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화 그리고 복될 것이니 (4)
베르세르크는 용의 피로 축축이 젖은 자신의 몸을 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그 잠깐 사이에 꽝꽝 얼어붙기 시작한 핏물이 머리카락에 앵겨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어이─! 거 괜찮소─?!”
“멀쩡하다!”
“그러어엄─ 고짝에 내 창 좀 회수해주쇼오─!”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은 아니다·
그녀는 귓구멍이나 장갑 부츠 안쪽 따위로 스며든 핏물만 가볍게 털어낸 후 용의 시체로 다가갔다· 그 잠깐 사이에 백탁이 낀 눈동자가 옆으로 누워 그녀를 반겨 주었다·
“흠·”
고작 창 하나에 머리가 꿰뚫렸을 뿐인데 머리가 통으로 넘어갔다·
베르세르크는 그 과격한 힘에 약간의 호승심을 느끼며 넘어진 머리를 밟고 올라섰다· 그러곤 용의 관자놀이 쪽에서 무릎을 꿇고 동그란 상처로 손을 뻗었다·
아까 날아온 창이 용을 넘어트리긴 했으되 그 머리를 완전히 관통하지 못했음을 아는 탓이다·
꽈드득!
창은 머리를 뚫고 나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상처에 튀어나오도록 박히지도 않았다· 해서 베르세르크는 상처 안으로 친히 손을 집어넣어 창대를 찾았다·
다행히 상처를 추가로 헤집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꾸드드득
아슬아슬하게 붙잡힌 창대의 끄트머리가 들어갔던 구멍을 통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핏물이 꿀럭꿀럭 튀었으나 베르세르크는 개의치 않았다· 이미 그녀의 몸은 용의 피로 적셔진 지 오래였다·
팍!
기어이 창대 전부가 뽑혀 나왔다· 얼마나 좋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창에 묻은 피들은 중간에 달라붙는 일 없이 대부분 미끄러져 내렸다· 이 혹한의 날씨만 아니었다면 나머지도 얼어붙는 일 없이 전부 떨어져 내렸을 터였다·
하나 베르세르크는 창을 가볍게 휘두르는 것으로 그 나머지마저 털어 냈다· 투두둑· 은빛 점액질이 고인 눈밭 위로 시꺼먼 핏물이 점점이 새겨졌다·
툭·
그녀는 그것을 보았다가 이내 용의 머리에서 뛰어내렸다·
하나의 근심을 해결했으니 이제 다른 근심을 배제하러 가기 위함이었다·
“여어· 형씨· 잘도 저 큰 걸 잡았수다·”
“의외군·”
“응?”
“지분을 먼저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날 뭘로 보는 기고· 비록 내 마지막 일격을 날리긴 했지만··· 고작 그거가꼬 내가 잡았네 뭐네 떠들어 지낄 정도로 염치가 없진 않소·”
“호오·”
“애시당초 나가 안 끼어들었어도 혼자 잡았겠더만··· 난 그런 사람에게 덤빌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소·”
“분수는 잘 아는군·”
“돈보다 중한 게 목숨이니까네·”
무너진 성벽을 밟고 있던 이가 낄낄 웃으며 손을 뻗어 주었다· 베르세르크는 거절하지 않았다· 미스틸테인의 손을 잡고 뛴 그녀의 몸이 쑤욱 끌어 올려졌다·
“논공행상의 시간이 오게 된다면 머리통 반쪽 정도는 내주지·”
“오?”
“도움을 받은 건 받은 것이니·”
미스틸테인이 스스로 인정했다시피 마지막 타격은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인 도움이었다· 강력한 한 방이 절실하게 필요했다거나 목숨을 위협할 만한 무언가가 있었다거나 한 상황이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시간 단축도 뭐 용이 달려드는 즉시 두개골을 쪼갰을 테니 큰 차이는 없었을 테고·
“아까 상공에서의 충격· 네놈이 한 것 아닌가?”
