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7화 그리고 복될 것이니 (16)
“흐음·”
호크아이는 뻑적지근한 팔을 주무르다 말고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그러자 근육의 결이 선명하게 보이는 팔과 어깨가 드러났다·
“그러면 춥지 않습니까?”
“이 정돈 괜찮아요·”
그가 태어난 곳은 이곳보다 더 추운 땅이었다· 효수된 목이 일 년 내내 썩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을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상황은 어떤가?”
“썩 좋진 않네요·”
호크아이는 긴장으로 뭉친 근육을 풀며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 대해 설명했다· 차마 언어로는 모든 걸 담을 수 없는 괴이함의 결정체 그것을 부리고 있는 대악마 마지막으로 먹힌 줄 알았던 사람들의 생존·
“제가 기억하기로는 세 번째로 먹힌 인간 같은데·”
저 안에서 호흡이 가능한가는 둘째 치더라도 악마가 저것을 살려 둔 것 자체가 의외의 일이었다· 솔직한 말로 이미 죽어 제물이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처지인데·
“악마에게 먹힌 인간이 아직 살아 있단 말입니까···?”
“괜히 살려 뒀을 리는 없고··· 무언가 의도가 있을 것 같군·”
“뭐 그렇겠죠·”
모든 행위에는 이유가 따른다· 그가 사랑을 연기하는 것이 악마숭배자를 탐색하기 위한 계략이고 악마숭배자가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결국 그 사람을 죽이기 위한 술수인 것처럼·
하니 악마가 죽일 수 있는 인간을 살려 두었다면 그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그 인간에게 남은 쓸모가 아직 더 있다거나 그 인간이 살아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더한 가치가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문제는 이를 꾀하는 의도가 무엇인가인데····”
다만 아직까지는 셋 중 그 누구도 해당 부분에 대해서 어떠한 짐작 하나 해내지를 못했으니·
호크아이는 악마를 관찰하며 작게 궁구하다 말고 곧내 깨달았다· 보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강제로 알게 된 쪽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여자?”
그의 시야에서만 보이는 악마의 형태가 갑작스레 뒤바뀌었다· 너무 눈에 띄는 변화라서 놓칠 일도 없었다·
끔찍하기 짝이 없던 괴물의 외관이 대뜸 길 가다 종종 마주칠 법한 인상의 여인으로 돌변했다· 마른 몸에 비해 부른 배와 새로 입혀진 색 따위가 가장 인상적인 것일 정도로 평범한 외형이었다·
“무슨 일인가?”
“아 그게····”
문제는 지금이 전투 도중이라는 것이라· 인간의 신체가 어떤 상황이건 대저 유연하게 반응할 수 있는 형태임은 맞으나 그렇다고 전투에 제일 최적화된 형태라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저것의 표면적이 어찌 작아지기라도 했는가? 그것도 딱히 아니다· 괴물의 덩치는 여전히 컸고 자연스레 맞힐 만한 곳도 많았다· 색이 입혀진 덕에 생동감이 부여되긴 했지만 그것이 전투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고·
정말이지 이해되는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는 행보였다·
“흐음····”
“그거 기이한 일이로군요·”
해서 호크아이는 다른 이들에게도 이 사실을 숨김 없이 모조리 말해 주었다· 그가 목격한 시점부터 머금었던 고민이 다른 이들에게도 퍼지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괴물의 변신은 사람의 생존과 관련된 것입니까?”
“아마 그렇지 않겠나·”
“하지만 굳이 이럴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
“잠깐·”
순간 호크아이의 눈이 확장되었다· 그의 손은 잠시 내버려 두었던 활을 잽싸게 잡아채는 상태다·
우드드득!
공격이 통하지 않는 만큼 대안이 나올 때까지 쓸데없는 힘·화살 낭비를 막고자 내렸던 활에 다시 시위가 걸리고 삽시간에 화살이 발사되었다·
* * *
[정말이지 직감 하나는 참 뛰어난 사람이라니까요·]
베르세르크는 악마가 갑작스레 지껄인 소리를 두고 눈썹을 휙 들었다· 그 말의 의미가 파악된 것은 대략 2초쯤 흐른 후였다·
쇄액!
거대한 여인의 모습을 한 악마가 손을 들었다· 무거워 보이는 몸체와 다르게 그 움직임은 제법 날렵하여 날아오는 화살을 충분히 막아 냈다·
“으··· 에밀리 에밀리····”
막히지 않았다면 아마 용병의 머리를 꿰뚫었을 화살이 거대한 여인의 손바닥에 박혀 그대로 꾸물꾸물 삼켜졌다·
우에엑!
그뿐만이 아니었다· 괴물은 뻗어 낸 손을 다시 모으는 과정에서 울컥 무언가를 토해 냈다· 새빨간 것이 꼭 피처럼 보이는 액체였다·
“이 미친!”
