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화 그리하여 복될 것이며 (2)
크러셔는 몇 번째인지 모를 새로운 정원 안쪽에 악마용 미끼를 던졌다· 그러곤 그곳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건물의 창을 깨고 어린 기사를 안쪽에 밀어 넣었다·
“이걸로 3분·”
악마용 미끼가 효과를 발하는 시간 동안은 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크러셔는 그녀 자신만의 생체 시계를 재며 기사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대충 고급스러운 방의 정경이 보였다·
“허억 허억·”
“각성제 더 주랴?”
“아 니요·”
“그래·”
설마 방 안까지 독가스 함정을 두진 않았겠지· 크러셔는 편협하지만 나름 근거 있는 판단하에 얼굴에 쓰고 있던 방독면을 떼어 냈다· 불편했던 호흡이 단번에 편안해졌다·
“킁 킁· 좋아· 여긴 독 없어· 너도 벗어·”
“···네!”
그녀의 말에 어린 기사도 방독면을 벗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보다 훨씬 더 거칠고 낮은 숨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폐활량이 형편없네· 살아 돌아가면 더 키워라·”
“···넵!”
“말은 잘 들어서 좋네· 아니면 북부 출신이 아니라서 그런 건가? 북부 기사들은 하나같이 싸가지가 없어서 별로였는데 너는 말 잘 들어서 좋네·”
크러셔의 험담에 어린 기사가 약간의 미소를 지었다· 산소 부족으로 머리가 몽롱해서 그런가 애가 무슨 말을 해도 대답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나름 귀엽다면 귀여운 모습이었다· 북부 애새끼들은 숨이 차건 말건 떽떽거리거나 입 다물고 눈으로 야려 볼 텐데·
“2분 남았다·”
그보다 악마용 미끼를 던졌다곤 하지만 너무 조용한데· 크러셔는 창밖에 그녀가 비치지 않도록 유의하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따라오는 놈이 어째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 진동이 원인인가···?’
악마용 미끼는 만능이 아니다· 지능이 높은 놈들은 미끼가 있건 말건 그들을 먼저 노렸으니까· 실제로 앞선 세 번의 사용에서도 꼭 너덧 놈 정도는 그들에게 반드시 따라붙었고·
함에도 지금은 너무 한적하다· 크러셔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니면 다른 놈들이 성의 주인 되는 놈을 벌써 잡았다거나····’
어린 기사는 아직 이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허리를 굽히고 무릎에 손을 얹은 채 가쁜 호흡을 몰아쉬던 기사가 긴 혓바닥을 내밀었다· 옷가지에 막혀 빠져나가지 못한 열기를 혀로 배출하려는 듯했다·
“혀 마른다·”
그녀는 어린 기사가 빠르게 회복할 수 있도록 자신 몫의 물통을 넘겼다· 처음 기사는 거절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렸으나 끝내 순순히 받아들이는 쪽으로 갔다·
벌컥 벌컥·
어린 기사가 물을 들이켜는 사이 크러셔의 눈이 다시 한번 바깥을 힐긋거렸다·
“아 호크아이가 있었어야 했는데·”
난전 속에서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움직이는 것쯤은 익숙하다· 그러나 전투 전체의 판도를 눈치껏 확인해 가며 움직이는 건 영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녀의 성정이 단순한 것도 한몫했지만 결정을 대신 내려 주는 친구가 항상 곁에 있던 것도 분명 이유 중 하나였다· 크러셔의 손이 자신의 머리를 박박 긁었다·
“방금 무어라 말하셨습니까?”
그사이 어린 기사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말 중간중간에 헉헉거림이 섞여 있었지만 적어도 길게 말할 정도의 기력은 차린 듯했다·
크러셔의 시선이 상처투성이 기사의 목덜미로 향했다· 여전히 허리를 낮추고 있어서 망토와 옷깃 사이로 목과 가슴이 설핏 보였다·
“···?”
“···별말 아니었어· 무시해·”
“넵·”
애인 있나 보네· 크러셔는 부디 기사의 연인이 색욕의 추종자가 아니길 빌어 주며 몸을 휙 돌렸다·
“그보다 숨 다 돌렸냐?”
