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화 그럼에도 복될 것이고 (3)
릴리스는 오만과의 대화가 끝난 순간 환상 마법의 축 하나가 박살 났다는 것을 알아챘다·
[듀라한이 거슬려서라도 뼈 무더기에 가까이 가진 않았을 텐데····]
처음에는 광장에서 싸우던 전사들의 소행인가 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그녀는 광장에서 전투가 벌어질 것을 고려해 축이 되는 사물의 위치를 철저히 조정해 두었으니까·
금방이라도 뼈무더기에 파묻힐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존재하는 화로들이 그러했다·
쨍강!
또 하나의 화로가 산산조각 났다· 눈먼 공격을 고려해 4개까지 사멸해도 버틸 수 있도록 진을 구성해 놨다지만 그렇다고 경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까지 잘 버티던 화로가 갑작스레 부서지는 것이 설마 불운 하나 때문만은 아닐 테니 말이다·
‘···역시 눈치챈 건가·’
듀라한이 튀어나오는 모습을 보여 준 이상 뼈 무더기 근처로 구태여 접근하지는 않았을 거다· 꼭 듀라한이 아니더라도 널찍한 광장을 두고 뼈에 발이 걸릴 수 있는 곳으로 굳이 발을 들이밀 리도 없을 것이고·
거기에 축이 되는 사물의 형상은 밤이라는 환경적 조건을 따져 가며 고른 것이었다· 어둠을 꿰뚫는 능력이 있거나 마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인간이 광원을 일부러 망가트리는 일은 드물 테니 말이다·
쨍그랑!
함에도 3개의 화로가 연달아 파괴되었다면 그땐 의도 자체가 발각됐다고 봐야 함이 옳겠지·
[원인은··· 아 역시 화살이었나·]
괴물이 광장 대부분을 가리고 있는 상태인데도 그것을 넘어 적중시키다니· 하여간 실력 하나는 괴랄한 인간이다· 마법거울을 통해 광장을 지켜보던 릴리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끝까지 방해인 사람이네요·]
쨍그랑!
기어이 4번째 화로가 깨졌다· 이제 하나만 더 부서지면 그가 바깥에 걸어 두었던 환상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다·
[아 당신이 제게 사랑한다 말해 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쨍그랑!
말하기가 무섭게 5번째 화로가 망가졌다· 발 하나를 잃고 넘어지는 세 발 의자처럼 설치해 두었던 마법이 완전히 파쇄된 건 덤이었다·
[그랬다면 저도 당신을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그 뛰어난 솜씨도 그의 것이 되었을 터다·
릴리스는 그 사실에 너무도 아쉬워하며 채비를 서둘렀다· 오만이 그를 부르기도 불렀거니와 그의 안위를 위하려 준비한 안배가 깨진 이상 빨리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인간은 정말 쓸모없이 변수만 잔뜩 일으키는 존재였다·
[아 됐나·]
얼마 지나지 않아 준비가 완료되었다· 지금까지 모은 제물이 구슬 형태로 응축된 것이다·
하나는 거대한 영만을 모아 압착한 것 하나는 자잘한 영과 육을 섞어 압착한 것· 릴리스의 손이 혼탁한 색의 두 구슬을 움켜쥐었다·
[슬슬 돌아오렴·]
그는 다음으로 광장에서 열심히 싸우던 악몽의 용을 거두었다· 악몽에게 실체를 부여하는 것에도 그것이 실체를 갖추게 하는 것에도 각각 힘이 드는 까닭이다·
하물며 지금 물질화한 악몽의 규모는 광장 절반을 아우를 정도이니· 주작이 불태울 때마다 수복하는 데 드는 자원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까지는 그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힘의 투자를 아끼지 않았지만 이 이상의 소모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여기서 힘을 더 사용한 채로 갔다간 오만이 썩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제물 모으기의 결과물을 쥔 릴리스의 다리가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주작이나 그 전사들이 부디 이쪽으로 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사냥감을 잃은 주작과 전사들은 분명 그를 찾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질 터·
그들이 그를 바로 찾아낼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들이 향하는 방향과 그가 걷는 길이 겹치는 불상사는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하니 그런 일만큼은 부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환상이 있었다면 그의 도주가 가려지기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안 되는 상황이니 더더욱·
[···괜찮겠지·]
릴리스는 자신의 불안을 숨기며 검은 망사가 씌워진 손으로 지하실의 문을 열었다· 끼익· 제때 기름칠 되지 않은 문이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안녕 타냐·”
[···!]
