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화 그리하여 복될 것이며 (3)
크러셔가 판단하기에 그녀는 자기객관화가 제법 잘되는 사람이었다· 허세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북부인치고는 제 수준을 잘 파악했다 이거다·
“저거 함부로 접근했다간 죽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저건 그녀가 감히 끼어들어도 되는 전투가 아니었다· 그녀보다 약한 어린 기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다행히 저쪽은 우리의 존재를 모르고 있어· 아니면 우리의 존재를 알면서도 무시하고 있거나·”
뭐 이렇게 말해도 현실적으로는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마왕과 용사의 싸움은 언뜻 비등해 보이면서도 마왕이 일방적으로 유린하는 빈도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렇게 강한 존재는 보통 주변 상황까지 간파하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들이 방해가 되지 않을 걸 알기에 방관하고 있을 뿐이지 그들 존재 자체를 모를 일은 거의 없단 거다·
“쯧 기습하기도 너무 애매한데·”
급습은 상대가 모르기에 위력적인 것이다· 이미 존재를 발각당했다면 들이치듯 공격하는 사유가 없다·
“그럼 이렇게 가만히 있어야만 합니까?”
“쓰읍· 있어 봐· 나도 그러기 싫어서 지금 열심히 고민 중이잖아·”
아 여기에 호크아이가 있어야 했는데·
크러셔는 갑자기 그녀의 친우가 미치도록 그리워졌다· 그 자식이라면 상대가 그의 존재를 눈치챘건 말건 그냥 화살을 쏘고 말았을 것이기에 더 그랬다·
“하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다가가면 깍뚝 썰기 당할 것 같은데·”
하나 호크아이가 그런 식으로 굴 수 있는 것에는 호크아이 수준의 장거리 사격이 가능한 이가 별로 없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근접해야만 진가를 발휘하는 크러셔와는 입장 자체가 다르단 소리다·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거··· 현실적으로····”
그런데 숨 쉬듯 대지와 공기를 썰어 내는 존재를 상대로 접근전을 선택하는 게 과연 현명한 일일까? 아무리 따져 봐도 그건 아니었다· 그녀의 목숨이 반드시 판돈으로 필요한 게 아닌 이상 그녀가 자진해서 죽으러 갈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저 대못 저 대못은 어떻습니까?”
그때 그녀와 함께 고뇌하던 어린 기사가 한마디 툭 뱉었다· “대못?” 다소 뜬금없는 발언이었다·
“저 사슬에 휘감긴 못 말입니다·”
“사슬··· 아 말뚝?”
크기가 커서 못이라곤 생각 못 했는데 듣고 보니 대충 그리 보이기도 한다· 별로 중요한 사항은 아니지만·
“주변 사물과 조화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마법진의 외곽과 정확히 맞춰 존재하는 게 이상해서····”
“오· 그러네· 네 말대로 진짜 수상한데·”
“바닥의 마법진과 연관이 있다면 제거를 시도해 봄 직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어린 기사의 의견은 꽤 괜찮은 심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정도면 그녀의 목숨값은 저울에 맡겨 봐도 될 정도였다·
“너무 대놓고 드러난 약점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나!”
물론 크러셔는 저것이 다른 무언가일 가능성도 머릿속 한편에 남겨 두었다· 이것만 노려 달라는 양 노출된 약점은 대개 거짓 약점이거나 희생을 각오하고 누군가를 끌어들이려는 함정이었던 적이 꽤 많았던 탓이다·
평생 용병으로 살아온 사람의 의심병과도 같은 관록이었다·
“그럼 동시에 뛰쳐나가서 각자 대못을····”
“아니 너는 여기 있어·”
“네?”
“넌 내 속도를 못 따라오잖아· 그렇다고 내가 너한테 맞출 수도 없고·”
“그래도····”
“대신이라긴 뭐하지만 넌 여기 있다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크러셔는 기사의 동행 요청을 단칼에 거절한 후 허리에 차고 있던 가방 일부를 떼어 내어 기사에게 던져 주었다· 몇 개 남지 않았을지언정 마법 스크롤을 담고 있는 가방이었다·
“넌 나보다 머리를 잘 굴리잖아·”
이어 자신이 차고 있던 각반도 정비했다· 가죽 부츠 위에 덧댄 철판 조각이 조금의 틈도 없이 그녀의 정강이를 조였다·
“머리라면····”
“여기서 대기하고 있다가 변수가 터지면 지금 했던 것처럼 괜찮은 추측을 도출해 보고 그걸로 대처도 해 보란 거야·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다면 겸사겸사 나한테 얘기도 해 주고·”
크러셔는 각반에 달린 칼날을 숯돌로 갈 수 없다는 것에 아쉬워하며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잠시만 그럼 이걸 가져가십시오·”
“음?”
“저보단 가까이서 싸우는 당신께서 다칠 일이 더 많을 테니까요·”
“···좋아·”
그녀는 어린 기사가 건네주는 체력 포션을 빠르게 챙겼다·
“왜 하나는 남기는─”
“애송이 너 하나 쓸 건 있어야지· 자 나 간다·”
“잠깐···!”
