“····”
칠비단혼이 멍해져 눈만 깜박였다·
분명 이유가 있는 모양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뭘 놓친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문 밖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야호!”
“간다! 됐다고!”
“다 끝났어!”
이내 문이 부서지듯 열렸고 천공단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두목! 내가 설명할게! 내가 그런 거 잘해! 나한테 맡겨줘!”
“거지야 저리 꺼져 내가 설명할 거라고!”
“비키지 못해! 설명은 천공단의 군사인 내 몫이야!”
한껏 들뜬 표정으로 들이닥친 세 놈이 서로 설명하겠다고 난리였다· 한참 전부터 문밖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가 때는 이때가 싶어 난입한 것·
칠비단혼은 더욱 얼떨떨해졌다·
‘어딜 가고 뭐가 되었다는 건가·’
은앙개 등을 보니 다 아는 듯했고 자신만 모르고 있는 것 같지 않는가·
하지만 그곳에서 설명을 들을 기회는 없었다·
“천공단이든 뭐든 다들 꺼졌으면 싶은데····”
나직한 대공자의 축객령이 떨어진 터·
··함께 꺼진 칠비단혼은 객잔의 1층에서 상황 설명을 들었다· 먼저 입을 턴 건 은앙개였다·
“칠비께선 어디 가서 꽉 막혔다는 이야기 많이 들으시죠?”
“···?”
“하하 언짢게 하려는 게 아니고요· 이번 일만 봐도 그냥 직진이셨잖습니까·”
칠비단혼이 찡그렸던 미간을 풀고 계속 해보란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 그럼 칠비께서 남궁세가로 돌아가시면 어떻게 될까요? 성향상 있었던 일을 그대로 보고하실 테죠? 일체의 숨김도 없이 낱낱이·”
“흐음····”
이쯤에서 칠비단혼도 감을 잡았다·
절로 쓴웃음이 났다·
‘그런 것인가·’
내일 보자는 뜻은
대공자의 행선지가 남궁세가로 바뀌었다는 의미였다·
은앙개의 말이 이어졌다·
“칠비께서 예쁘게 포장해서 말한다 쳐도 예뻐질 이야기 아니잖습니까· 줘 터졌다 묻혔다이니까요· 그럼 그 보고를 듣는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것이고 당장 천화서고인지 뭔지 잡아오라는 말이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두목 입장에선 차라리····”
“마주한다·”
“그렇죠! 하하 대번에 아시네요·”
오해가 커지기 전에 바로 잡는다· 칠비단혼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하나만 알고 둘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자신을 깔끔하게 묻어버리고 뒤돌아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살려서 보내는 마당이라 대공자로선 오해의 여지를 없애려면 직접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소천개가 양념을 치고 나섰다·
“형아의 생각은 이런 거야· 하아 그 개자식 때문에 내가 고생이네· 이런 심정인 거여요· 난 덕분에 너무 좋아!”
“····”
칠비단혼은 노려볼 마음도 들지 않았다·
대공자는 파묻기로 하면서부터 이미 여기까지 염두해둔 것이니 객실에서 왜 그리 한심하게 바라봤는지 비로소 그 표정이 이해가 되었다·
‘엉망진창이군·’
결과적으로 임무는 완수했지만 씁쓸함이 깊게 남았다·
묘빙빙이 그런 칠비단혼을 위로하고 나섰다·
“표정 풀어요· 머저리처럼 죽상 쓸 것 없어요· 옛말에도 있잖아요· 살신성인!”
“와아 누나 비유가 딱이야!”
“하하 그렇네 이번 일은 진짜 살신성인이었어· 안 묻혔어 봐 우리가 천룡대전에 갈 수나 있었겠냐고·”
묻힌 사람을 앞에 두고 배려 따위 없이 천공단이 웃고 떠들었다·
‘제대로 엉망진창이야·’
상황도 그렇고 천공단도 그렇다·
이놈들은 여간 정신 사나운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칠비단혼은 대공자에 대한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대공자는 어찌 이런 녀석들과 스스럼없이····’
전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지 않는가·
정녕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여기 있는 건 천공단의 일부에 불과함에도 이 모양이다· 천공단 전원이 모여 있다면 그 자체로 재앙과 같은 난장판일 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럼에도 대공자는 태평할 뿐 아니라 어떨 땐 즐거운 듯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은앙개!”
“네 말씀하십쇼·”
“대공자는 서문세가를 어떻게 상대했지?”
