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화 그리고 복될 것이니 (15)
[다 삼켜 버려요·]
괴물의 뿔을 잡고 있던 이가 조곤조곤 속삭였다· 언뜻 들으면 곱고 낭랑한 노래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그 내용은 결코 그러지 못했다·
대악마의 명령을 받은 혼돈이 그 몸에 돋아난 수천 개의 촉수를 뻗었다· 마치 고슴도치가 자신의 몸을 부풀려 제 모든 가시를 사방으로 뿜어내는 꼴이었다·
“피해!”
미스틸테인의 발악적인 외침이 광장 모든 사람에게로 전달되었다· 물론 그가 그렇게 경고한다고 해서 광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따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으아악!”
“아악!”
건물에 오르지 않고 광장을 돌아다니며 미스틸테인을 서포트하던 근접직 몇 명이 촉수에 꿰뚫린 채 그대로 잡혀 갔다· 끌려가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미스틸테인이나 베르세르크는 그들을 구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꿀럭 꿀럭·
하얀 괴물이 끔찍하기 짝이 없는 표면을 꿀렁거리며 모험가 및 용병들을 삼켰다·
[두려워하고 있군요· 모두 저와 이 존재를 두려워하고 있어요·]
“으 으아아!”
[하지만 괜찮아요· 저는 당신들을 포용해 줄 수 있어요·]
그러나 살아남은 쪽이라고 해서 형편이 좋은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본래도 사람의 공포심을 자극하여 광기로 내몰던 저주가 다시 한번 그들을 덮쳐 온 까닭이다·
[오세요 이쪽으로 오세요·]
“에밀리· 에밀리!”
“아 알렉스··· 너 넌 죽 죽었는데··· 흐아악!”
“오지 마 오지 마!!”
괴물의 머리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대악마가 손짓할 때마다 광인이 하나씩 출몰했다·
주변에서 아무리 만류하고 붙잡아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골수까지 스민 저주에 눈을 뒤집고 하얀 괴물을 향해 달려가거나 아예 자리에서 이탈했다·
콰직! 콱!
이때 괴물은 따로 떨어져 나온 그들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창처럼 뻗어 나온 촉수가 그들을 움켜쥔 채 그대로 피부 안쪽까지 들어가 버렸다·
미스틸테인과 베르세르크 하다못해 날아오는 화살이 그들을 비호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은 식충식물에 날아드는 벌레처럼 달려들었고 그렇게 먹혔다·
순식간에 스무 명 안팎의 숫자가 증발했다·
“아 안 돼· 우린 우린 다 죽을 거야···!”
“정신 차려! 우리까지 무너지면 끝장인 거 몰라?!”
“우 우린 이미 끝났어····”
“안 돼 지금 포기하면 저주가!”
“으 으아아아!!”
심지어 문제는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으니· 그 기괴한 모습에 절망하는 자들이 하나둘 속출했다·
아울러 절망감 특유의 무력감과 패배감이 광기를 불러오고 불려 온 광기는 또 한 사람의 빈자리를 만듦으로써 이 더러운 굴레를 심화시키기까지 했다· 끊고 싶어도 끊어 낼 수가 없는 지독한 악순환이었다·
기괴한 악마와 거인 대악마의 존재에도 어떻게든 버텨 왔던 사람들의 응집이 삽시간에 각설탕 녹듯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 개같은!”
결국 미스틸테인이 욕설을 지껄였다·
어쩔 수 없었다· 망연자실하다 사지로 달려간 머저리 중에는 그의 부하도 껴 있었다· 용병단이 결성되었을 때부터 함께해 온 대원이자 그가 애지중지 아껴 온 전우가 다른 무엇도 아닌 고작 패닉 상태에 빠져 덧없이 죽어 버렸단 거다·
“창잡이!”
“듣고 있소!!”
저놈들은 저렇게 죽어선 안 되는 녀석들이다· 최소한의 발악이라도 하다못해 스스로가 제 죽음을 인지라도 한 채 갔어야 했다· 적어도 이렇게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자신조차 인정하지 못할 형태의 죽음을 맞이해도 될 자식들은 절대 아니란 말이다·
“물리 공격이 안 통하되 가시를 잘라 내는 것은 효과가 있다! 본체 때리기보다 가시를 견제하는 데 우선해라!”
