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화 그럼에도 복될 것이고 (8)
본래라면 그레트헨이 감내했을 고통 속에서 파우스트는 최대한 차분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그만하셔도 돼요·」
아픔이 아픔으로서 다가오지 못하는 건 물론 아니었다· 하나 소년은 고통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아울러 그레첸은 본디 이런 통증을 감당할 필요도 없는 존재였고 말이다·
「그만 쉬셔도 돼요·」
하므로 소년은 실로 침착하게 그 어떠한 아픔을 느끼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조곤조곤 속삭였다· 부조리하게 이 모든 걸 감당해 왔을 사람 앞에서 감히 고통을 논하는 건 소년이 할 수 있는 해도 되는 일이 아니었다·
‘···싫어· 지금 쉬면 지금까지 싸운 게 뭐가 된다고·’
「제가 보기엔 할 만큼 하셨어요·」
‘뭔 소리야· 못 잡았잖아· 그러면 못 한 거야·’
다만 이렇게 말리고 말려도 그레트헨이란 사람은 도통 포기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라·
“하·”
마력을 급속도로 소모하고 회복하고 또 소모하고 회복하고· 그 행위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정상적 상태’의 기준을 헷갈리기 시작한 신체가 또 한 번 붕괴를 일으켰다· 일종의 과부하였다·
그레트헨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의 몸이 비틀거렸다·
「···양쪽 고막이랑 그 부근 기관이 녹았어요·」
‘그래·’
이대로 싸움을 이어 나간다 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는 있을까· 차라리 파우스트 그가 전면에 나서는 것이 더 낫지는 않을까·
몸 일부가 녹고 파괴된 상태에서 싸우는 건 그레첸보다 파우스트 그가 더 익숙할 터인데· 수명이 많이 새긴 하겠지만 어차피 살아 봤자 의미도 없는 생이다· 대악마 말살이라는 대의에 참여할 수만 있다면 이깟 목숨 얼마든지 불살라도····
「제가··· 싸운다고 하면 말리실 테죠?」
‘알면 묻지 마·’
하지만 그레트헨은 너무도 자비롭고 상냥했다· 소년은 기어이 일어서서 검과 불꽃을 휘두르는 이를 보았다· 이런 순간에 이런 말을 해선 안 되겠지만 눈물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한평생 증오스러울 줄 알았던 불꽃이 저렇게까지 신성하게 느껴져도 될까 싶을 정도로·
“염병 상도덕 어디 갔냐· 마법사가 시발 근접도 하네····”
[궁금하구나· 가끔씩 튀어나오는 천박한 말투는 분노의 영향인가? 혹은 그대 자신의 것인가?]
“들리냐 분노? 악마도 인정하는 너의 저열함?”
그레첸의 검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매섭게 짓쳐들어오는 채찍을 쳐 냈다· 채찍 특유의 구부러지는 움직임이 그 검을 꿰뚫고 그레트헨의 어깨를 터트렸지만 소년은 묵묵히 감내했다·
소년이 그레첸의 입장이었다면 이렇게 대항이라도 할 것이 아니라 그냥 얻어맞으며 상대에게 접근했을 것이니 당연했다·
[시발 새끼들이 진짜····]
「닥쳐 그레첸께서 집중 못 하게 되면 너부터 죽여 버릴 거니까·]
[너 내가 지금 괜히 가만히 있는 줄 알아?]
어느 쪽의 편을 들든 그저 뒈질 입장이라 가만히 있는 주제에 뭐라는 건지·
파우스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레첸의 싸움을 다시 지켜보았다· 신에게 기도하는 걸 그만둔 상태임에도 어느샌가 소년의 양손은 곱게 그러모아진 상태다·
“낫이랑 채찍이라· 간지는 챙긴 것 같은데 어디 실력도 그런가?”
[같은 언어를 쓰고 있긴 한 것인지 의문이다마는 그래· 실력에 한해서는 직접 확인해 보면 되지 않겠느냐·]
솔직히 이기지 못해도 좋다· 그의 목숨 따위 꼭 살리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그레트헨이 바라는 것들은 모두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는 그럴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니까·
소년은 그리 생각하며 최대한 정신을 집중했다· 지난 경험으로 하여금 전투 실력은 그레첸이 월등하단 게 입증되었지만 그래도 소년이 무언가 도울 일이 생기진 않을까 싶어서였다·
콰아앙!