그리고 나비가 보랏빛 나비가 팔랑 웃었다·
* * *
호크아이는 열심히 싸우는 이들과 깨진 환상 그것으로 말미암아 드러난 길 공격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한 이들 따위를 바라보았다·
악마의 진체가 시야에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그런가· 상황에 맞지 않게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악마의 본체는 얼마나 강할까요?”
“아마 엄청나게 강하진 않을 걸세· 본신의 무력이 높았다면 이렇게까지 강박적으로 자신을 숨기려 들지는 않았을 테니·”
“하기사 그것도 그렇네요·”
경계심이 높고 준비성이 철저한 개체들은 보통 약한 것들이 태반이다· 강한 개체라고 준비성이 나쁘단 건 아니지만 대체로 봤을 때에는 그런 경향이 크다는 거다·
더불어 지금 같은 상황은 무력을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다· 각 진영이 각자의 사활을 건 채 싸우는 형편이므로 당연한 이야기다·
남는 무력이 있다면 저쪽은 마지막 한 패로서 손에 쥐고 있기보다 한시라도 빨리 방해물을 처단하는 데 썼을 것이다·
“물론 완전히 마음 놓아서는 안 되네· 대악마가 괜히 대악마인 것은 아니니까·”
“그런가요··· 그럼 역시 저 혼자서로는 무리겠죠?”
“···무슨 의도로 묻는 말인가?”
“저는 이 거리를 자유롭게 뛰어다닐 능력이 있으니까요·”
거리의 환상이 깨졌다는 걸 악마가 모를 리는 없다· 또한 자신의 수가 파훼된 이상 악마의 경계심은 훨씬 올랐을 테지·
본신이 약한 겁쟁이들의 특징은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 하나만 망가져도 겁에 몹시 질린다는 점이니까·
“물론 진체가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마저 발각당했다는 건 모르겠죠· 하지만 혹시 또 모르잖아요?”
최악의 경우 대악마는 이 도시에서 아예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녀석이 무엇을 노리는지는 잘 모르나 도시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만큼은 이미 해낸 상태니까·
“만일의 가능성을 대비해 조금이라도 빨리 수색을 시작하는 게 좋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틀린 말은 아니군· 하지만 너무 위험하지 않겠나·”
“지금은 전시인 걸요· 위험을 따지기엔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호크아이는 한시라도 빨리 그 악마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순간 그것과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같은 대지를 밟고 있노라 생각만 하면 속에서 열불이 치미는 탓이었다·
“어차피 두 분도 악마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 하지 않나요? 그래야 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
악마의 위치를 특정하지 못하면 공격 마법을 아무리 준비해도 의미가 없다·
거기에 지금 하는 건 말 그대로 사전 준비이지 발동을 위한 작업이 아니었으니· 마법 시전에 걸리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악마의 위치를 찾는 건 그보다 마법사들에게 더 중요한 일이란 소리다·
요점을 정확히 찔린 아크메이지가 침음을 삼켰다·
“하지만 그대가 자리를 비우면 마법진의 설치가····”
“저는 어디서든 화살을 쏘아 낼 능력이 있어요· 게다가 악마를 발견한다고 해서 마법진을 바로 설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고저 차를 고려한 계산도 해야 하고 악마가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도록 시간도 끌어야 한다· 결국 누군가는 악마를 찾아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전면전은 차라리 주작님이나 저 두 분에게 부탁드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까처럼 화살에 쪽지를 매달아 쏘아 보내면 세 분에게 상황도 전달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도 옳은 이야기예요· 하지만 하나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 셋보다는 넷이 더 낫지 않을까요?”