하지만 아까 상공에서의 한 방은 달랐다· 그건 확실히 그녀에게 필요했고 그만한 도움도 되었다·
“호· 고건 또 어찌 아셨소·”
“감·”
마법이었다면 보다 강렬하고 눈에 띄었을 테니 이쪽에서 한 건 아닐까 찍어 보았을 뿐이다· 베르세르크는 이 예측이 맞아떨어졌음에 흡족해졌다·
“뭐 내야 주면 감사히 받제·”
“그래·”
“그보다 약 안 먹어도 되겠소? 악마새끼 피를 그리 뒤집어썼으면 직접적으로 공격을 안 받았어도 마기 침식이 터졌을 것 같은디·”
“먹을 거다·”
폐가 터질 무렵 눈의 핏줄도 같이 터져서 티는 잘 안 나겠지만 지금쯤 그녀의 몸에는 마기가 마구 돌아다닐 것이다· 두꺼운 옷을 까 본다면 한껏 도드라진 핏줄도 보일 테지· 필시 불길한 검은빛을 흘리면서·
아그작·
그녀는 미스틸테인에게 창을 돌려주는 한편 마기 해독제를 한 움큼 꺼내어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해독제 특유의 향기로우면서도 큼큼한 맛이 혓바닥 가득 퍼져 나왔다·
“그보다 네놈은 왜 혼자지?”
필히 제 부하 놈들과 술 마시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째서 지금 미스틸테인은 혼자인가? 베르세르크가 마땅한 의문을 제기하자 사내가 머리를 긁적였다·
“사람들 머리가 홰까닥 돌아뿟지 뭐요· 글타고 추락한 용을 방관하긴 쪼까 그래서··· 애들은 사람 제압하라고 둬뿌고 내만 헐레벌떡 달려온 거요·”
안내를 하려는 것처럼 앞장 선 미스틸테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탁 탁 타닥· 점점 박자가 빨라지는 걸음의 속도는 그들의 몸 기울기에 영향을 끼친다·
“결과적으로 괜히 온 것 같긴 하지마는·”
“아니 정보 공유 측면에선 차라리 이게 낫다·”
“하모 그도 그렇제·”
미스틸테인과 만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도시의 상황을 스스로 알아냈어야 했을 것이다· 그걸 고려하면 미스틸테인의 걸음은 마냥 헛걸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이상해진 것 외에는 별일 없나?”
“저 뭐꼬 요짝 정반대쪽에서도 난리가 터진 것 같긴 했소· 시꺼먼 연기가 풀풀 피어오르질 않나 탑이 무너지질 않나·”
“가지 않은 이유는?”
“거리도 거리지마는 이짝 외면하고 갔다가 낸중에 등이라도 찔린다카면 쪼까 억울하지 않겄소·”
“하긴·”
사방에서 문제가 터진다고 줏대 없이 뛰어다니다간 모든 걸 놓치고 패망하는 수가 있다· 하니 당면한 문제부터 차근차근 해결하려는 미스틸테인의 선택이 꼭 틀린 것은 아니리라· 용병 특유의 자기 보신적 성향도 이 선택에 한몫하기는 했겠지만 어쨌든·
“그래서 사람들이 미친 이유는?”
“내 같은 용병 나부랭이가 뭣을 알 것 같소?”
“그래서 모른다?”
미스틸테인이 또다시 어깨를 으쓱였다·
“보소· 당신이라카면 저짝서 뭘 알아낼 수 있겠소?”
그러나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그가 왜 그런 반응을 했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이해가 간다·
“으 으아아아아아!!!”
“엄마 엄마 엄마아!!!”
“아파 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
“···어쩐지 성벽에 사람이 없더라니·”
용이 추락하며 성벽을 박살 낸 이상 그 일대의 사람들이 도주를 감행하는 건 이해가 가능한 영역이다·
하나 그런 피난도 일반인 그러니까 주민들에 한해서 허락되는 것이지 보초를 섰을 병사들까진 아니다·
뚫린 성벽 새로 숨어들 존재를 경계하기 위해서든 혹은 성벽의 붕괴로 동요할 주민들을 다독이기 위해서든· 병사들은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함이 옳다·
만일 부득이한 사정으로 자리 보전을 포기하게 됐대도 마찬가지다· 상황에 맞게 새로 진을 펴건 민간인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며 도시 안쪽으로 후퇴하건··· 병사들의 퇴각은 천천히 이뤄지는 게 정상이다·
최소한 그녀가 싸우는 데 들인 시간 속에서 해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란 거다·
“머리가 머리가 머리가 머리가아!!”