그러나 두 사람이 재차 격돌한 순간 파우스트는 잠시 말을 잃었다· 모든 걸 잃었던 그때 그 시점으로부터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소년과 달리 그레트헨은 그 재능을 계속해서 피워 나가고 있었다· 하다못해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이 싸움 속에서조차도·
* * *
나는 낫으로 변한 왕홀과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채찍을 든 채 망토 자락을 날개처럼 펼쳐 낸 이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이건 게임으로 따지면 몇 페이즈로 봐야 할까 싶어서·
[후후·]
하나 그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아 끝났다· 현실에 페이즈가 어디 있어? 그냥 좆같음뿐이지·
샤아아악!
오만은 대지로부터 발끝을 대략 10cm 정도만 띄우는 가벼운 도약으로 내게 접근했다· 정말 쓸데없이 우아한 자태였다·
연이어 ‘촤악!’ 하고 오만의 날개 망토 자락이 내가 있던 자리를 휘둘러 쳤다· 두꺼운 털 망토라서 그런가 허공을 휘저을 때의 두께감이 엄청나게 묵직했다· 그런 주제에 모서리 부분의 깃털은 칼처럼 날카로워서 마냥 둔탁하지도 않았고·
촤아악!
여기에 채찍이 날아왔다· 뱀처럼 두껍고 광택이 없는 새까만 가죽 채찍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계명이랑 자주 대련해 볼 걸 그랬나·’
채찍을 주무기로 쓰는 상대는 지금껏 계명밖에 본 적 없다· 그러다 보니 대응하는 요령을 영 모르겠다· 채찍을 상대하는 것 자체도 너무 오랜만이라서 계명을 상대할 때 쌓았던 경험치도 거진 날려 먹은 상태고·
파앙!
그래도 채찍이 날아오는 경로에 맞춰 마기 선을 형성 그걸 터트려 미리 차단하는 방식의 방어는 몸이 기억해 냈다· 나는 어깨의 터진 살갗을 대충 수습하며 검을 되잡았다·
[세련된 방식의 방어로다·]
쾅!
내가 검을 고쳐 쥐는 동시에 대지를 아주 조용조용히 걷던 오만이 도약하여 내게 접근해 왔다· 파앙! 낫과 나의 검이 부딪쳤다· 그녀를 기점으로 잔혹하리만치 빛나는 신성이 터져 나온 건 그 다음 일이었다·
[하나 얼마나 버티겠는가?]
쓰는 무기가 무기다 보니 동작 하나하나가 큼지막하다· 하나 그런 단점도 이어지는 공격이 있다면 상쇄돼 버리기 마련이라·
나는 신성에 저항하고자 마기를 끌어올렸다· 여과기는 진즉에 소멸한 상태라 이것밖에 기댈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촤아악!
오만의 날개 망토가 또다시 나를 베고자 달려들었다· 내 몸이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거리가 벌어지자마자 채찍이 휘둘러진 건 마땅한 수순이었다·
파앙! 팡!
끄트머리에 마법을 매단 채찍이 내려찍는 바닥마다 시간차 폭발 마법을 설치했다· 내가 근처로 다가가면 터지는 성질의 마법이었다·
‘어떻게 근접으로 가도 싸움을 이리 더럽게 하냐·’
나는 함정을 피해 와다다 달리다가 차라리 채찍을 끊어 버리는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마침 사뿐사뿐 걷던 오만도 도약으로 단숨에 다가오며 낫을 휘둘렀다· 이번엔 신성이 따라오지 않는 공격이었다·
까앙!
역수로 쥔 라텔이 내 팔꿈치와 맞닿은 채로 등쪽에서 낫을 막아 냈다· 끼이익· 낫과 라텔의 마찰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촤악 촥!
다만 그 대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저쪽은 채찍을 들고 있기도 했고 날개도 있어서 가능한 연계 공격이 남아도는 까닭이었다· 정직하게 두 손만 가지고 싸우는 이쪽과는 참 대비되는 치사함이었다·
날개를 피해 물러난 내 다리가 바닥에 설치된 함정을 피해서 또 한 번 급급한 움직임을 보였다· 저쪽이 함정의 위치를 참 절묘하게 배치했기에 경황은 더욱 없었다·
암만 생각해도 저쪽이 원하는 대로 유도되는 듯한 느낌에 내 눈이 가늘어졌다·
콰앙·
결국 나는 한 대 맞는 걸 감수하며 반대쪽으로 뛰었다· 함정을 피해 지나온 길을 밟으면 또 당할 일도 없었기에 한 대 맞은 것만 빼면 사정은 훨 나았다·
휘이이익!