“그건····”
“악마를 발견하면 효시를 위로 쏘아 올릴게요· 그 시점부터 마법을 준비해 주세요·”
차분하게 설득의 말을 늘어놓으니 두 사람도 결국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그의 말이 억지인 것도 아니고 자세히 따지면 합당함만 가득하다 보니 더는 반박할 의지가 없는 듯했다·
“키히히히· 일이 이렇게 되면 나는 그쪽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낫겠네· 마법진의 촉매 위치도 결국은 내가 계산하는 거니까·”
“그건 그렇네요· 그렇지만 따라올 수 있겠어요?”
“광장에서 싸우고 있는 둘 정도만 아니라면 어떻게든·”
“아 걱정 마세요· 그 정도는 저도 무리니까·”
그럼 이것으로 그가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은 온전히 갖춰졌다· 호크아이는 그 사실에 만족스럽게 웃으며 마지막을 두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몸조심하게·”
“네에·”
대악마를 상대로 조심해 봐야 얼마나 조심할 수 있겠냐마는 여기서 말을 더 길게 해 봐야 의미는 없을 것이다· 호크아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 후 용병과 함께 그 공간을 떠났다·
“어느 쪽부터 수색하는 게 효율적일까요?”
그 빌어 처먹을 악마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호크아이가 그렇게 물으니 용병이 키히히 웃었다·
“광장 주변은 아마 아니겠지· 그 주작이나 미친 전사들이 언제 기척을 감지할 지 모르는데 설마 광장 주변에 거처를 마련했겠어?”
확실히 마법으로 대비해 둔대도 탐지해 낼 것 같은 능력자가 바로 그 둘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마법사가 껴 있다면 쉽게 탐지될 수 있고·
주작도 마기에 민감하니 조금만 빈틈이 생겨도 바로 알아챌 것이다· 악마가 감수할 만한 수위의 위험이 아니란 소리다·
“비슷한 맥락에서 새로 뚫은 길 근처도 아닐 확률이 높아· 허를 찌르기 위해 자리 잡았을지도 모르긴 하지만 리턴 대비 리스크가 너무 크니까·”
환상이 깨진 후 드러난 길은 과연 나선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또한 건물을 무너트리고 그 잔해를 치울 능력은 있어도 부서진 건물의 단면까지 정리해 낼 시간은 없었는지 길 위의 건물들은 한쪽 벽이 뻥 뚫려 내부 모습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상태였다·
용병이 말한 리스크였다·
“그렇다면 광장도 새로 뚫린 길도 아닌 곳을 위주로 탐색하면 될까요?”
“적어도 내 판단은 그래·”
“흐음· 아직도 수색 범위가 좀 넓은데·”
광장의 전사들에게 막 쪽지를 날려 보낸 상태니 저쪽에서도 수색에 도움을 주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한 팀이 감당해야 할 구간의 너비는 여전히 넓었다·
날아다니는 주작이야 수색에 별 어려움이 없을지 몰라도 그들은 뛰어다니는 게 전부이니만큼 더욱 그랬다·
호크아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악마는 저를 알고 있어요· 제가 얼마나 멀리까지 볼 수 있는지 얼마나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는지 알죠·”
“뭐어··· 댁이 아까 쏘는 걸 봤으니 당연히 알겠지·”
“아니요 그것보다 더 확실하고 자세하게 알아요· 그것이 인간을 가장하고 있던 순간에 연이 닿은 적 있거든요· 그러니까 아마도요·”
“···그렇단 말이지· 확신해?”
“네 증거는 댈 수 없지만 확신해요·”
“좋아· 그렇다면 그 점까지 더해서 후보를 더 좁혀 보자고·”
저격에 당하지 않을 만큼 장애물이 많은 곳· 혹은 처음부터 발각당하지 않을 정도로 후미진 곳·
“이 정도로 영역을 좁히면 남는 곳은 얼마 없지·”
키히히히 웃은 로키가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가장 가까운 건 저쪽이야· 저쪽으로 들어서면 활 쏘기 힘들 테니 쪽지만 추가로 더 보내고 저기부터 확인하러 가자고·”
호크아이는 용병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티마뉴크가 그를 처음 데려왔을 땐 몰랐는데 의외로 활약이 넘치는 인재였다· 그 맹한 마법사가 사람 하나는 정말 잘 건져 왔다·
“내가 호드에게 들은 말에 따르면 말이지··· 마기를 효과적으로 가리려면 나무보단 돌을 재질로 쓰는 게 좋아서 말이야·”
“그렇군요·”
“그리고 아마 지하실이 있는 건물을 쓸 거야· 얇은 벽보다는 흙무더기가 좀 더 효과적이니···?”
