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2화 그럼에도 복될 것이고 (5)
호크아이의 화살이 악마의 왼손에 닿은 직후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우습게도 악마가 아니었다· 베르세르크였다·
“후퇴해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하다못해 살갗에 돋은 솜털마저 그녀에게 외쳤다· 지금 당장 도망치지 않는다면 죽는다고· 무언가 해 볼 틈도 없이 죽게 될 거라고·
“와악!”
하여 그녀는 반사적으로 미스틸테인의 뒷덜미를 낚아챈 채 주작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본능이 말하건대 이곳이야말로 그들의 생존 확률이 가장 높은 장소였다·
쨍강!
그리고 폭풍이 일었다· 아까 주작이 그들을 대신해 맞아 주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강도로·
“크으윽!”
“크엑!”
[와악!!]
주작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기에 목을 내려 그들을 감싸고 날개를 펴 2차로 보호막을 쳤다· 물론 형언할 수 없는 기운들의 충돌은 그것만으로 가려지지 않았다·
주작 바깥의 공간들이 먼저 증발하듯 사라졌다· 곧 만들어진 건 깊이만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의 반구형에 가까운 크레이터다·
“시··· 부럴·”
“후·”
이어 크레이터가 생긴 자리에 바람이 몰아치듯 들어섰다· 폭발로 인해 일시적 진공상태를 이루었다가 그 힘이 전부 사라지자 몰려오는 것이었다·
베르세르크와 미스틸테인의 머리카락이 역풍을 맞으며 앞으로 마구 휘날렸다·
[아아악!]
베르세르크는 그 바람에 맞춰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대악마가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마땅한 일이었다·
여파에 잠시 노출되었단 이유 하나만으로 북 터지듯 터진 옷과 살가죽이 핏방울을 빵부스러기처럼 툭툭 떨어트렸다·
[어떻 어떻게···!]
그녀는 크레이터 안으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그러자 구덩이의 한가운데에서 바르작거리고 있는 대악마가 보였다· 마치 날개가 젖어 땅으로 추락한 매미 같았다·
깨진 꼬리와 반쯤 날아간 상체 사이로 검은 액체가 질질 흘렀다· 광도 윤도 입체감도 없는 액체였다·
휘익·
그녀는 그것을 보며 들고 있던 할버드를 가볍게 휘둘렀다· 목적은 ‘그녀의 공격이 그녀가 바라는 곳에 정확히 닿는가’에 대한 확인이었다·
“하!”
콰직!
그녀의 할버드가 노리고 있던 바위파편을 쪼개었다· 폭발에 휘말려 매뜬한 단면을 자랑하던 바위였다· 베르세르크의 표정이 날카로운 미소에 잠식되었다·
“역시 이쪽 소행이었나·”
이 사달이 나기 전 악마를 상대하던 과정에서 오감과 직감이 유난히 어긋난다는 느낌이었다·
하나 악마의 짓임을 짐작하긴 하되 파훼할 방법을 몰라 속 썩이고 있던 차· 저쪽에서 날려 준 화살이 모든 걸 개운하게 밀어 버렸다· 베르세르크의 금안이 기분 좋게 번쩍였다·
“참나 저짝은 대체 뭘 했기에 이 꼬라지를 낸 거요?”
그때 미스틸테인이 한 박자 늦게 구덩이로 뛰어들었다· 그쪽도 피부 일부가 터지거나 코피가 흐르는 꼴이 꽤 엉망진창이었다·
“이리 좋은 게 있었음 진작 쓰고 볼 것이지·”
“글쎄 지금 아니었으면 별 효과는 못 봤을 것 같다만·”
베르세르크는 바닥을 기어서라도 도망치려는 악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몸의 절반가량이 날아가서 그런가 워낙 기는 속도가 느려서 딱히 빨리 걸을 필요도 없었다·
콱· 그녀의 다리가 악마의 등을 짓밟았다·
“이 꼬락서니를 한 후부터 무언갈 움켜쥐고 있었지 않나·”
“뭐 그래 보이긴 했소·”
“설마 저 궁사가 우리까지 날려 버리려 했을 리는 없으니 원인은 아마 이쪽이겠지·”
멀리서 화살을 쏘고 있는 인간이 다소 냉담하고 계산이 빠른 성정임은 인정한다· 악마에게 패로 쓰일 것 같자 망설임 없이 아군을 쏘고 보는 행동만 봐도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하나 저치는 냉혹한 존재임과 동시에 사리 분별에도 꽤 밝은 편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화살을 예고 없이 발사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아군 둘까지 죽여 버릴 머저리는 아니란 소리다·
“그건 또 모르는 일이지 않소? 악마를 죽일 수 있다면야 우리 둘 정도는 같이 날릴 만하다 판단한 걸지도·”
“진심인가? 아니면 사감인가?”
