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화 그리하여 복될 것이며 (4)
산군은 육귀를 등 뒤에 대롱대롱 매단 채 거인을 타고 올랐다· 육귀의 덩치가 덩치인지라 썩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상님 다이어트하실 생각 없십니꺼·]
[오냐 오늘이야말로 비늘이 다 뜯기고 싶나 보구나·]
[아니! 진짜 무겁단 말입니다!]
[난 뭐 편한 줄 알아?!]
1차로 산군의 등껍질 안에 제 몸을 끼워 놓고─꼬리 구멍과 머리 구멍을 이용하면 됐다─는 2차로 거인을 휘감는다· 또한 이 과정에서 산군만 움직이면 애써 끼워 둔 육귀가 빠지니 육귀도 다리를 엉금엉금 움직여 수직 절벽을 같이 등반했다·
인간으로 치면 대략 이인삼각 클라이밍이었다· 안전 밧줄도 뭣도 없는 정말 막무가내 좌충우돌 대환장의 클라이밍·
[이 이 졸렬한 악마 새끼들! 하여간 신수 빡치게 하는 데 뭐 있다니까!]
결국 두 존재 중 먼저 화를 터트린 건 육귀였다· 산군도 분노가 치밀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그쪽은 짜증보다 피로가 더 깊은 게 문제였다· 아까부터 침묵하고 있던 뱀이 뽈뽈 거인의 뱃가죽을 지났다·
[지 기사님 보고 싶습니다····]
[나도 걔가 그립다· 걔가 칼 한번 휘둘러 주면 이거 썩둑 잘리지 않을까·]
그게 됐다면 진즉 시도했겠지만 육귀와 산군은 암묵적으로 그 사실을 외면했다· 그들의 느린 걸음이 이제 가슴팍에 도달했다· 콰아앙! 위쪽에서 은은히 전해지던 진동은 이제 그들의 걸음을 미끄러트릴 정도로 선명해진 채다·
[아이고 애들 잘 살아 있나 보다·]
[이 정도면 엄청 위험한 것 같은디요?]
[야 눈치 안 챙겨?]
함에도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다· 그들은 낑낑대며 어떻게든 어깨까지 올랐다· 이제 성에 들어가기만 하면 됐다·
[뭐 막힐 줄 알았는데 그건 없네·]
[글게요·]
실제로는 마력 낭비를 막기 위해 철회한 쪽이나 그걸 모르는 두 존재는 ‘좋은 게 좋은 거지’ 따위의 생각으로 바로 진입했다· 거대한 몸뚱이가 온갖 사물을 으스트리고 짓뭉개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아오 따가브라·]
[사람 사는 것도 아니면서 뭐 이리 건물이 많대? 하여간 악마 새끼들 취향하고는·]
정원까지는 어찌 이해해도 머무를 손님 하나 없으면서 거창하게 방만 준비해 둔 건 정말 무슨 심보인가 싶다· 밥 먹고 사는 것도 아니면서 주방에 식당에 연회 홀까지 갖춰 둔 것도 우습고·
[인간을 죄 말살하려 드는 주제에 형식은 인간의 것을 따르는 게 이상하다니까·]
[뭐 우짜겠습니까· 악마들 요상꾸리 한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때 그들의 시야로 거대한 마기와 신성력의 충돌이 슬슬 들어왔다· 하나는 그들이 아는 존재였고 하나는 추측할 필요도 없는 놈이었다·
[용사야!! 우리 왔다아!!!]
[저거 저거 문양 일치한다!! 지대 들어!!]
즉시 그들은 마왕으로 추정되는 마기를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했다· 이 성의 진격을 붙드느라 충분히 많은 힘을 소모한 상태라는 건 고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어이 이곳까지 도달한 인간들이 대견스러워서라도 그들의 책무를 다할 뿐이었다·
마법진 아래 대지 안쪽으로부터 수백 개의 넝쿨이 자랐다·
* * *
크러셔는 날아오는 공격을 피해 물구나무를 서듯 땅을 짚고 한쪽 다리로 대못을 휘감았다· 허벅지와 정강이 사이 오금과 닿도록 붙잡힌 말뚝과 사슬이 서로 마찰하며 뿌드득 소리를 냈다·
그녀는 그 상황에서 허리를 튕기듯 상체를 들었다· 그녀의 손은 대못의 위쪽 부분을 꽉 잡고 붙든다·
쏟아지는 공격을 피해 크러셔의 몸이 못을 축 삼아 절묘하게 돌았다·
끼이익·
물론 사슬에 휘감긴 말뚝은 기둥 삼기에 썩 껄끄러운 대상이었다· 대못만 있다면 모를까 사슬이 걸린 채로는 단면이 매끄럽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러셔는 그 모든 불편함을 힘으로 이겨 냈다· 허공을 부유하던 그녀의 다른 다리가 못의 아랫부분을 지지대처럼 짓밟았다·
차캉!