끼이익·
심지어 그들은 운이 꽤 좋았다· 아니 어쩌면 하늘이 그를 불쌍히 여겨 마지막으로 손을 들어 준 것일지도 모르고·
“이봐 방금····”
“···지금부터 촉매 배치도를 짜세요·”
지하실 열리는 소리를 호크아이는 가만 감상했다· 그것은 그렇게 큰 소리가 아니되 주변이 워낙 고요하여 사방으로 넓게 퍼지는 중이었다·
“전 악마를 잡을게요·”
효시를 쏘아 올린 호크아이의 입술이 희열을 담아 양옆으로 퍼졌다·
* * *
“술래잡기를 하고 싶었다면 거리를 너무 조용하게 만들진 말았어야지· 실수했네?”
릴리스는 인간의 기척을 인지한 순간 몸을 틀었다· 다만 노련한 활잡이는 말보다 화살이 더 빠른 법이라·
아마 그를 발견한 즉시 쏘아 냈을 화살이 어깨와 허벅지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반응이 조금만 늦었다면 심장과 허벅지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어떻게 벌써 여기까지!]
심지어 빌어먹을 궁사는 호흡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1초에 화살을 몇 개나 쏘아 보내는 것인지 화살이 꼭 해일처럼 빽빽하게 날아왔다·
콰악!
당연하지만 릴리스도 나름의 대항은 해 보았다· 마기를 한 움큼 뿌려 벽처럼 펼친 것이다·
사각사각!
그는 나태와 달리 오만에게 전수받은 지식도 있었다· 그러니까 나태처럼 우악스럽고 비효율적으로 마기를 다루는 대신 마기의 특성을 고려하여 힘을 썼단 소리다·
대충 보면 매끈한 벽면처럼 보이되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기의 소용돌이 수백 개가 엮여 만들어진 벽이 날아오는 모든 화살을 갈아 버렸다·
“흠·”
그것을 궁사도 확인했는지 궁사의 속사에 잠깐의 틈이 생겼다· 릴리스는 그 틈을 이용해 빠르게 상념을 잇고자 했다· 예컨대 저것이 어떻게 벌써 찾아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등을 판단하려 했단 거다·
콰앙!
그러나 릴리스의 사고는 폭발음과 함께 날아갔다·
‘설마 주작이 벌써!?’
폭발음이 귀에 들어온 순간 릴리스는 가장 먼저 주작을 떠올렸다· 그러나 주작의 거대한 기운은 아직 이곳과 거리가 있었다· 즉 이 폭발은 주작이 일으킨 것일 수 없다·
‘그렇다면····’
그다음으로 릴리스는 폭발음 사이에 ‘쐐액’ 하는 소리가 아주 작게 껴 있다는 걸 인지했다· 그건 궁사가 화살을 재고 쏘아 내는 소리였다·
‘폭발 화살····’
아무래도 무기를 바꾼 모양이다· 예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정말 성가신 남자였다·
쇄액 쇅 쇅!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상대는 거기서 멈추지도 않았다· 폭발로 시야가 가려진 것 때문인지 혹은 그의 반격을 고려한 것인지 건물 위를 계속 이동하며 화살을 새로 날려 댄 것이다·
이동 경로가 하도 제멋대로라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릴리스로선 경로 예측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방어만 하자니 소모되는 마기와 시시각각 다가올 주작의 존재가 너무 부담스러웠고·
[하는 수 없네요·]
하여 릴리스는 주사위를 던지기로 했다·
[오만이 이 상황을 이해해 줄는지·]
쩌적!
그의 왼손이 구슬을 쥔 순간 지반이 통째로 들어 올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