“아 네·”
“그럼 가자· 3분은 아직 안 됐지만··· 느낌이 좀 이상하거든·”
악마들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긴 하나 그게 일시적인 일인지 지속적인 일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원인을 추측하고 싶어도 마법사 없이 근육만 달고 있는 그녀로선 정답 후보조차 추리기 영 어려웠고·
하니 크러셔는 알아낼 수 없는 것에 매달리기보다 이 상황 자체를 이용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악마가 없으면 이동하기 편하겠지· 대충 그런 논리였다·
“정말이지 이 성은 길 찾기 한번 거지 같네·”
“동감입니다·”
본관으로 보이는 성채를 보며 달리곤 있다· 그렇지만 가까워지고는 있는 건지 싶을 정도로 도착할 생각을 안 한다·
두 사람의 불안이 조금 깊어졌다· 이러다 일이 끝나기 전에 도착은 할는지 그런 유의 불안이었다·
쾅!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엄청난 진동이 일었다· 진동이라기보다는 힘과 힘이 충돌하며 일으킨 폭발에 더 가까울지 몰랐다·
크러셔와 기사의 눈이 순간 서로를 응시했다·
너도? 나도·
삽시간에 무언으로 의견을 교환한 이들이 서둘러 폭발의 근원지를 찾아 달렸다· 아까의 진동─성 전체가 흔들리던─과 달리 해당 폭발은 원인지가 뚜렷했고 단발성으로 그치지도 않아서 위치를 특정하기는 쉬웠다·
“오 신호 간다· 이쪽에 누구 하나 있는 게 맞는가 본데·”
“···역시 전투 중이시겠죠? 대비하겠습니다·”
치지직거리는 무전기의 신호와 계속되는 굉음을 따라 달린 두 사람의 발이 끝내 어떤 지점에 다다랐다·
“저 머리 색은····”
“용사님?”
흔치 않은 붉은 머리카락과 그림으로만 대강 외워 두었던 마왕의 모습이 갑작스레 그들 눈앞에 드리워졌다·
* * *
인퀴지터는 사탄의 공격을 피하고자 옆으로 굴렀다· 그러자 그녀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상흔이 아로새겨졌다· 철판을 손톱으로 우그러트린 것처럼 우악스럽고 흉포한 자국이었다·
콰앙!
사탄의 공격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그 존재는 손가락을 가볍게 휘젓는 것으로 공기를 자르고 하늘을 찢었다·
마치 현악기를 뜯는 시인 같았다· 활이 현 위를 지날 때마다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처럼 사탄의 손가락이 물결칠 때마다 허공에 또는 지상에 특정한 궤적이 남았다·
때로는 깨끗한 실선이고 때로는 포악한 손톱 자국인 궤적들이었다·
[역시 이것으로는 끝나지 않는가?]
하나 이런 참격이라면 익숙하다· 본의 아니게 그녀를 단련시켜 준 사람이 있었기에 더욱 그렇다·
늦지 않게 방패를 치켜 든 인퀴지터가 위에 신성력을 몇 겹이나 쌓아 올렸다·
“네까짓 존재에게 당해 줄 것 같으냐!”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는 건 질렸다· 하여 그녀는 메이스를 주축으로 신성력을 끌어모아 하나의 단면을 만들었다·
목표는 사탄이 아니라 사탄이 나타날 당시 같이 나타난 못들이었다·
콰앙!
오랜 여정 끝에 마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지식을 쌓은 이가 쐐기를 향해 신성력의 망치를 휘둘렀다· 방패 뒤에 숨었기에 정면의 사탄으로선 썩 막기 힘들 경로였다·
[그건 곤란하도다·]
함에도 사탄은 태연히 말을 지껄이며 손 없는 장갑을 아래에서 위로 그었다· 콰아앙! 허공에서 갑작스레 생성된 마기의 선이 신성력 망치를 갈랐다·
퍼엉!
그 절단은 그다지 깔끔하지 못했다· 마기와 신성력이 서로 충돌하며 폭발을 일으켰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그걸 고려해도 유난한 감이 있었다·
반으로 잘린 신성력 망치가 양 방향으로 쫘악 밀리며 그대로 허공에 흩어졌다·
서걱!
또한 그 순간에 맞춰 인퀴지터의 발목에 상처가 새겨졌다· 용의 비늘과 별의 금속을 녹여 만든 갑옷이 있음에도 그랬다· 갑옷이 우그러지며 그녀의 발목에 4cm 깊이의 자상이 남았다·
[사지 말단에 대한 방비가 부족하느니·]
웃는 가면은 구두 굽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방금 공격당할 뻔한 못에 손을 올렸다· 미들족 성인 남성만 하지만 동시에 마왕의 가슴팍까지밖에 못 오는 못은 그의 손을 손쉽게 받쳤다·
“쓸데없는 경고를!”