“···뭐어 지금은 쪼까 후자긴 하오·”
방금 일어난 대폭발이 진정 화살만의 위력이라면 궁사가 괜히 아꼈을 리 없다· 이 정도 폭발이면 악몽의 용에게도 타격을 줬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는 악몽의 용이 더미라는 걸 몰랐을 때도 이 화살을 안 쓰지 않았던가·
하므로 화살은 원인 그 자체보다는 계기나 촉매에 좀 더 가까울 것이다· 예컨대 마력만으로는 마법 불꽃이 일지 않지만 마력이 있어야 불꽃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처럼·
[안 돼요· 이 이런 건 계획에····]
“이거 등신 아이가· 전투에서 가장 먼저 버려지는 기 바로 계획인 법인디·”
아울러 그들은 악마가 왼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음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다· 속내가 너무 노골적으로 비치다 보니 되레 함정을 의심하기도 했었지만 아무튼·
“패를 잃었나 악마?”
참고로 그들이 그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여지껏 악마의 손이 멀쩡했던 건 별 이유 없다·
함정이라 판단한 채 공격을 꺼리던 그들의 초반 태도가 첫 번째 사유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 오감과 직감은 두 번째 원인이었으며 마지막은 악마의 필사적인 발버둥 때문이었으니까·
[···아니야 아니야 아직 나는!]
당연하게도 그중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세 번째 쪽이었다·
아무렴 싸움 실력이 아무리 형편없대도 생명력이 무한하고 도주가 주 목적인 대상은 그 자체만으로 까다롭기 충분했다· 제 몸의 안위는 도외시하면서 오직 왼손이라는 조그만 표면적을 보호하려 들면 더욱 그렇다·
그것이 이 3분도 안 될 도주극 속에서 왼손 하나를 날려 버리지 못한 이유였다·
“그럼 이제 죽을 때가 됐군·”
그러나 궁사는 그것에 성공했다· 어떻게 한 것인지 무엇을 썼는지 원리가 대체 무엇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 순간 봐야 할 건 악마가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그것을 제대로 복구하지 못하고 있단 사실뿐이었다·
콰직·
그녀의 할버드가 삽시간에 남은 악마의 어깨를 쪼갰다· 미스틸테인의 창도 비슷했다· 지금까진 바로 재생되어 무의미했지만 녀석이 회복의 힘을 잃은 이상 남은 건 오직 처형식밖에 없었다·
“아 내 이걸 까먹을 뻔했구로·”
하지만 베르세르크도 미스틸테인도 악마를 쉽게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이놈에게 당한 부상이나 들인 힘은 그렇다 쳐도 이놈 하나를 잡자고 도시 반 바퀴를 거진 돌다시피 한 건 역시 짜증났던 까닭이다·
“먼저 이거는 죽은 내 아 몫이고!”
[꺄아악!]
“이건 모욕당한 발드르의 몫이다 썩을 악마새끼!”
뭐 미스틸테인에게는 다른 감정도 껴 있을지도 모르겠다· 별로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다·
[좋아· 혹시 모르니까 마지막은 내가─]
그렇게 두 사람이 실컷 화풀이했을 때 주작이 끼어들었다· 악마가 너무 안 죽기도 했고 확인 사살로는 그의 정화 능력이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이쪽으로 던져 주세요! 제발요!”