콰앙!
잠시 주춤했던 그녀의 발이 대지에 선명한 구두코 자국을 남겼다· 또한 그 흔적이 세상에 드러났을 때에 마왕은 이미 용사에게 시선을 빼앗겨 그녀를 등지고 있었다·
삽시간에 마법진 안으로 뛰어든 그녀의 다리가 쇠사슬을 후려쳤다·
깡!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도 응당 있는 법이라· 그 절대적인 물리법칙 아래 크러셔의 다리가 쇠사슬로부터 튕겨 나왔다· 대못을 뽑아내긴커녕 사슬에 금조차 내지 못한 상태로 공격이 실패한 것이다·
“이럴 줄··· 알았지!”
그러나 크러셔는 얼얼한 정강이를 두고도 계속해서 연타를 이어 갔다· 이 못과 쇠사슬이 진정 마법진의 구성 요소 중 하나라면 이 정도 단단함은 가지고 있을 거라 미리 각오해 둔 덕이었다·
순식간에 열댓 번의 발차기를 얻어맞은 대못이 미세하게 기울어졌다·
사사사삭!
그쯤 되어 크러셔는 대못을 발판 삼아 위로 높게 공중제비를 돌았다· 크러셔의 회청색 머리카락이 화려하게 휘날렸다· 그 아래로 샤샤샥 새겨지는 것들은 마기로 구성된 일격들이다·
타당 타당 탕!
연이어 그녀는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에 앞으로 무언갈 던진 후 다른 못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렸다· 순록처럼 겅중겅중 질주하는 몸 뒤에는 가는 선이 무차별적으로 죽죽 그어진다·
사각!
그때 그녀의 속도를 따라잡은 참격 하나가 크러셔의 머리카락을 뭉텅이로 잘라 내고 뿔을 썩둑 베어 냈다· 길고 긴 실타래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순간이었다·
“아하핫!”
다만 그 아찔한 찰나에도 크러셔는 입꼬리를 올리기 바빴다·
아무렴 머리카락은 기르면 되고 뿔은 추위가 가장 맹렬해지는 시기에 뿔갈이를 하면 될 뿐이었다· 이렇게 목덜미가 섬찟해질 정도로 아슬아슬한 싸움은 좀처럼 흔하게 벌어지지 않는다·
“그래! 이거지!”
무의미한 자살 돌격은 싫어도 목숨을 걸고 치르는 아찔한 싸움은 그녀의 인생이자 그녀만의 놀이다· 호쾌하게 웃은 크러셔의 몸이 한순간 움직임을 확 바꾸었다·
작은 체구와 압도적인 유연함 탄력 있는 근력을 총동원해 추는 폭력의 춤사위였다·
콰앙!
아울러 그녀의 뒤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그녀가 대못을 타격할 당시 바닥에 함께 박아 넣은 폭탄과 마지막에 던진 타이머 폭발물을 이용한 폭파였다·
역시 힘이 부족할 땐 도구를 동원하는 게 제일 편했다·
[호오·]
다만 이 정도 화력만으론 좀 부족했는지 사슬과 대못이 크게 쩔렁거리는 것으로 그쳤다· 움푹 파인 구덩이를 확인해 보거든 폭발의 정도가 그리 약한 게 아니었음에도 그러했다·
말뚝의 내구도는 예상보다 단단했고 그 길이도 매우 길었다·
“어이 용사님! 힘내지 않고 뭐 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즉 남은 도구만으로는 저것을 파헤칠 수 없다· 터진 폭탄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으니 부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핫! 뭘로 만든 건지 더럽게 궁금하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뭐지?
“어이 마왕! 너는 이거 벨 수 있냐?!”
표적과 사물이 동일 선상에 놓였을 때 표적만 딱 골라 피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호크아이도 각도를 바꾸지 않는 한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일이니 당연하다·
한데 이 부분에 대해서 마왕은 어떨까· 저 마왕은 과연 표적만을 싹 골라 처리할 능력이 있을까?
“하핫 핫!”
다음 못을 기어이 밟은 크러셔의 다리가 못과 연결된 사슬 위를 노닐기 시작했다·
넘어지듯 사슬 옆으로 기울어지며 공격을 피하거나 땅바닥에 닿기 전 사슬에 팔을 걸고 몸을 회전시키거나 그것으로 다시 튕기듯 일어나 못을 박차는 것까지· 마치 곡예를 부리는 광대처럼 끝없이 못과 사슬 위를 걸었단 소리다·
자칫했다간 스스로의 행동 반경만 제한하고 상대의 공격에는 그대로 노출될 도박적인 수였다·
[···유감이로다·]
“베는구나!”
하나 그녀의 도박은 성공했다· 출렁거리는 사슬과 못을 오가며 끝없이 공격을 피하고 못을 후려치는 묘기를 선보인 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치지직· 품속의 노이즈가 웃음소리와 겹쳐 튀어나왔다·
“벨 수 있어!”