“그거 참 좆같고 도움 되는 충고로군!”
하여 미스틸테인은 다짐했다·
감히 그의 부하들에게 개죽음을 선사한 저 호로 잡놈을 기필코 갈아 마시리라고· 반드시 저놈에게 절대로 고운 죽음을 선사하지 않겠노라고·
그의 창이 뻗어 나온 괴물의 촉수를 쳐 내듯 끊어 내고 괴물 위에 탑승한 대악마를 향해 던져졌다·
[소용없어요·]
하나 창은 대악마에게 닿기 전 흰 괴물의 촉수에 붙잡혔다· 앞서 던져진 베르세르크의 무기나 날아온 화살이 맞이했던 것과 똑같은 결말이었다·
“로키!”
“어이 대장 나는··· 부를 때마다 답을 내놓는 만능 소라고둥이 아니라고!”
그러다 보니 미스틸테인은 실망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허리춤에 있던 여분의 봉을 꺼내 들며 그의 유능한 부하를 불렀다·
괴물이 뻗어 낸 촉수 다발에 건물 하나가 무너지려던 순간 로키가 파편처럼 핑그르르 튀어나왔다·
“이번엔 질문하려고 부른 거 아니니까 걱정말어!”
“그럼?”
“살아있는 아들 수습하고 바로 몸 빼그라!”
“···오 대장· 그건 꼭 나보고 도망가라는 소리 같은데?”
“정확히 알아들었구만!”
“농담이지? 대장이 강한 건 사실이지만 저 괴물은─”
“저짝 것에 먹히는 느그야말로 더 방해인 거 모르나?”
“····”
바닥에 몸을 납작 엎드림과 동시에 베르세르크의 조력─정면에서 풍압만으로 촉수 열댓 개를 분쇄하는─으로 괴물의 공격을 피한 로키가 올라간 입술 끝을 파르르 떨었다·
“···이번만이야· 약속을 어겼는데 봐주는 건·”
“아하하! 그거 고맙네!”
“신전과 마탑까지 물러나 도움 될 만한 인력을 다시 끌고 오지· 키히히· 그러니 그동안 목숨줄 단단히 잡고 있으라고· 아니면 대장의 유산 내가 다 꿀꺽해 버릴 거니까·”
“아따 마 유산 아까버서라도 못 죽겄는디·”
로키는 잠깐의 대화를 마친 후 미련 없이 뒤로 빠졌다· 사람들이 촉수의 반경에서 벗어나느라 급급한 상황이었기에 그가 대열을 수습하고 사람들을 퇴각시키는 건 금방이었다·
[어딜 가나요? 저는 아직 여기에 있어요·]
당연하지만 대악마는 그것을 가만히 두고만 보지 않았다· 그것은 필사적으로 사람들을 유혹했고 그것이 타고 있는 괴물 역시 이들을 우선시해서 노렸다·
꼭 미스틸테인이나 베르세르크의 경우는 단번에 죽이기 어렵다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어딜!”
“달을 꿰뚫으면 안 되지·”
하지만 그런 상대일수록 더 악랄하게 붙어 줘야 하는 법이다·
흰 괴물에게 창을 던진 후 여분의 봉으로 촉수를 분쇄하던 미스틸테인이 지정된 문구를 뱉었다·
퍼엉!
약속된 것처럼 괴물의 몸 일부가 터지며 무언가를 토해 냈다· 길고 뾰족한 창이었다·
[이런·]
창이 돌아오는 궤적에는 괴물에 얹힌 대악마의 심장 또한 포함되어 있었으니· 대악마가 몸을 비튼 끝에 창은 심장 대신 어깨 가죽만을 뜯고 날아왔다·
“이런 아쉽구로·”
[····]
미스틸테인의 가느다란 눈이 전혀 아쉽지 않다는 빛깔로 들고 있던 여분의 봉을 던졌다· 봉이 하늘로 부웅 날아올랐다·
휘리리릭!
