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8화 그리하여 복될 것이며 (1)
“잠깐 사탄이 이미 소환된 상태라고?”
사탄을 상대하지 않고도 넘어갈 수 있으리란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래·”
“···대체 어디에?”
하나 이미 소환된 상태라니· 예고도 없이 벌써 등판해 있다니!
나는 계명의 말을 듣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실제로 현기증이 일었는지 모른다·
아까보단 덜해졌을지언정 이따끔씩 신체 일부가 소실되는 건 여전했으니까·
“본관에 이르기 전 입구· 아마도 용사의 합류를 막고자 손쓴 것이겠지·”
“···그 무슨 역할 바뀐 것 같은 소리를·”
악마에게 있어 제일 위협적인 게 용사인 건 사실이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 상관을 합류 방해용 장애물로 던져? 이거 정말 맞는 거냐?
“오만과 사탄은 엄격한 서열로 정리된 수직 관계가 아니다· 힘의 총량으로 따지면 사탄이 우세할지언정 그들이 힘을 합치게 된 것은 결국 거래와 협약을 통한 것이니· 오만이라면 충분히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아니 그래도····”
사탄은 그걸 또 넙죽 받아 주는 거야? 진짜_끝_라스트_최종보스 가오 다 떨어지네·
“···이상한 데서 자존심 굽힐 줄 아는 놈들이군·”
“평상시였다면 모를까 이 싸움에 걸린 것의 가치는 자존심 하나와 저울질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
그건 그런데 보통 최종보스 하면 끝까지 방심해 주는 게 국룰이잖아· 하여간 진짜 쉽게 가는 놈들이 없다니까·
나는 울컥 올라온 피와 울분을 입 밖으로 뱉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마음 같아서는 냅다 돌진을 박아 버리고 싶었으나 거지 같은 몸 상태가 그 선택지를 가로막았다· 정말 쓰레기 같았다·
“경 괜찮다면 부축을 부탁해도 되겠나·”
“부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명하시면 받들겠습니다·”
아니 나도 댁이 멀쩡했으면 부탁 안 하고 양해를 구했겠지· 근데 지금은 그쪽도 부상을 입은 상태잖아·
나는 이마가 까지고 팔뚝과 허벅지에 자잘한 상처를 달고 있는 사내를 일별했다· 허벅지의 자상이 조금만 더 깊었어도 이런 부탁은 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내 몸 상태가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나는 미안함을 살짝 담은 채 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나보다 키가 한 뼘 정도 작아서 팔 걸기는 딱 좋았다·
“···소환된 사탄은 얼마나 강할 거라 보지?”
“나로선 감히 잴 수 없다· 하나 성의 이동이 중지된 만큼 그에 쓰이던 모든 에너지도 그쪽으로 흘러 들어갔을 터· 어느 정도는 각오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걸음을 빨리 해야겠군·”
지금도 부축받은 상태에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긴 하지만 그래도 발을 더 서둘러 놀리는 게 좋을 것 같다·
나와 사파이어 계명의 다리가 박살 나고 무너진 홀을 황급히 벗어났다·
* * *
[잉 조상님 이거 멈췄는디요·]
[드디어?]
한편 성의 바깥·
육귀와 산군은 가동을 중지한 거인을 두고 한숨을 돌렸다· 그들이 가진 바 모든 힘을 쏟아부어 거인의 발목을 붙들긴 했으나 그것도 갈수록 힘들어지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히유··· 인자 쫌 편해지겄네요·]
물론 거인이 정지했다고 해서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거인이 짊어진 성에선 여전히 거대한 마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혹 무슨 문제가 발생했습니까?”
[읭?]
그때 산군과 육귀를 돕겠다며─정확히는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그들의 곁에 부득불 남은 인간이 입을 열었다· 모두가 대피하는 가운데 한 마법사를 필두로 이곳에 남는 걸 자청한 이단심문관 중 하나였다·
“갑자기··· 엄청난 진동이····”
[아·]
다니엘이라고 했던가? 아니 맥시였던가? 아니면 거 뭐였지 딴 놈인가?
산군은 회색 머리 이단심문관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런다고 해서 구분이 쉬워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의미가 아예 없진 않았다·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이목구비 속에도 화상 자국만은 어찌어찌 발견된 덕이다·
[저거가 멈춰서 그렇··· 아 말 안 통하지·]
회색 머리 하면 기사님 생각이 나서 그런가· 회색 머리 인간이라면 다 말이 통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있다· 실상은 절대 아니지만·
[야 정화하러 안 올라가냐?]
[아 쪼매 기다려 달라 안 캅니까· 가도 설명은 하고 가야지요·]
아무튼 그러한 이유에서 산군은 꼬리 끝으로 열심히 글자를 적었다· 기사님과 대족장 간 글월이 오갈 때 혼자만 못 읽고 끙끙댄 것이 서러워 기어이 외우고 만 바깥 인간들의 문자였다·
“악마··· 집··· 멈추다··· 아 저것이 드디어 멈춘 것입니까?”