은은하게 웃던 오만이 내게 재차 채찍을 휘둘렀다·
콰앙!
더는 함정 깔기를 못 참겠다 싶어 나는 그 채찍을 손으로 붙잡았다· 폭발 마법이 나한테 설치되는 바람에 건틀릿과 손바닥이 터져 나갔으나 억지로 힘을 주니 어떻게든 됐다·
팔뚝으로 원을 그리듯 움직여 빠르게 채찍을 휘감은 내 팔이 오만을 강제로 끌어당겼다·
참격·
압축하고 또 억제한 마기의 선이 내 전방을 향해 쏘아졌다· 파앙! 상도덕 없는 오만은 그런 참격을 두고 내가 채찍을 막을 때 썼던 방식을 고스란히 따라 했다· 먼저 터트림으로써 마력을 극한으로 아끼는 여기에 싸움에도 지장 없게 만드는 방어방식이었다·
“인간을 따라 하는 꼴이 우습군·”
[미천함과 현명함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이니· 원한다면 그대 역시 나를 따라 해도 좋다·]
시발 못 따라 할 걸 아니까 허락하는 것 보소·
나는 기억하고 있는 흐름 몇 개를 진짜 따라 해 볼까 고민하다 이내 포기했다· 자칫했다가 여기서 마력 역류 터지면 망하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그사이 오만은 자신의 채찍을 고이 놓아 준 후 손가락을 까닥였다· 내 팔에 휘감긴 채찍이 순식간에 까만 뱀으로 변하며 내 팔과 어깨를 타고 올라왔다· 진짜 가지 가지 했다·
사르륵!
오만의 몸이 때를 놓치지 않고 다가와 낫을 휘둘렀다· 그가 휘두르는 방향에 맞춰 전방으로 신성이 퍼져 나왔다·
어질
처음 나는 그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타이밍도 더럽게 못 맞춘 단약 부작용이 평형감각을 건드리며 나는 반강제로 방어 태세로 돌입했다· 대처가 늦은 만큼 약간의 피해를 입은 건 덤이었다·
어깨를 타고 오른 뱀이 이젠 목까지 조르기 시작했다·
「그레트헨!」
아니야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아·
나는 불꽃으로 뱀을 불살라 버리며 라텔에 마기를 주입했다· 챙! 낫 특유의 곡선과 안쪽에 존재하는 예리함을 이용해 나를 수확하려던 오만의 공격이 막혔다·
[호오·]
나는 둘로 나뉜 라텔을 붙잡은 채 내가 잊고 있던 모든 공격을 총동원했다· 이미 타격을 입었고 어차피 좁혀진 거리라면 지금 딜을 박아 버리겠다는 무식한 마인드의 발로였다·
낫을 막고 있던 쪽 검이 기둥이 되어 내 몸을 들어 올렸다· 보다 정확힌 한쪽 팔에만 오롯이 의지하여 띄운 것이나 아무튼 대충 그랬다· 묘기를 부리듯 한 검에 매달린 내 몸이 다리로 오만의 날개 망토를 쳐내고 다른 검은 다시 한번 참격을 끝에 매달았다·
[마치 광대와 같구나·]
하나가 아닌 세 개의 갈래가 튀어나오자 오만이 다급하게 방어막을 펼쳐 냈다· 콰앙! 어질어질할 정도의 굉음과 무형의 파동이 일었다· 나와 오만을 둘 다 넉백시키는 위력의 파동이었다·
다만 막힐 것쯤은 이미 예상했기에 나는 그 넉백을 이용하여 공중제비를 돌았다· 촤아악· 대지에 발이 닿았음에도 기어이 더 미끄러지고 만 몸이 대지에 구릉을 남기며 앞으로 쏘아졌다·
나는 이제부터 힐러를 포효시키는 극딜러다 시발·
「···그 지금까지와 차이점이 있나요?」
‘아니·’
짜증나니까 그냥 아무 말이나 지껄여 봤을 뿐이다· 이런 거에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 세상 못 산다·
나는 조금이라도 기분을 전환하고자 온갖 잡념을 떠올려 보며 검을 휘둘렀다· 내 쌍검과 오만의 날개 망토가 부딪쳤다· 창! 차앙! 소리만 들으면 이게 털 망토인지 강철 망토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휘익!