[아울러 상대의 조언에 섣불리 휘둘리는 얄팍함도 있다·]
서걱!
인퀴지터의 방패 끄트머리가 잘려 나갔다· 몇 겹의 신성력으로 보호받던 아까와는 참 다른 모습이었다·
“읏!”
물론 그녀가 방패 속 신성력을 거둔 것은 아니다· 단지 상대의 지적을 듣고 사지 말단에까지 신성력을 제대로 두르다 보니 방패 쪽에 대한 대비가 흐트러졌을 뿐이었다·
약점을 제대로 찔린 인퀴지터의 눈이 찌푸려졌다·
[그런 비루한 삶 더 이어 가 봐야 의미가 있겠는가?]
콰앙!
또다시 참격 세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신체 일부가 방패의 반경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썩둑썩둑 잘라 버릴 공격이었다·
“흐읍!”
하나 상대를 꼭 베고 찔러야만 타격을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방패 뒤에 옹송그린 인퀴지터의 몸이 더한 신성력을 뿜어내며 사방으로 구 형태의 면을 뿜어냈다· 삿된 것을 밀어내고 분쇄하는 다만 양으로 모든 걸 압도하는 단순무식한 공격이었다· 그녀가 다루는 힘이 신성력이기에 가능한 짓이기도 했다·
[흠· 확실히··· 마기로 이걸 막기는 힘들지·]
그 광포하면서도 신성한 힘의 해일에 사탄은 케이프를 펄럭이며 한 손으로 실크 햇을 붙잡았다· 딱· 모자를 잡지 않은 쪽 손은 면장갑의 부드러움을 뚫고 기어이 손가락 튕기는 소리를 낸다·
타다다다다당!
수백 수천 개의 구슬이 철판을 두드리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어 한 발짝 늦게 생성되는 것은 넓어지는 면을 뒤덮는 수만 수천만의 검은 선들이다·
인퀴지터가 사방으로 뿜어낸 신성력의 파도가 한낱 기포 덩어리들로 잘려 나갔다·
[그러나 부족하다·]
연이어 점의 형태로 보이는 마기가 사탄의 손가락 끝에 형성되었다· 인퀴지터의 모든 오감이 경종을 울렸다·
타앙!
인퀴지터는 마기가 향하는 방향을 따라 방패에 있던 모든 신성력을 끌어모았다· 함에도 방패 위에 덧씌워진 금빛은 부서지고 방패 한가운데에는 움푹 파인 흔적이 새겨졌다· 마치 나무에 칼날을 한번 박았다 뺀 듯한 자국이었다·
퉁 투두두두두둥!
이후 그녀가 방금 막아 낸 것과 똑같은 공격이 무수하게 쏟아졌다· 동일한 시점에 두 개 이상의 공격을 가하는 것은 저쪽도 불가능한지 한 번에 두 부위를 보호해야 할 일은 없었다·
“컥!”
그렇기만 했다· 순간순간 바뀌는 공격 지점에 맞춰 신성력을 이리저리 옮기는 것은 인퀴지터에게 썩 쉬운 일이 못 되었다·
삽시간에 그녀의 몸에 구멍 자국 몇 개가 생겼다· 본능적으로 주요 부위에 먼저 신성력을 두르지 않았다면 분명 치명적인 타격으로 이어졌을 터였다·
“흐─!”
하여 인퀴지터는 방어와 회피를 함께 시도하기로 했다· 대각선 방향으로 달리며 최대한 피격 면적을 줄여 보려 한 것이다·
[가소롭도다·]
당연하지만 사탄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녀의 발이 지상과 떨어지자마자 사탄이 예측을 거친 공격을 시작했다· 사격의 정확도가 어찌나 정밀한지 인퀴지터가 속도를 제멋대로 조절하고 가끔 역방향으로 꺾어 가며 이동에 변화를 주었음에도 방패에선 간헐적으로 텅 텅 소리가 났다·
“신이시여!”
함에도 인퀴지터는 꾸준히 절대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아무렴 그녀의 의지는 고작 이런 것으로 꺾일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저에게 부끄럽지 않을 힘을!!”