산군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다니엘의 얼굴에 안도감이 어렸다· 사뭇 이른 감이 있는 안심이었다·
“그럼 악마도···?”
[어 아마 아이겠지요?]
[절대 아니지· 아직도 마기가 지랄이잖냐· 못해도 대악마급 한두 놈은 살아 있을 거야·]
역시 그렇겠지· 산군은 육귀의 긍정을 포함해 이번에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다니엘의 얼굴이 바로 복잡해졌다·
“안쪽에 진입하신 분들은 과연 괜찮으실지·”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지 다니엘은 산군과 육귀가 힘을 합쳐 부른 초목에 손을 대었다· 거인의 하반신을 옭아매듯 자라난 초목은 마치 거대한 콩나무를 연상시킨다· 지독하게 질기고 억센 거대 콩나무였다·
[글게 말이다··· 진짜 기사님 다쳤으면 우야죠·]
[넌 걔를 봐 놓고도 그런 소릴 하니? 걔는 악마를 죽이면 죽였지 죽을 놈은 아니야·]
[그거는 그런디··· 캐도 마왕이잖십니까· 갸가 기사님보다 쎄믄 우째요····]
[떽!!! 그런 불길한 소리 하는 거 아니야!]
아울러 다니엘의 뒤편에선 육귀가 산군을 달달 볶았다· 내용만 들어 보면 믿음은 육귀가 더 깊어 보일 지경의 대화였다· 현실은 정반대인데도 불구하고·
구오오오오오─!
[···!]
그렇게 두 존재가 나이에 맞지 않게 촐싹거리던 차·
뱀과 거북이의 고개가 동시에 들렸다· 마법사의 지시에 따라 주변에서 헐레벌떡 움직이던 이들이 화들짝 놀랄 정도로 갑작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바 방금 뭐랍니까?]
[···좆됐다 진짜 좆됐다· 저거 아무리 생각해도 대악마급 마기가 아닌데?]
[그 그 그럼 진짜 마왕인지 뭔지가 나타난 깁니까!?]
[아오! 내가 이래서 불길한 소리는 하지 말랬잖아!!]
[그치만 충분히 할 만한 생각─ 아악!]
비늘을 물린 산군이 긴 혀를 빼쪽 내밀며 비명을 질렀다· 대뜸 시작된 포효에 주변인들이 당황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육귀가 산군의 몸뚱어리를 잘근잘근 씹었다·
“성이 멈췄다는 건 안쪽에 변화가 일었다는 의미일 테죠·”
그사이 도움 안 되는 사람들의 후퇴를 지켜보던 마법사─계속되는 보라뱀─이 자신의 한쪽 어깨를 붙잡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거기에 더불어 저 광폭한 마력의 흐름은····”
그는 남은 이들에게 내려 주던 지시를 멈추고 두 위대한 존재를 돌아보았다·
“두 분 혹 안쪽으로 진입하실 것인지요? 만일 진입할 예정이시라면 한 가지 사실을 확인 부탁드립니다·”
[···응? 방금 쟤 뭐랬니?]
[어··· 뭐 좀 확인해 달라 칸 것 같은디요· 아잇 이게 조상님 때문입니더· 제대로 못 들었잖십니꺼·]
[너 지금 내 탓 했니? 진짜 깨물어 부수기가 뭔지 보여 줘??]
[아이고! 조상님이 후손 잡는다!]
“···만일 지금 마왕이 소환된 상태라면 아마 저곳엔 그 존재를 붙드는 쐐기가 있을 겁니다·”
[아이고오오!!]
“하니 그 쐐기를 발견하거든 그것에 새겨진 문자를 조사해 주십시오·”
그는 두 신수가 아웅다웅 싸우건 또는 비명을 지르건 모조리 무시한 채 제 말만 쭉 이었다· 저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할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조사?]
뭐 그 자신감은 실제로도 완전히 틀리지 않았다· 육귀의 고개가 보라뱀 쪽으로 향했다·
[힝· 맨날 지만 갈구시고·]
[입 좀 다물고 말이나 전해 봐· 우린 인간들 마법 모른다고·]
[히이이이잉·]
산군은 우는 소리를 내면서도 꼬리는 착실히 움직였다· 사람 하나만 한 문자가 나무에 음각으로 하나씩 새겨졌다·
“걱정 마십시오· 대조할 것은 드릴 테니까요·”
그렇게 단순한 단어의 나열이 만들어지자 뜻을 곱씹어 본 보라뱀이 어깨에 얹어져 있던 손을 움직였다· 사르륵· 비늘 돋은 손이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던 비녀를 뽑았다· 비녀의 끄트머리엔 장식처럼 보이는 빳빳한 종이가 있다·
“아울러 여기 적힌 문자와 동일한 것이 새겨져 있을 경우··· 어떤 방식으로든 지대의 고도를 높이거나 낮춰 주십시오·”
[고도를?]
