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3화 그럼에도 복될 것이고 (6)
시간을 돌려 성의 움직임이 강제로 멈춰졌던 그때· 계명은 이것을 나름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어째서 성이 이동을 중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오만의 계획 일부일 확률은 매우 낮은 탓이다·
“왜 그리 확신하지?”
“지능을 대리하지 말라 말하는 것도 이젠 귀찮구나· 하긴 어리석은 머리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이 훌륭해 봐야 얼마나 훌륭하겠냐마는· 그 머리로 공연히 그릇된 판단을 내려 대계를 망치는 것보단 차라리 모든 사고를 남에게 맡긴 인형이 되는 게 더 나으리라·”
“····”
그녀는 표독스럽기 짝이 없는 말을 내뱉은 후 용사를 따르던 걸음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목표는 성의 중앙 기관이었다·
“설명이나 해라·”
“오만이 지금 성을 멈추고 얻은 득실을 재어라· 마법의 미음 자조차 알지 못한대도 어떤 것이 우위일지는 대략 감이 잡힐 터·”
마왕성의 이동속도를 가늠해 보았을 때 아직 도시에 도착할 타이밍은 아니다· 기껏해야 1차 확장 지구 좀 더 나아가 봤자 그 중간쯤에 위치했을 테지·
하지만 그런 어중간한 위치가 정말 오만의 목적이었을까?
“모든 행위에는 사유가 있다· 추상적이든 물질적이든 행위를 합리화해 줄 마땅한 이유가·”
하나 이런 애매한 위치로의 고착은 오만의 의도를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하므로 답은 그 반대가 될 수밖에 없다·
“가용 자원의 부족 외부에서의 방해··· 원인이 무엇이든 오만의 계획과는 필시 거리가 있으리니·”
전자라면 마왕성의 운용을 그만둬야 할 정도로 에너지원이 궁하단 뜻이다· 후자라면 이 거대한 부피와 무게를 붙들 만한 무언가가 새로이 등장했단 뜻이고·
문제는 오만이라고 하여 무한한 마기와 신성을 쓸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이니· 그가 일견 무궁무진한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건 그저 그가 자신의 성에서만 싸우기 때문이다· 저장해 둔 힘과 미리 설치해 둔 수천 개의 함정으로 하여금 착각을 불러일으킬 뿐이란 소리다·
진실된 그는 생각보다 전능하지도 않고 경이로울 정도로 전지하지도 않다·
“결국 그 악마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뿐이다· 기존에 다루던 그러나 다른 곳에 사용하던 힘을 당장 급한 곳으로 돌리는 것·”
과연 그 ‘급한 곳’이 마왕성의 재가동 쪽인지 혹은 자신이 진행하는 전투 쪽 투자일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것까지 그녀가 고려할 필요는 없으리라·
지금 그녀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빼돌린 에너지의 향방이 아니라 에너지를 어디서 빼돌렸는가 니까·
“달려라·”
성의 청결이나 관리를 담당하는 등의 마법은 처음부터 정지되어 있었겠지· 그것은 싸움에 있어 필요한 요소가 아니니까·
하나 달리면 나타나는 적이나 처음부터 복도를 배회하는 권속 그들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 함정 따위는 어떨까· 당장의 마기가 급할 오만이 그것들을 남겨 두었을까?
“여긴 용사께서 정화한 곳이─”
“···하·”
“····”
그들의 다리가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새로운 복도를 질주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함정도 새로 설치한 듯한 함정도 어느 하나 발동하는 일이 없었다· 그녀의 예상이 딱 맞아떨어진 순간이었다·
“이 장소는?”
“성의 중추다·”
하다못해 성의 모든 걸 총괄하는 장소마저 그들을 그냥 들여보내 주었다· 단순한 마법적 보안장치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곳을 보호해야 하는 수문장마저 마기 조달을 위해 행동을 정지한 것이다·
“이런 곳이 있었다면 왜 여기를 처음 목적지로 잡지 않았던 거지?”
전 직장 동료의 물음에 계명은 더 이상 한숨도 뱉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벽면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그들 두 사람만으로는 절대 잡아내지 못할 괴수가 무려 세 마리나 붙어 있다·
계명의 기억대로라면 하나하나가 듀라한보다 단단하고 세 마리 다 다른 독을 쓰며 호랑이처럼 날쌔기까지 한 괴수들이었다·
“····”
사고란 걸 하고 있긴 한 건가 싶던 전 직장 동료가 드디어 입을 다물었다· 제 주제라도 알고는 있어 참 다행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뭘 할 거지? 함정이라면 이미 정지한 상태 아닌가?”
“그래· 그래서 다시 작동시킬 것이다·”
“···?”