“히힉 힉 히히히힉·”
“후퇴가 빨랐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제대로 된 후퇴조차 아니었던 건가?”
“아무래도·”
함에도 빈 성벽과 텅 빈 집들을 보며 소개를 성공적으로 해낸 것에 좀 놀라던 차였는데··· 아무래도 그게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주변을 둘러보던 베르세르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투에 노출된 민간인들이 공황 상태에 빠지는 건 흔한 일이지· 하지만··· 이건 아무리 보아도 일반적인 경우와 멀어 보이는군·”
애시당초 병사들이 주민 사이에 섞여 있는 것부터가 이상하다· 투구를 쓴 채로 벽에 낑깡깡 머리를 박는 건 더더더 이상하고·
베르세르크가 그것을 지적하자 미스틸테인이 고개를 살짝 주억이며 긍정을 표해 왔다·
“악마인가?”
“아마도 그라지 않겄소? 비록 발견은 못했지만 이걸 정상으로 치기는 좀·”
“흩어진 부하들은 멀쩡한가?”
“뭐어··· 몸 빼는 것엔 일가견 있는 놈들이니 괜찮을기요· 아마·”
미스틸테인이 그리 말하며 들고 있던 창을 땅에 박아 넣었다·
“뭣보다 그넘들 걱정하기엔 당장 내 코도 석자라·”
“어 어? 어?”
그가 바라보는 방향에는 지금 막 그들을 발견한 듯한 여성이 한 명 있다·
“너 너 너 너!!!”
“당신도 조심하쇼· 종종 한 바퀴 냉글 돈 수준이 아니라 다섯 바퀴 돌아삔 인간들이 있으니까네·”
여성은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몸을 삐걱삐걱 틀었다· 마치 얼어붙은 관절을 억지로 움직이는 사람 같았다·
“너어어어!!”
기묘하게 비틀린 인간이 파편화된 언어와 함께 달려들었다·
“미친 걸 넘어서 공격성까지 생긴 건가· 마치 침식에 당한 인간 같군·”
“댁이 봐도 그라제?”
물론 그 여성의 움직임은 썩 대단치 않았다· 이성을 잃을 만큼 흥분해 봤자 결국은 일반인인 까닭이다·
“그치만 너무 방심하진 마소· 민간인을 쥑이뿟다가 낸중에 뭔 소릴 들을라꼬· 침식되지 않은 인간은 참작 사유도 없단 말이오·”
“하 이딴 꼬라지를 두고 인명이니 뭐니 지껄이는 자가 있다면 그자야말로 악마의 앞잡이일 거다·”
“고건 또 그렇지만서도··· 하모 민간인에 손대뿌면 영 찝찝하잖소·”
그런 의미에서 미스틸테인은 미친 여성을 손쉽게 제압했다· 창을 쓸 것까지도 없었다·
그는 비어 있는 두 손으로 여성의 소매를 잡아끌어 손 공격을 막고 빠르게 품 안을 파고들어 여성의 목을 쥐었다·
“끄억 꺽·”
목뼈가 나가지 않을 수준으로만 목이 조여진 이가 끝내 산소 부족으로 졸도했다· 아까 미스틸테인이 말한 ‘부하들에게 맡긴 사람 제압’의 정체였다·
“죽이면 찝찝하다더니 목 조르는 건 또 아닌가 보군·”
“기절시키는기 가장 편하긴 하잖소· 그라고 저짝도 어디 부러져뿌는 것보다는야 목에 며칠 멍들고 목소리 좀 쉬는기 더 낫다 생각할기요·”
글쎄· 과연 그럴까·
베르세르크는 이 추위에 기절한 채로 방치되는 것이 더 나은지 아니면 어디 부러진 채로 굴러다니는 게 나을지 따져 보았다· 솔직히 당하는 입장에선 솔방울 키 재기나 다름없을 것 같았다·
“뭐 어떤 쪽이든 상관없겠군· 묶는 것보단 귀찮음이 덜할 테니·”
“내 안글타 안그캅니까·”
그렇다고 집 안까지 끌고 들어가 결박해 줄 친절은 없다· 그녀는 그냥 미스틸테인이 채택한 방법을 똑같이 쓰기로 했다·
“부하 녀석들은 어디 있지?”