“꼭 높이로만 변화를 줄 필요는 없습니다· 지대를 왼쪽으로 밀어 버리든 오른쪽으로 밀어 버리든··· 하다못해 앞뒤로 옮겨 버리든· 쐐기의 위치를 바꾸기만 하면 되니까요·”
저게 대체 무슨 소리람·
육귀는 비녀 장식에 새겨진 문자를 눈에 담으면서도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눈치 좋게 의미를 알아들은 이가 희미하게 눈 끄트머리를 접었다·
“공간좌표를 조작하여 중첩시키는 마법의 특징에는 한쪽의 좌표가 달라질 때마다 새로운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있지요· 그리고 제 예상이 맞는다면··· 꽤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뭔 소리냐고·]
결국 알아듣지 못한 두 신수는 비녀를 든 채 마왕성 위로 꼬물꼬물 기어 올라갔다·
* * *
한편 호크아이는 수정 조각으로 화한 대악마와 함께 물속에 잠겨 들었다· 그가 있는 곳은 분명 지상이었지만 마법진이 내리는 빗물을 끌어당겨 구 형태의 호수를 빚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마법진 중앙에 있는 그는 속절없이 모여든 웅덩이에 휩쓸렸다·
“···키히히히! 이봐 죽으려고 작정한 거야?!”
그리고 그런 그를 용병이 강제로 끌어냈다· 그 과정에서 물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두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저 물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요·”
마법사는 빛의 힘이 담긴 비를 내릴 것이라 했고 그건 보통의 인간한테 별 의미가 없는 마법이었다· 호크아이는 멍한 얼굴로 그 사실을 피력했다·
“그건 나도 알아 머저리· 근데 저 물이 과연 익사까지 방지해 줄까?”
“····”
“아닌 걸 알면 다물고 따라와· 나는 아군의 마법에 휘말려 죽고 싶지 않다고· 키히히히·”
빛이 담긴 물 자체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지만 물에 잠겨서 장시간 호흡을 못 하게 되는 건 별도의 문제다· 그 허점을 지적받은 호크아이의 입이 다물렸다·
“빠르게도 커지는군·”
그렇게 호크아이가 반발을 멈추자 용병은 그를 끌고 거리를 내달렸다· 악마를 삼킨 호수가 점차 커지고 있는 상태기에 달리 수가 없었다·
[와 이거 뭐야?]
그때 훌러덩 날아온 주작이 그들을 부리로 집어 등으로 옮겨 주었다·
“로키!”
“···! 대장!”
[마법사 애들 무리한 거 아닌가 몰라·]
“혹시 모르니 대악마의 시신은 내가 가져오지·”
[아 부탁 좀 할게· 빛의 힘이 담겼다 해도 물은 좀····]
미스틸테인은 용병을 붙잡아다 자신의 망토로 꽁꽁 싸매··· 지 않고 주작의 깃털에 냅다 묻어 버렸다· 너덜너덜해진 것도 모자라 피에 절여진 망토보단 주작의 따끈한 깃털이 젖은 몸을 말리는 데 더 효과적이라 판단한 듯했다·
“고생혔다·”
“···응· 대장도 고생했다고 키히히히·”
호크아이도 젖은 몸을 말리기 위해 주작의 몸에 기댔다· 딱히 삶에 미련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왕 산 거 얼어 죽는 것도 영 싫었기 때문이다·
“···이제 끝난 걸까요?”
별개로 악마의 새와 악마의 용 대악마 하나를 잡았다· 하면 그들의 일은 이것으로 끝일까?
[글쎄다· 저쪽에서 진하게 나던 마기도 어찌어찌 정리된 거 보면 도시 내 악마는 다 잡힌 것 같긴 한데····]
“거기도 잡혔나요?”
그러고 보니 반대쪽 구역에서 악마 둘이 싸우던 것도 있었지· 그건 과연 어떤 결말이 났을까? 주작의 말만 들으면 그쪽도 어떻게 결론은 난 듯한데·
[몰라· 일단 느껴지는 건 없는데··· 그래도 가 보긴 해야겠지·]
탈진했을 마법사 애들만 챙기고 거기 들러 보자며 주작이 날개를 한차례 팔락였다· “다녀왔다·” 마침 투명한 존재를 어깨에 얹은 베르세르크도 주작의 등으로 복귀했다·
“거 만약 저짝까지 해결된 상태면 그땐 우짤거요?”
[어? 저쪽까지 해결된 상태면? 어··· 어··· 그때는····]
“그땐 성으로 간다·”
미스틸테인의 물음을 두고 주작이 잠시 머뭇거렸을까· 베르세르크가 그를 갈음하여 결정 내렸다·
“저곳의 싸움은 아직도 진행 중일 테니·”
피와는 조금 다른 색감의 빨간 액체를 꿀꺽 삼킨 이가 눈을 빛냈다·
“···맞네요·”
아울러 호크아이 역시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제 옆자리의 부재를 깨달았다·
“많이 늦긴 했지만 이것도 처리했으니까· 이젠 크러셔의 곁으로 돌아가야겠어요·”
문득 크러셔가 죽어 버렸으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곁에 없으니까 너무 불편해·”
뭐 만약 그리되었단들 큰 상관은 없다· 그저 그가 그녀의 옆자리에 누우면 될 일이니까·
“어서 보러 가죠·”
주작이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