졸지에 피같이 보이는 것을 뒤집어쓰게 된 미스틸테인이 쌍욕을 뱉었다· 빈틈을 찾겠답시고 접근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몸 대부분을 적셔 버린 액체에 그가 몸서리를 쳤다·
“뭐이리 더럽게 구는구로!”
이거 나중에 문제 되는 거 아니야? 저주라거나 저주라거나?
미스틸테인은 흔히 가질 만한 의문을 속으로 삼키며 계속해서 악마의 근처를 배회했다·
···근데 정말 괜찮은 거 맞나?
사소한 불안감이 부스럼처럼 마음에 남았다·
“이 자슥이 진짜 뭐하자는겨?”
여전히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녀석은 아까와 다르게 가시를 뿜어내거나 촉수 다발을 휘두르는 등 이쪽에 피해를 입히려 들지도 않았다· 피 비슷한 걸 토하긴 했지만 닿는 즉시 어떤 반응이 오지 않는 걸 보면 이것도 딱히 공격 용도는 아니었던 것 같고·
하면 이놈은 정말 뭐 하자는 걸까? 애초에 모습을 바꾼 이유는 뭐지?
“창잡이! 물러나라!”
“?!”
뒤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 미스틸테인은 본능적으로 사고하기보다 행동하기를 우선시했다· 그의 몸이 뒤로 구르듯 빠진 후 몇 번의 백스텝을 성큼성큼 밟으며 훅훅 거리를 벌렸다·
우 우에엑·
그사이 소박하던 여인의 형상은 또다시 달라졌다· 흔한 형식의 옷은 어느새 넝마가 되고 복부에는 긴 자상이 생긴 것이다· 입가에서 끝없이 주륵주륵 흘러내리는 액체가 마치 죽어 가는 자의 토혈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에 밀리····”
[당신들은 꼭 공포가 없는 사람 같네요· 하지만 당신들이 악몽을 꾸지 않는다고 해서 악몽이란 개념이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대악마의 손에 붙잡힌 용병의 안색이 더욱 파리해짐과 동시에 거대한 여인의 모습 또한 시시각각 악화되었다·
바닥에 고인 피웅덩이 사이로 ‘으아앙’ 하며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때요? 소중한 사람을 잃은 자의 악몽이?]
웅덩이 속 아기 울음소리는 갈수록 더욱 짙어지고 더 강렬해졌다· 거대한 여인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마치 트리거라도 되는 양했다· 눈물과 피가 섞일 때마다 웅덩이가 훨씬 넓어졌다·
“우짜고 자시고 기냥 기분 더러븐디·”
일면식도 없는 타인의 서글픈 과거사라고 해 봐야 동정 한 조각 드는 것으로 끝이다· 솔직히 이 땅에는 소중한 존재를 잃어 본 사람이 아닌 쪽보다 훨씬 많았으므로·
“동감이다·”
그러니 얄팍한 동정 그 이상은 주려야 줄 수 없다· 저런 것에 일희일비하기엔 그들의 삶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요 그럴 수 있어요·]
하나 대악마는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듯 손바닥이 닿지 않게 양손을 모으며 거대한 여인의 어깨에 앉았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요?]
츄르르륵·
대악마가 바깥에 꺼내 두었던 용병이 다시 흡수되고 이번엔 새로운 인간이 튀어나왔다· 공교롭게도 미스틸테인이 아는 사람이었다·
“···이 호로잡놈이!”
미스틸테인은 새로 끌려 나온 대상이 제 부하임을 자각하자마 격분했다· 저 염병할 악마 새끼가 이제 무엇을 하려 들지 직감이 됐기 때문이다·
그의 목 근육이 순식간에 도드라지고 손등에는 핏줄이 팽팽하게 섰다·
“흥분하지 마라·”
“나도 알고 있소·”
저 악마는 두려움의 크기를 키울 수 있고 정신력이 약해진 자에겐 광증마저 도지도록 만들 수도 있다· 그러니 공포가 아닌 감정이더라도 조심하는 게 맞긴 했다· 두려움을 건드릴 수 있다는 건 다른 감정도 건드리는 게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니까·
[후후 이분의 악몽은 어떨까요?]