동일 선상에 놓인 두 개의 표적 중 하나만 골라 공격할 능력이 없다· 그러면서도 사슬이나 대못을 베어 넘길 위력은 된다· 그런 주제에 그녀만 벨 수 있을 정도로 위력을 낮추는 건 안 된다·
그 사실을 한순간에 간파한 크러셔가 몸을 비틀었다· 쏘는 형식의 공격이나 교차 없이 한 경로로만 베어 오는 것쯤은 얼마든지 회피가 가능했다·
공중에서도 몸을 자유자재로 구부릴 수 있는 이가 광기 어린 웃음소리와 함께 사슬을 때리고 못을 후려갈겼다·
“죽어라 버러지!!”
[루시퍼마저 죽어 버릴 줄이야·]
여기에 용사도 대못을 부수는 데 손을 보탰다· 사탄의 입장에선 정반대에 있는 두 사람을 동시에 견제해야 하는 셈이었다·
여유롭게 케이프를 펄럭거리던 존재가 모자챙을 조금 더 아래로 끌어내렸다·
[결국 모든 대계가 어그러졌다··· 다시 또 처음부터로구나·]
딱· 면장갑이 손가락을 튕기고 크러셔의 눈앞에 새까만 점이 떠올랐다· 그녀의 동공이 확장됨과 동시에 사슬을 쥔 손이 빠르게 그것을 잡아당겼다·
으직!
“크핫···!”
늦었다· 각도를 최대한 틀어내긴 했으나 왼쪽 안구와 관자놀이까지의 지점이 일직선으로 뚫렸다· 뇌가 찢기지 않은 게 유일한 행운이었다·
“크읏!”
크러셔의 반대편에 있던 용사도 무언가에 당했는지 신음 소리를 흘렸다· 시야 한쪽이 까맣게 점멸되는 바람에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쪽엔 훨씬 더 많은 용량의 마기가 쏘아진 듯했다·
[그러나 괜찮다· 무한한 시간이 내 뒤에 버티고 있느니·]
하지만 저놈이 이제 와 이런 공격을 한 것이 과연 우연일까? 사슬을 붙잡고 늘어진 자세가 된 크러셔가 발로 대못을 쳐 냈다· 다소 박차는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갑니다·
덩달아 아까 치직거리던 품속의 무언가가 자그만 소리를 토해 냈다·
휘익·
하늘로부터 금빛의 액체를 닮은 유리병이 포물선의 형태로 추락했다·
타앙!
대못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오른 크러셔의 다리가 그 유리병을 걷어찼다· 유리병이 깨지진 않을 정도로 약하게 그렇지만 사탄에게 일직선으로 향할 수 있도록 강하게· 아주 절묘한 힘 조절이었다·
쨍강!
“아하하핫!”
그 대가로 그녀의 어깨가 잘리고 복부에 구멍이 생겨났으나 썩 나쁘지 않았다· 날아오는 유리병을 깨 버린 마왕이 그대로 신성 농축액을 뒤집어썼다·
[···가소로운 벌레들의 날갯짓 따윈 내게 문제 되지 않으리·]
치이익· 마왕의 케이프가 살짝 타들어 갔다·
“아니·”
그리고 마왕의 뒤에서 광채를 두르고 달려 나온 이가 선명한 녹색 눈동자로 선언했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핏줄기들은 마치 용사의 머리카락이 땅에 닿을 것처럼 길어진 착각을 준다·
“너는 이 자리에서 심판받을 것이다·”
하나 압축하고 또 압축된 신성의 메이스가 사탄과 충돌했을 때 피로 이뤄진 머리카락은 재조차 남기지 않고 정화되었다·
─방어 스크롤 사용합니다·
“오냐!”
─3 2 1·
용사가 시간을 주었다· 사슬 위로 내려앉은 크러셔는 무릎을 굽혀 피격 지점을 최대한 줄인 채 체력 포션을 들이켰다· 어지럼증이 순간 찾아왔으나 폐와 창자가 뚫리고 한쪽 어깨가 잘려 나간 통증보단 덜했다·
쨍그랑!
그녀의 앞에 발동된 방어 마법이 삽시간에 깨어져 나가고 그 시간 동안 크러셔의 몸이 빙글 회전했다·
“역시 머리 쓸 줄 알잖아!”
─폭탄 하나 더 갑니다···!
“애인한테 차이면 나한테 와라!”
사탄 자체를 타격하는 건 역시 비합리적이다· 시간을 되감아 주는 포션이 있다고 한들 몸이 체크 보드처럼 썰려 버리면 복용하지도 못할 테니·
─예 예?
하므로 그녀는 계속해서 말뚝을 친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원숭이처럼 사슬을 붙잡은 이가 오롯이 허릿심으로만 몸을 위로 빙글 띄워 올렸다·
연이어 손이 사슬로부터 떨어지고 굽어진 무릎이 펴지며 그녀의 몸이 뒤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목표는 대못· 그녀가 공략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대의 것이었다·
쩔렁!
사슬을 매단 대못이 기어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