상대가 가용 자원을 만들기 위해 함정을 멈추는 선택을 했다면 당연히 그들은 그 반대의 짓을 벌여 줘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계명의 손가락이 중추 기관에 닿았다· 지잉· 마력으로 이루어진 입체 지도가 허공에 영사된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징 지잉·
계명은 그 지도를 하나하나 건드리며 무언가를 마구 눌러 대고 변환하고 변경했다· 관련 지식이 없는 사파이어가 점점 벙찐 얼굴을 했지만 구태여 배려하진 않았다·
“할 것이 없다면 다른 이들의 위치나 찾도록·”
되레 그녀는 멍하니 있던 전 직장 동료에게 다른 일거리를 떠맡겼다· 성 내부 관측 프로그램을 시동 그것의 조작 권한을 대뜸 넘긴 것이다·
“아니 이걸 어떻게 하라고····”
물론 이 선택의 이면에는 관측 프로그램의 사용 난이도가 세 살배기 아이조차 쓸 수 있을 정도로 쉽다는 것에 있었으니·
멍청하기 그지없는 전 직장 동료도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결국 해내었다· 그녀가 예측한 것보다는 조금 빠른 성공이었다· 그렇다고 칭찬해 줄 의향까진 없지만·
“용사님께선 계속 전진하고 계시는군· 용병과 신입도 멀쩡히 살아 있는 듯하고··· 모험가께선····”
“찾았다면 각자의 말하라·”
“그러니까··· 위치가····”
무능한 전 직장 동료는 1초 내에 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해서 계명은 바로 관측 권한을 강탈 그녀의 시야 한쪽에 두었다· 에너지 낭비를 위해 함정을 재가동 중이라곤 하나 그게 아군을 방해해선 안 되는 노릇이니 당연한 판단이었다·
순식간에 세 사람의 위치를 파악한 계명이 그들 주변의 함정을 전부 정지시키고 그들의 위치를 강제로 조정했다· 비록 모험가의 위치는 발견하지 못했으나 찾지 못한 시점에서 그가 어디 있을지는 뻔한 일이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라졌어···!?”
“사라진 게 아니라 이동시킨 것이다·”
공간 도약까지 쓸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이 기관에는 그럴 능력과 권한이 없다·
하여 차선으로 택한 것이 바로 성의 구조 전환· 마왕성 구역을 일종의 퍼즐처럼 나눈 후 근접한 퍼즐끼리 교체하는 식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용사 당황할 필요 없다· 작금의 이동은 악마의 수작이 아니라 이쪽에서 한 것이니·”
아울러 계명은 무전기를 이용해 용사에게 말을 걸었다· 무전기의 존재를 잊고 있었는지 화면 속 용사가 퍽 당황한 얼굴로 허둥지둥 움직였다·
─이 목소리는··· 계명? 계명입니까?
“그렇다·”
─어디에 있는 겁니까? 분명 아까까지는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는데····
“성의 중심부 기능 관리실에 있다· 지금까지 안 된 것은 거리가 맞지 않아서였을 뿐이고· 각설하고 현재 그대와 다른 이들의 위치를 각각 파악 보다 빠른 합류를 위하여 성의 구조를 건드리고 있다· 그러니 반항하지 말고 가만····”
그때 전체적으로 파르스름하던 공간이 한순간에 붉은색으로 덧칠되었다· 계명이 재작동시켰던 함정이 차례차례 꺼지기 시작한 건 덤이었다·
─왜 말을 하다 마는 겁니까?
“각 존재의 위치와 최단 경로를 각각 전하겠다· 더 이상의 소통은 불가하니 알아서 판단하도록·”
─잠깐····
그래· 눈앞에서 버젓히 권한을 가져가는 이가 있는데 그것을 가만히 두고 봐서야 어디 오만이라 불리겠나·
“대비하라·”
“또 무엇을····”
“오만이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아마 큰 힘은 쓰지 않을 것이다· 모험가와 대면한 상태에서 마력마저 충분치 못하게 된 처지이니·
“그러니··· 이곳에 본래 자리하던 보안장치가 깨어날 테지·”
하지만 그들에게 큰 힘을 쓸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인정하고 싶진 않으나 그들은 정말 나약하고 미천한 존재니까·
번쩍·
벽면에 잠들어 있던 수호 괴물이 눈을 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깨어난 건 단 하나뿐이다·
콰광!
한데 그것이 바닥으로 발을 내딛기 전 성이 격렬하게 뒤흔들렸다· 성이 정지할 때와는 조금 다른 완전히 성이 내려앉는 듯한 진동이었다·
“읏!”
“흠·”
성 전체가 추락하는 듯한 감각 아래서 계명은 다급히 주변에 있던 무언가를 잡고 버텼다· 사파이어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기에 다급히 주변의 사물을 붙잡았다·
압력이 그들의 몸을 붙잡고 내려찍었다·
쾅!