[─아?]
그러나 주작이 나서기 직전 화살을 쏘아낸 이후 침묵하고 있던 호크아이가 갑자기 고함쳤다·
그는 심지어 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판단했는지 펄쩍펄쩍 뛰며 자신의 손까지 흔들었다· 구덩이 안에 있는 두 사람에겐 안 보였으나 주작에게만큼은 그 의사가 확실히 전달되었다·
베르세르크와 미스틸테인 주작의 시선이 잠시 서로를 오갔다·
“제가 죽이게 해 주세요! 제가!!”
“뭐어 저짝 덕분에 난 결판이니 내는 넘겨도 괜찮소·”
“이쪽도 상관없다·”
[어··· 그 그래? 그럼 넘겨줄까? 근데 얘가 또 튀려 하면 그땐 어쩌게?]
“그거 재밌겠군·”
베르세르크는 숨이 꼴깍꼴깍 넘어갈 것 같은 악마의 등을 다시 한번 짓이기며 입꼬리를 올렸다·
“대악마도 몰이사냥당하면 어떤 기분일지 좀 궁금하니까·”
[우아····]
심술에서 비롯되었으되 순도 100%짜리 악의로 점철된 발언이었다·
* * *
“···!”
호크아이는 구덩이 속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오는 베르세르크를 보았다· 혹시라도 그의 말이 무시되었을까 걱정되었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은 듯했다·
베르세르크의 손에는 엉망이 된 악마가 들려 있었다·
“받아라!”
“키히히 받으라니··· 꼭 던질 것처럼 말하─”
옆에 있던 용병이 말을 채 잇기도 전 베르세르크가 악마를 진짜로 던졌다·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포물선보다 일직선에 가까운 경로로 악마의 몸이 날아왔다·
“키히히히··· 저건 진짜 괴물이야?”
그 괴력에 놀란 건 호크아이도 마찬가지였으나 그는 이내 다른 것을 우선했다·
쿵!
[아흑!]
그러니까 근처에 떨어진 악마에게로 달려가 그놈의 목덜미를 먼저 쥐었단 소리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되는····]
“그거 알아요? 궁사는 그 누구보다 팔심이 강해야 한다는 것?”
호크아이는 악마의 목이 부러지건 꺾이건 그것을 질질 끌며 나아갔다· 정말이지 악마의 목숨줄이 가죽끈보다 질기단 건 이럴 때에 한해서 꽤 괜찮은 장점이었다· 몸의 꼬라지가 어찌 되든 간에 약간의 힘만 남겨 둔다면 얼마든지 살려 둘 수 있으니 말이다·
“···정말 끌고 왔네· 키히힛·”
호크아이는 용병의 감탄을 들으며 대악마를 한 건물 아래쪽으로 던졌다· 그곳이 어떤 의미를 가진 장소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악마가 던져진 자리 주변에는 촉매용 화살이 일정한 형태로 꽂혀 있는 상태였으니까·
“운이 좋죠· 당신이··· 아니 제가 날려 먹은 것인가? 아무튼 저 폭발이 마법진의 반경 바깥에서 일어났다는 게·”
폭발이 마법진 안쪽에서 일어났다면 분명 촉매용 화살 하나쯤은 같이 소멸했을 것이다· 저 거대한 폭풍에 휘말려서 말이다·
하지만 악마는 마법진 반경까지 나가는 데 성공했고 그것이 도리어 지금의 수를 만들어 냈다·
“아니었다면 당신을 죽이는 건 어쩔 수 없이 신수에게 맡겼어야 했을 텐데·”
덕분에 그가 이 마법진이 바로 인간들이 이 악마를 죽일 수 있게 됐다·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호크아이의 두 발이 대악마를 따라 대지에 착지했다·
[그만 그만···!]
“그동안 당신을 얼마나 죽이고 싶었는지 몰라요· 더럽고 추악하고 쓸모없는 당신을·”
[이건 이건 내가 선택한 결말이···!]