그렇지만 감정이라곤 참는다고 해서 바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분노의 땔감이 계속해서 추가되는 상황이라면 더 그랬다·
피로 낭자된 여인의 모습이 순식간에 지워지고 수수한 외형의 소년이 새롭게 나타났다· 그들 용병단의 초기 멤버만 기억하는 존재이자 그들에게 있어 영원히 아픈 손가락으로만 실재할 소년이었다·
“발드르····”
미스틸테인의 눈매가 흉하게 일그러졌다· 흥분에 의해 피가 몰린 두 눈은 평소보다 색이 더 짙어 안광이 번들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요 그렇게·]
···이 자리에 로키가 없다는 것이 어찌나 다행인지· 미스틸테인은 이 광경을 봤다면 바로 이성을 잃어버렸을 이를 떠올리며 창을 고쳐 쥐었다·
진짜 너무 화가 났다·
[사람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보여 주세요·]
“내가 네놈의 머리통을 부술 일 없도록 조심해라·”
“하 걱정마시오· 내 아들 건드린 새끼한테 본때도 못 보여주고 이용만 당해서야 내 쫀심이 상한다 아니요·”
미스틸테인은 사방에서 너울거리는 횃불의 붉은 빛을 걸친 채로 악몽의 용이 구현하는 과거의 편린을 응시했다·
어린 소년은 어느새 로키가 잘못 계산하고 호드가 실수했으며 그가 막지 못하여 아군 오사로 사망해 버린 시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악마 새끼들은 하나같이 지독할 정도로 끔찍했다·
쇄애액!
거기에 아까도 알아본 바지만 화살을 날리는 놈도 참 독했다·
채앵!
“아따 마· 악마에게 휘둘린다꼬 냅다 죽여뿌야 쓰나·”
미스틸테인은 공중에 창을 던져 제 부하가 있는 쪽으로 날아가던 화살을 격추시켰다· 악마를 돕는 꼴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아군에게 창 같은 화살을 맞아 죽는 부하의 모습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게 당신의 악몽이군요· 소중한 사람을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아 해요·]
···적에게 약점을 보여 주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는 알지만 그럼에도 그는 견딜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자· 이렇게 하면 더 흔들려 주실 건가요?]
사람을 뽑아 들 때처럼 소년 형상의 거인으로부터 철시 하나를 꺼내 든 악마가 살아 있는 부하의 가슴팍에 그것을 꽂았다· 과거 발드르가 화살에 맞았던 그 부위였다·
미스틸테인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구겨지고 폐부를 오가는 호흡이 가빠졌다·
“물러나라·”
“으잉?!”
결국 베르세르크가 그의 뒷목을 잡아 그를 상대적 후방으로 던져 버렸다· 어찌나 황당했는지 미스틸테인은 올라오던 분노와 슬픔마저도 잊고 얼떨떨해했다·
“나약한 놈· 냉수라도 뿌리고 오도록·”
“···거 박하기 짝이 없소·”
[흐음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이 느껴져요· 그쪽도 동요하고 있군요·]
그러나 악마는 끈질기고 집요했다· 미스틸테인의 부하를 한순간에 죽여 버린 이가 시체를 발로 차 떨어트리며 빙긋 웃었다·
[아까보다 더 동요하고 있어요· 역시 당신은 이 얼굴을 그리워하고 있군요?]
“····”
머리부터 추락한 시신은 기어이 두개골이 함몰되고 사지가 부러진 채 피를 튀겼다· 대악마가 띠고 있는 추레하지만 깔끔한 백금색의 소녀의 모습과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그래·”
함에도 베르세르크는 그 이상의 분노를 토로하지 않았다· 우롱당했다는 것의 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그 화를 가릴 수 있는 수단을 알고 있었다·
“그 얼굴이 그립고 감히 나를 모욕하는 네가 경멸스럽다·”
『대전사님은 대전사님의 삶을 사세요· 쫓아가는 건 제가 할게요·』
『아 이렇게 되면 나 자신의 능력만으로 그대에게 인정받은 셈이 되는 건가? 뭔가 영광스럽군·』
베르세르크는 눈꺼풀 안쪽 스치듯 지나가는 잔상을 보며 어렴풋하게 웃었다·
“하나 나를 믿는 이들 앞에서 네놈의 같잖은 수작에 당하는 것은 더욱 참을 수 없다·”
그러니 그녀는 분노에 지지 않는다·
[얘들아! 늦어서 미안하다!! 나 왔다!!!]
밤하늘을 밝히는 새빨간 불꽃이 아득한 저편으로부터 날아오기 시작했다·
[으잉 요 왕따시만 한 건 또 뭐랍니까?]
[나는 뭐 아리? 나한테 묻지 마라·]
그리고 1차 확장 지구· 피난을 마치기도 전에 다가온 마왕성에 비명과 절규로 유언을 남기던 자들이 눈물 맺힌 뺨을 조용히 들어 보았다·
[그보다 저 저 봐라· 마기가 이리 득시글거려야 뭐 숨 쉬겠나·]
[오잉· 조상님 요 밑에 사람도 있는데요· 하마터면 깜깜해서 못 볼 뻔했네·]
[뭐? 사람이 있어? 허이고 하여튼 악마 새끼들 진짜 징해요· 저 코딱지만 한 애들 밟아서 뭐 하겠다고·]
그들의 앞에는 어느새 자라난 넝쿨과 풀뿌리 나무 따위가 마왕성을 든 거인의 다리를 옭아매고 있다·
겨우 짓밟히는 것을 피한 자들의 눈에 빛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