두 쌍의 날개 자락을 어떻게든 쳐 내니 이제 그 사이에 숨어 있던 낫이 튀어나왔다· 두 손으로 길게 잡고 아래에서부터 위로 그어 버리는 경로였다·
[···!]
근데 내가 맞고 때리겠다 하면 네가 뭐 어쩔 건데·
나는 두 개로 나뉜 라텔을 하나로 합친 후 손가락 위에 둘렀다· 끝이 짐승의 발톱처럼 구부러지고 날카롭게 벼려진 손가락 갑옷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촤아악!
거리를 두고 마기를 쏘아 내면 기가 막히게 방어막을 만들어 내는 게 놈이다· 하니 그럴 바에야 간극이 0에 수렴하도록 좁혀 때리고 만다· 내 손이 오만의 심장과 얼굴 부분을 갈랐다· 이글거리는 불꽃은 마치 꽃잎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며 닿는 부분부분을 집어삼킨다·
휘익!
오만이 다급하게 신성을 뿌리며 뒤로 도약했다· 대개 하늘하늘한 느낌이던 점프가 유난히 다급해 보이던 순간이었다·
[···상처를 입어 본 것이 얼마 만인지·]
내 왼손은 오만의 옆구리를 내 오른쪽 검지와 중지는 기어코 오만의 뺨을 긁어 내는 데 성공했다· 옆구리에 비해 뺨 쪽은 비록 깊이가 깊지는 않았으나 검은 핏방울이 흘러내릴 수준은 되었고 말이다·
뒤로 물러난 오만이 낫을 한 손으로 비스듬하게 쥐며 다른 손으론 자신의 뺨을 감싸 쥐었다·
[기이하지· 그대는 분노와 썩 다른 결의 인간일진대 결국 싸우는 방식은 비슷해·]
그런가? 하긴 기억 회상 때 본 분노도 맞고 때리는 파 같긴 했다· 어떤 악마보다 우월한 재생력 복원력을 믿고 화력으로 밀어붙인다 해야 하나·
“그래서 뭐·”
근데 뭐 어쩌라고· 맞고 때릴 수 있는 맷집이 부러워? 그러면 너도 맞고 때리든가· 존나 치사하게 마법마법마법신성신성신성 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무술로만 붙자고·
「그 그레트헨·」
나는 심호흡을 하며 왼쪽 손등을 쓸었다· 라텔이 또 형태를 바꾸며 다시 검으로 돌아왔다· 한 손에 쥘 걸 고려한 길이의 롱소드였다·
“하 시발· 원래는 오른손잡이에 가까웠는데·”
검을 쓸 때만큼은 이젠 왼손이 더 익숙하다· 라텔 위로 마기가 사륵사륵 덧씌워졌다· 마력 하나하나가 아까운 상황이었기에 모든 걸 통제하에 넣어 한 점 흘림 없이 주입하는 건 덤이었다·
“너희만 족치면 그것도 끝나겠지·”
문득 단약을 먹어 마력을 더할까 말까 고민하던 그때· 나는 액상 포션에 생각이 닿았다· 단약으로 정제할 시간은 없고 이왕 만들어 둔 거 혹시 몰라 들고 온 액상 포션이었다·
[과연 그렇겠느냐?]
···그거 어차피 내 마력이잖아· 그러면 굳이 마시지 않고 그냥 그 자체로 제어해 봐도 되지 않나?
[기억은 영원하고 잊히지 않는 것은 족쇄가 되는 법일진저·]
어차피 저놈을 상대하면서 액상 포션까지 마실 시간은 없다· 시도하는 족족 방해가 들어왔기에 확신할 수 있다·
[그대가 안식을 갖는 일은 영원히 없으리라·]
그러면 하나쯤은 낭비해도 괜찮겠지· 나는 도약하며 다가오는 오만을 보며 포션을 꺼내 던졌다·
쨍강!
산산조각 난 유리병이 마치 보석 비처럼 사방으로 비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