“그리고 그런 당신이 만들어 낸 버러지 같은 감정에 덧없이 넘어가는 무능한 모지리들을·”
[아! 이러면 그를 깨울 수조차 없어···!]
“그래도 이젠 끝이에요·”
[흐윽 아니야 아니야··· 나는 나는 최소한 그분께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야만···!]
“이 모든··· 비정상적인 상황들을 끝낼 때가 왔어·”
호크아이는 악마의 몸에 화살을 작살처럼 꽂아 넣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 강인한 손으로 대악마의 목을 옥죄었다·
문득 사방에 박힌 촉매용 화살이 빛나기 시작했다·
“···마법이다·”
그것을 지켜보던 용병이 건물 위에서 중얼거렸다·
“곧 비가 오겠네·”
또한 그는 자신의 망토를 잡아 후드를 당겨 썼다· 쿠르릉 하고 하늘이 울린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툭 투둑·
빗방울이 갑작스레 내리기 시작했다·
[···이 건·]
“아 드디어·”
호크아이는 명을 이어 나가기도 급급해 발악조차 못하는 악마를 두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에게는 해가 되지 않으나 악마에게는 독이나 다름없는 물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치익· 악마의 헌 로브에 비가 떨어질 때마다 로브가 경화되어 부서졌다·
[아니야 아니야!]
“걱정 마세요· 저는 자비로우니까 혼자 죽지는 않게 해 줄게요·”
[아직 아직 나는 사랑을···!]
“그렇다고 썩은 내 나는 단어를 입에 올리진 말아요· 죽기 직전마저 거짓을 담으면 기분 좋아요?”
[사랑은 거짓이 아니야!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너야말로 뭘 아는데?”
호크아이는 악마를 비웃는 한편 용병의 재치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용병이 미묘하게 지대가 낮은 곳을 중앙으로 선정함에 따라 악마를 향해 빗물이 차차 고이는 걸 본 까닭이다·
계속 이렇게 흘러간다면 익사할 수도 있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겠다·
“네가 뭘 아는데·”
[···비참한 사람· 당신은 영원히 사랑을 모르겠죠·]
“제 앞에서 그 썩은 내 나는 단어는 치우라고 했잖아요·”
[가엾고 불쌍해·]
“추잡하고 저열한 악마에게 그런 말을 들어도 별로 의미는 없네요·”
[흐으·]
비가 점점 짙어졌다· 이젠 이슬비가 아니라 장대비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악마의 로브가 완전히 굳고 부서지며 그 안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차피 사랑을 모르는 건 너나 나나 마찬가지인데·”
비치는 것이 없으면 형태를 가질 수 없는 투명한 몸이었다·
[흐·]
그리고 악마가 보이지 않는 얼굴로 웃었다· [맞아요·] 애수에 젖은 긍정이 돌아온 건 바로 다음의 일이었다·
[저도 사랑을 몰라요·]
투명한 몸이 빗물에 서서히 잠겼다· 마법진을 중심으로 내리는 비가 나선을 그리며 중앙으로 모여드는 상황이었기에 그 잠식 속도는 더욱 빨랐다·
[애초에 저는 어째서 사랑이 하고 싶었던 걸까요?]
중력을 거스르며 구 형태로 모여드는 물 웅덩이 속 악마의 몸이 수정 조각처럼 딱딱해졌다· 그 과정이 가속될수록 대악마의 목소리가 얕고 느려지는 건 덤이었다·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네요····]
기어이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이 소름 끼치는 고요와 함깨 정지했다·
색욕의 대악마 릴리스가 사냥당한 순간이었다·
“···외부에서 흘러 들어오는 마력이 끊겼다·”
아울러 색욕의 대악마가 한낱 수정 조각으로 화해 죽은 그 시점·
“외부에서 흘러드는?”
“오만이 벼랑 끝에 몰렸단 이야기다·”
별의 자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녹색 광물은 자신의 검을 잡았다·
“이제 그 존재에게 기다리는 미래는 오직 말라 죽는 것밖에 없으리니·”
가느다란 세검이 달려드는 괴물의 입가를 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