별도로 이 상황에선 흩어지는 것보다 함께 다니는 것이 더 낫다· 주민과 병사들은 거리에 너무 산개되어있고 그중 누가 공격성을 보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니까·
이를테면 사방이 함정밭인 셈이다· 그들 같은 무력의 소유자라면 몰라 일반인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혼자 있는 게 위험하다·
“조짝서 헤어지긴 했소만··· 아직 거 있을진 내도 모르겄소·”
“일단 가 보지·”
“내야 그카면 좋고·”
어차피 이 사달의 원인을 찾으려면 수색할 필요가 있고 수색은 곧 돌아다님을 뜻함이니· 미스틸테인의 부하들을 찾는 건 결코 나쁜 선택이 아니다·
순식간에 의견의 합치를 본 두 사람의 몸이 거리를 내달렸다·
* * *
“힉 히익 이히히히히!!”
“죽어 죽어 죽어!”
“악마다 악마야· 악마가!”
호크아이는 도시의 성벽 위 난리 난 병사들의 입모양을 너덧 개 읽어 보았다· 단순한 단어의 반복일 뿐이라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꼭 단순하지 않았더라도 그가 못 읽지는 않았겠지만 뭐·
[도시에 숨어 있는 다른 악마라니? 인간아 더 자세히 좀 말해 봐·]
“여기서 더 추가할 말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요····”
각설하고 여기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점은 단어의 단순성이 아니다· 난리 법석을 피우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병사들의 상태 그 자체지·
“성벽을 보시면 아실 거예요·”
[성벽?]
주작이 고개를 휙 돌리더니 곧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악마를 잡은 후엔 사람들을 대피시키려 했더니 도시는 또 왜 저런다니·]
“사람들을 대피시키려 하셨어요?”
[그럼 여기다 둘 순 없잖아· 심지어 저거 거의 다 와 가는데·]
주작이 이번엔 마왕성 쪽을 힐끗 보았다· 쿵 쿵 하며 다가오는 성의 존재는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더욱 위협적이고 공포스러워진 상태다· 정말 몸서리쳐질 정도의 끔찍함이었다·
“10분이면 도착할 것 같긴 하네요·”
그렇지만 도시엔 용이 갔지 않나? 아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도시로 가야 하는 건가? 호크아이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자신이 놓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용 잡혔나 보네요·”
“엇 정말입니까?”
호크아이의 발언에 눈만 데굴데굴 굴리던 티마뉴크가 반색했다· 그만큼 이곳을 지나쳤던 용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확신은 못 해요· 그렇지만 적어도 제 눈엔 보이지가 않네요·”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건 지상에 처박혀 있거나 이보다 더 높은 하늘로 치솟았거나 둘 중 하나를 의미함이라· 설마 후자일 리는 없으니 도시가 힘을 합쳐 전자의 상황을 만들어 냈다는 게 더 가능성 있지 않을까?
호크아이의 사고 도출에 티마뉴크가 박수를 짝짝짝 쳤다·
“다행입니다·”
“다행이죠·”
그래 봤자 또 하나의 악마가 있지만·
호크아이는 뒷말을 삼켰다·
[···일단 애들을 옮기는 게 먼저 같긴 하다· 마침 용도 잡혔다니 도시까지 데려가는 것엔 별문제 없겠지·]
“도시까지 후퇴한단들··· 의미가 있을까요?”
어차피 마왕성은 도시까지 갈 것이다· 그걸 고려하면 지금의 이송은 단순한 시간 벌이에 불과하지 않을까·
[글쎄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지· 하지만 인간아 난 저 안에 진입한 아이들을 믿어·]
그러나 주작의 의견은 달랐다·
[그 아이들은 해낼 거야· 우리가 지금 해낸 것처럼·]
호크아이는 그 믿음이 어쩐지 우습다가도 그 ‘아이들’에 속한 한 사람이 떠올라 씁쓰름해졌다·
“맞아요· 그들은 해낼 거예요·”
크러셔 살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