그사이 미스틸테인은 날아온 창을 붙잡아 챘다·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관성이 제법 붙은 창이었지만 몸 전체를 빙그르르 돌리는 행위에 반동은 금방 제압되었다·
창을 여유롭게 회전시키며 촉수 몇 개를 쳐 낸 미스틸테인이 막 떨어지는 여분의 봉을 다시 받아 냈다·
차르륵!
그가 봉의 끝부분을 잡아챔과 동시에 봉이 3등분 되었다· 3개로 나뉜 막대 사이에서 촤륵촤륵 쇳소리를 내는 건 아주 자잘한 사슬이다·
“이보소 괴물은 몰라도 저 악마놈은 공격이 통하는 것 같은디?”
“그래 보이는군· 하지만 확신은 금물이다· 아까 처맞았던 자리가 멀쩡하지 않나·”
심장부와 복부· 두 부위 다 아까 꿰뚫렸었지만 지금은 또 흔적 하나 없이 멀쩡하다· 베르세르크가 대악마 본인을 쉽사리 노리지 않는 이유였다· 활을 쏘는 자도 이 지점을 파악한 것인지 아까부터 촉수 견제 쪽으로만 종종 도움을 주는 중이고·
“그것도 그렇구마잉·”
촤르륵 촥!
미스틸테인은 발로 자신의 창을 걷어차 회전시켰다· 허공에 떠오른 채로 360도 수십 바퀴를 도는 창은 그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 하나의 원이 생긴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카믄 저 자식은 우째 죽이뿌야 할 것 같소?”
“글쎄·”
타당 탕탕!
그 원이 다가온 촉수들을 분쇄하는 동안 미스틸테인의 다른 손은 삼절곤을 이용해 다른 각도에서 온 촉수를 추가적으로 파쇄했다·
“하 참말로· 이래가꼬 마법사 하나는 꼭 델꼬 당기야 하는 긴데·”
“나약한 소리·”
미스틸테인은 창의 회전 속도가 줄어들 즈음 삼절곤의 양쪽 끝 막대를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삼절곤을 보관하기 위해 마련된 구멍에 두 막대가 쏙 들어가고 가운데 막대는 허리 뒤쪽에 닿으며 정확히 고정되었다·
“하모 댁은 마법 없이 저걸 죽일 방도가 있소?”
“죽일 때까지 죽이면 그만이다·”
“···거 화끈해도 너무 화끈시리븐 답변 같소만·”
그렇게 빈손을 이용해 미스틸테인은 창이 완전히 떨어지기 전 그것을 낚아챘다· 그러곤 꼭 춤을 추는 것처럼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순간순간 창을 놓고 자세를 변경해 다시 쥔다든가 발로 창을 쳐 내 방향을 순식간에 전환한다든가· 마치 창이란 무기에 통달한 것을 넘어 창과 한 몸이 된 자 같았다·
그가 점거한 지대로 향하는 모든 촉수가 찢어지고 쇄파되며 바닥에 하얀 액체로 흩뿌려졌다·
“앞으로 달려! 절대 발을 멈추지 마!”
“크으으····”
“부상병은 업든가 버리든가 해! 도태되면 지켜 줄 수 없다는 점 명심하라고!”
그사이 로키는 두 사람과 엄호사격이 벌어 주는 시간을 이용해 모험가와 용병들을 이끌고 계속 물러났다·
중간중간 이탈자들이 나오며 대열이 계속 무너지려고 했지만 그는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일을 해결했다·
“아 아아아!”
“이리야─”
“죽을 놈은 그냥 보내 줘! 지금은 퇴각이 우선이야!”
“하지만!”
“죽고 싶다면 너만 가! 말리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 기억해 두라고! 우리 다음으로 먹힐 건 저 바깥의 사람들이라는 걸!”