이 순간에도 모험가님께선 다른 대악마와 혈전을 벌이고 계시겠지· 다른 이들도 목숨을 걸어 가며 그나 그녀를 도우려 할 것이고· 의도적으로 혹은 예상치 못하게 도시에 남게 된 이들 역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다음을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그렇기에 그러하므로· 청년은 자신의 몸에 파고든 마기를 정화하고 꿰뚫린 몸의 구멍을 메우며 전진했다· 콰앙! 메이스를 주축으로 또다시 소환된 망치가 사탄의 본체를 후려쳤다·
[하· 모시는 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도 모르는 자가 잘도 떠드는구나·]
파스스스· 피어오른 흙먼지가 잠시 시야를 가렸다· 사가각· 연이어 쏘아져 오는 건 세계를 체크 보드처럼 가르는 검은 선들이다·
[너는 네가 믿는 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터엉!
인퀴지터는 방패를 앞세워 그것을 막아 냄과 동시에 그대로 돌진했다· 쏘아지던 창의 연쇄가 끊긴 이상 그 선택은 마땅한 것이었다·
먼지구름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사탄의 손에 기어이 그녀의 방패가 닿았다·
“최소한! 네까짓 놈이 입에 담을 분이 아니다!”
신성력의 망치는 바깥으로 신성력을 표출 그것을 응집시켜 면의 형태로 구현한 것이나 이 정도로 근접했을 때는 그런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다·
본래라면 더 큰 영역으로 분산되었을 신성력이 그녀의 메이스 한쪽에 밀집되어 눈부신 광채를 흘렸다·
[아아· 역시 어리석다· 역시 어리석어·]
콰앙!
그녀의 메이스가 사탄의 손과 맞닿았다· 치이익 하며 피어오르는 연기는 분명 사탄의 육신과 그녀의 신성력이 충돌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사탄의 흰 면장갑이 조금씩 그을렸다·
[하면 이것은 어떻느냐?]
다만 사탄은 정작 제 장갑이 그을리건 말건 아무래도 좋은 눈치였다· 그의 웃는 가면 사이로 나직한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또한 한때 너의 신 중 일부였음을····]
“···!”
또한 그 웃음소리 뒤에는 경악이라 표현해도 모자랄 신성모독이 이어졌다· 인퀴지터의 눈매가 산의 봉우리처럼 날카롭게 치솟아 올랐다·
“악마들의 왕 주제에 별의별 소리를 다 하는구나!!”
어디 더럽고 추잡한 악마들의 주인 아니랄까 봐 뱉는 언어의 질도 천박하기 짝이 없다· 도발이란 건 알지만 그 끔찍함에 공연히 몸서리쳐질 정도였다·
[믿지 못하는구나·]
들을 가치도 없는 소리나 지껄일 주둥이라면 처음부터 없어도 좋았을 것을· 인퀴지터는 짓뭉갤 조동아리가 달리 없다는 것에 유감을 표하며 방패를 황급히 치켜들었다·
타다다다다당!
그녀의 방패에 사탄의 다른 쪽 손이 닿았다· 칼바람과도 같은 마기가 방패 위로 터져 나왔다· 신성력을 어떻게든 끌어올려 덧씌웠음에도 방패에 생채기가 죽죽 생겨날 정도였다·
[늦은 믿음이야말로 후회만 불러올 것일진대····]
콰앙!
결국 신성력과 마기의 충돌이 엄청난 진동을 불러오며 그녀의 몸을 뒤로 튕겨 냈다· 콰아아악! 그녀의 발이 튕겨 나가는 과정에서 어떻게든 대지에 파고들었다· 스키드 마크가 밀려나는 경로에 맞추어 선명하게 새겨졌다·
“아니!”
만약 마법진이 대지에 음각으로 새겨지는 형식이었다면 이번 행보 한 번으로 망가졌겠지· 하나 땅 위에 그려진 마법진은 그저 마력의 흐름이 만들어 낸 잔상일 뿐이다·
그것을 알기에 인퀴지터는 실망 없이 자신의 메이스를 움켜쥐었다·
“이 길을 정한 것이 오롯이 나 자신인 이상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홋샤!”
마왕과의 충돌 덕에 마법진 외곽까지 밀려난 그녀의 메이스가· 그리고 마왕의 뒤편에서 우다다 달려온 크러셔의 철 각반이 각자 앞에 있는 못과 사슬을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