그렇게 몇 분과도 같던 몇 초가 흘렀을 때 그들은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타이밍 안 좋게 점프했다가 바닥을 구르게 된 수호 괴물은 저쪽 구석에서 막 머리를 흔들며 일어서는 참이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외부에서 흘러 들어오는 마력이 끊겼다·”
“외부에서 흘러드는?”
“오만이 벼랑 끝에 몰렸단 이야기다·”
권속이 두 마리나 도시 쪽으로 출격한 걸 생각하면 아마 외부에서 들어오던 마기의 원천은 사망한 생명체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 그 흐름이 끊겼다는 것은····
“이제 그 존재에게 기다리는 미래는 오직 말라 죽는 것밖에 없으리니·”
계명은 가느다란 세검으로 달려드는 괴물의 입가를 베었다· 두 사람이 용을 쓴대도 상대하기 힘들 게 저 괴물임은 아나 이제 와선 아무래도 좋았다·
“오만 그대· 무한에 가까운 존재에서 유한한 존재로 끌어내려진 기분이 어떻지?”
시간은 더 이상 오만의 편이 아니다·
* * *
─루시퍼 제가 최선을 다했다는 건 기억해 주세요· 뭐 당신이 그럴 리는 절대 없겠지만·
교만한 자 루시퍼는 오랜만에 불린 이름을 두고 눈을 가늘게 접었다· 인간이 빗장뼈라 부르는 부분의 살갗은 마치 달궈진 인두에 닿은 것처럼 열기로 들끓고 있다·
[최선은 성공의 이름 아래서만 칭할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이 불쾌하느냐면 딱히 그렇지는 않다· 릴리스는 나름 그도 인정한 존재니까· 비록 출신이 비천하고 능력에 한계가 있는 만큼 그 인정도 어느 수준에서 그치긴 했지만 아무튼·
[성공하라· 그리하면 나는 그대를 기억하리라·]
그래도 지금만큼은 그가 성공하기만을 빈다· 그러지 않으면 이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던진 도박수마저 일그러질 터였으므로·
[릴리스 아직도 멀었나? ···릴리스?]
하나 믿어 준 것이 무성의하게 릴리스의 목소리는 완전히 끊겨 버렸다· 참으로 불쾌하게도 실패작이 그의 성에 수작을 부리던 순간의 일이었다·
[아벨·]
[···신이시여?]
루시퍼는 실패작의 같잖은 수작을 쳐 내는 한편 힘을 그러모아 기사에게 피할 수 없는 마법을 날렸다· 신성을 듬뿍 담았으니 저쪽도 쉽게 파훼할 순 없을 것이다·
‘아예 죽어 준다면 더 좋을 테지만····’
극상성의 기운을 몇 번이고 뒤집어써도 버텨 내는 정신력하며 마력이 부족해질 때마다 꺼내는 단약까지·
루시퍼는 아마 그의 실패작이 개발했을 그 제품을 떠올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희생 번제를 준비하라·]
[···알겠습니다· 하면 위력은─]
[진정한 죽음을··· 너의 모든 것을 바쳐라·]
그리 선언하는 이의 시야에는 내던진 신성이 전부 사라지고 그것에 당한 기사 한 명만이 남아 있다·
“왜 그러지 악마?”
몸 절반이 사라지고 신성에 얼굴 대부분이 녹아 버린 기사가 또다시 그 단약을 꺼내어 까드득 씹어 삼켰다·
솔직히 현명한 행위는 아니었다· 스스로의 마력을 토대로 만들었단들 마력이 급속도로 소모·보충되는 게 몇십 번이고 반복되면 몸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으므로·
“왜 아까처럼 마법을 난사하지 않지?”
함에도 기사는 그 과정에서 얻는 고통과 부작용은 깡그리 외면한 채 꺼져 가던 불꽃을 다시 지폈다· 루시퍼 자신의 호수를 증발시키고 그의 사자를 더 이상 되살릴 수 없을 정도로 태워 버린 불꽃이었다·
“이제 와서 그 마법들이 불필요하다 여겨진 건 아닐 테고····”
꽃잎처럼 넘실거리는 화염 속에서 기사의 얼굴이 천천히 복원되었다· 재생을 막기 위해 재차 마법을 날려 보았지만 의미 없었다·
“아니면 설마 마력이 다 떨어지기라도 했나?”
불꽃이란 본디 불씨와 장작만 있다면 언제고 타오르는 것이며··· 저 기사는 그 화마를 넘치도록 잘 다뤄 내는 인재였다·
루시퍼의 미소가 기사의 붉은 눈 위로 사르르 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