키히히힛! 하며 로키가 웃을 때마다 흩어지려는 대열이 주춤주춤 도로 뭉쳤다· 빵 부스러기를 흘리는 것처럼 탈주자는 꾸준히 나왔지만 그래도 최악의 풍경은 아니었다·
처음과 비교하면 절반가량 아니 삼 분의 일 그 이하로 줄어든 집단이 로키와 트릭스터 용병단을 필두 삼아 빠르게 후퇴했다·
먹잇감이 한 발짝 한 발짝 멀어질 때마다 흰 괴물이 구슬프게 포효했다·
“유능한 부하를 두었군·”
“그제? 전장에서 거둔 애송이가 언제 저리 컷뿟는지 모르겄어·”
반면 미스틸테인과 베르세르크는 용병들이 멀어질 때마다 호쾌하게 웃었다·
용병들에게 가는 공격을 악착같이 틀어막느라 그들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수십 개도 넘게 생긴 상태였지만 그래도 그들의 웃음은 멎지 않았다·
“절대 본인만 도망치는 일은 맹글지 않겠다고 약속꺼졍 했는디····”
미스틸테인은 창으로 또 한 번 가시 다발을 분쇄하며 가느다란 눈을 둥글게 휘었다·
“돌아가믄 호드한테도 혼나겄네잉·”
“잘못한 일이라도 있나 보지?”
“그것보다는 로키 혼자 다니게 하지 말라꼬 약속한 게 있어가·”
“혼자 다녀도 괜찮을 것 같던데·”
“아 실력적으로는 그런 편인디 곁에 사람이 없으면 아가 좀··· 뭐라카지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맹키로 된다꼬 해야 하나·”
“흐음· 나약하군·”
“나약하다니! 우리 아보고 머라카지 마소· 아가 지 혼자 있는 걸 싫다캐서 글치 다재다능한 천재란 말이오·”
어허 하고 호통을 친 미스틸테인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잔기침을 뱉었다· 그의 눈은 어느새 핏발이 서 있고 눈가 주변에는 검은 핏줄이 울룩불룩 올라와 있는 상태다·
“재정비하고 와라·”
“하 아직은 괜찮은데 말이오·”
베르세르크의 제안에 미스틸테인은 너스레를 떨면서도 순순히 그녀의 뒤로 물러났다·
“솔직히 저거를 우째 죽이야 하는지 도통 가늠이 안 되오· 올 때까지 뻗대보겠다는 약속꺼졍 어기긴 쪼까 그런디·”
“흥· 죽일 수 없는 건 없다· 부족한 실력만이 있을 뿐이지·”
그들은 왜인지 모르게 공격 속도가 조금 덜해진 흰 괴물을 상대하며 번갈아 약을 복용했다· 같이 삼킬 물은 없을지언정 핏물이 입에 고인 상태였기에 삼키는 것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아그작아그작 이로 깨물어 부순 알약이 핏덩이와 함께 위장으로 내려갔다·
[정말 귀찮네요 당신들·]
“하하 하여간 애미애비 없는 악마새끼들 아니랄까봐 적반하장 오지는구만·”
여기서 진짜 끈질긴 게 누군데· 미스틸테인은 웃는 얼굴로 쌍욕을 지껄이며 팽팽하게 부푼 근육을 재차 움직였다·
퍼엉!
속도전으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는지 여러 개가 꼬여 만들어진 촉수 다발이 그가 있던 자리를 내려쳤다· 말할 것도 없는 사항이지만 둘 사람 다 순순히 당해 주는 일은 없었다·
“그보다 그짝도 슬슬 힘이 딸리는갑제? 느리도 너무 느리가꼬 이젠 눈감고도 피하겠네잉·”
미스틸테인은 도리어 악마에게 놀리는 듯한 말을 건넸다· 단순한 비아냥이 아닌 실제 사실에 근거한 조소였다·
“악몽의 용도 별 것 아니구만?”
[····]
하나 악마는 미스틸테인의 시비에 반응하는 대신 흰 괴물의 표피로 조용히 손을 뻗었다·
[일어나세요·]
“으 에밀리····”
순간 당연히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용병 하나가 대악마의 손에 끌려 나왔다· 초반에 흰 괴물에게 흡수당했던 그 용병이었다·
[자 당신의 두려움을 보여 주세요·]
하얀 괴물의 형태가 갑작스레 뒤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