관심이 커졌다·
칠비단혼은 대공자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
다음 날 아침·
일행은 이제 한 명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목적지는 남궁세가·
아침 식사는 객잔에서 해결하였고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인 칠비단혼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었던 만큼 눈치껏 새 마차를 구해놓았다·
그렇게 마차에 올라 출발하려 할 때였다·
“천공단의 군사인 본녀가 제안합니다!”
갑자기 묘빙빙이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제안에 능통한 묘빙빙이다·
오랜만에 꺼낸 의제라서인지 유난히 우렁찼다·
후공을 비롯한 천공단은 창피해서 시선을 외면했지만 직진 밖에 모르는 칠비단혼은 진지하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묘빙빙이 말을 이었다·
“천룡대전의 날짜는 아직 여유가 있고 그리 멀지도 않으니 그동안 주변 명소를 관광하는 것이 어떨까요!”
“오호 그거 괜찮은데·”
“누나는 천재야! 유명한 맛집부터 공략하자!”
은앙개와 소천개가 적극 찬성하고 나섰다·
칠비단혼은 내심 혀를 찼다·
물론 닷새 정도의 여유가 있는 건 맞다· 하지만 서로 간에 갈등도 있었던 마당이다· 며칠이라도 먼저 가는 것이 여러모로 현명한 일이었다·
‘이 와중에 관광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떠들어대는군· 쯧쯧 대공자의 의중은 생각지도 않고· 어린 녀석들이란····’
“관광은····”
그가 막 입을 뗄 때였다·
“흠 그거 마음에 드는군·”
대공자가 한껏 흡족해하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어 괜찮겠냐는 듯 대공자가 자신을 바라보았기에 칠비단혼은 단호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관광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
그렇게 명소를 둘러보길 닷새째·
마차는 용선각 앞에 멈췄다·
명소를 둘러본다는 건 말이 그렇다는 것뿐 실질적으로는 솜씨 좋은 유명 요리집 탐방이 대부분이었던 터라 이곳 용선각도 그중 하나였다·
“우와 여기 굉장해!”
소천개의 입이 찢어졌다·
3층으로 된 용선각 전각은 그만큼 기대감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우선 외부의 위용부터 남달랐다·
용 형상이 건물을 휘감고 외벽마다에는 온갖 바다생물의 대형 조형물이 장식되어 있었다· 다양하고 신선한 생선 요리가 일품이라며 칠비단혼이 추천한 터였다·
“누나 거북이랑 왕새우 조각상 엄청 커· 난 여기 너무 맘에 들어·”
“나도 말로만 들었는데 굉장한걸· 건물에다 돈을 얼마나 바른 거야·”
소천개와 묘빙빙이 감탄할 때 은앙개가 으스대며 끼어들었다·
“촌스럽긴· 다들 처음인가 보네·”
“사형 여길 와 봤다고?”
“물론이지· 난 무려 이 앞을 열 번도 넘게 지나다녔어·”
“거지새끼가 그럼 그렇지·”
“하아아···· 하늘같은 사형한테 말하는 꼬라지 봐라· 확 죽여버릴라·”
그때 칠비단혼은 대공자를 향해 공손히 물었다·
“대공자 여긴 처음이시겠죠?”
“네· 처음입니다·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놀랍군요·”
세 번 와봤다·
하지만 후공으로선 그리 말할 수 없는 노릇·
“하하하 맛을 보고 나면 건물의 화려함 같은 건 잊게 되지요·”
“그렇습니까? 이거 기대가 큽니다·”
후공도 잘 알고 있었다·
안휘 남부에 올 때면 꼭 들렸던 용선각이고 건물의 화려함만큼이나 요리 솜씨도 훌륭해 실망한 적이 없었다·
“대공자 들어가시죠·”
칠비단혼이 껄껄 웃으며 걸음을 권했다·
요 며칠 함께 지내는 중에 제법 적응한 칠비단혼이었다·
그렇게 그의 태도가 바뀐 터라 후공 또한 어느 순간부턴 그에게 다시 예의를 갖춰주고 있었다·
“네 가시죠·”
그렇게 걸음을 떼던 후공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느껴진 탓이었다·
3층 창가·
한 여인이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은 가히 절세미녀였다·
그린 듯 섬세한 눈매와 고운자태·
마치 한 떨기 꽃 같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런 미녀의 눈동자에는 호기심과 의아함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