오롯이 다리 힘으로 중력을 거스른 이가 사슬을 잡아당겼다· 마치 대못으로부터 사슬을 뜯어내는 것만 같았다· 뿌드드득· 대못과 사슬이 충돌하며 또다시 소름 끼치는 금속음을 흘렸다·
“내가 부수지 못하는 금속이라니 너무 짜증나잖아! 하하핫!”
까득 까드득·
반면 대못을 발판 삼은 다리로부터는 철판 우그러드는 소리가 났다· 양쪽에서 가해지는 압력은 강력한데 부츠에 덧대진 철판은 그 압력을 버텨 낼 만큼 단단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뭔가 쿨럭 옵니다!
그러다 헐떡거리는 숨과 함께 경고성 문구가 날아왔다·
“뭐?”
크러셔는 그 말을 본능으로 듣고 이성으로 재차 곱씹으며 가볍게 점프했다· 사슬로 대못을 조이던 걸 잠시 포기하고 무게중심을 손 쪽으로 옮겨 발을 허공에 띄운 것이다·
이어 반원을 그리며 반대쪽으로 넘어간 다리는 사슬 위에 사뿐히 올라갔다· 퉁· 왼발은 10시 오른발은 2시 방향으로 어긋난 두 발에 무게중심이 옮겨졌다· 한쪽으로 쏠린 무게에 사슬이 눌리고 튕겨 오른 건 덤이었다·
“뭐가 온다고?”
그 모든 행위를 1초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벌인 그녀는 균형을 기가 막히게 잡아 내며 통통 뛰었다· 빗발치는 공격은 그녀가 사슬 위에서 뜀뛰기를 하는 동안 적당히 빗나가고 스쳐 지나간다·
콰직!
가볍게 덤블링을 한 이가 대못의 윗부분을 손으로 짚은 후 돌아온 다리로 대못을 후려쳤다· 발등이 얼얼했지만 부러지진 않았다· 그녀의 몸이 무너지듯 아래로 빠지며 공격을 다시 피했다·
─그게··· 쿨럭!
바닥에 착지한 그녀가 윈드밀로 대못을 후려갈기는 동안 무전기에서 기침 소리가 튀어나왔다· 마치 가래가 들끓는 듯한 크러셔에겐 더없이 익숙한 소리였다·
“야 너─”
쿠오오오!
그러나 크러셔는 그 기침에 대해 물을 수 없었다· 어린 기사가 답을 주기도 전에 크러셔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뭐야 저건?”
거대하고 새하얀 뱀과 그 뱀 위에 얹혀 있는 거북이· 이 두 존재의 강렬함은 주위 상황의 심각성조차 찰나간 잊게 만들었을 정도니·
쿵 쿠우웅!
덩달아 그것이 출몰하자마자 땅이 무지막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크러셔마저 하마터면 균형을 잃어버릴 뻔한 강진이었다·
“뭐야 저건!”
적인가?
크러셔의 시선이 대지를 뚫고 나오는 넝쿨들로 향했다· 무슨 식생인지는 몰라도 억세고 질길 것이란 건 쉽게 짐작이 갔다·
[···영원조차 누리지 못하는 것들이·]
여기에 용사와 강대강 대결을 하던 마왕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다· 무슨 말인지는 완전히 알아듣지 못해도 저것─뱀과 거북이─이 악마의 우군이 아님은 확실히 알 수 있는 발언이었다·
“우왁!”
하지만 저것이 등장하고 나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막상 그들의 아군 같지도 않다· 지반이 조각나고 갈라지는 것도 모자라 고도가 더 높아지는 느낌이 추가로 들었기에 더욱 그런 판단이었다·
크러셔의 몸이 기어코 사슬과 대못에서 떨어져 나왔다·
“오셨군요!”
아니 같은 편인가?
크러셔는 반가움 가득한 용사의 목소리를 듣다가 일단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아까와 크게 달라질 것 없었다·
갈라진 지반을 틈타 계속해서 대못을 건드린다· 잔상이 남을 정도의 흔들림 속에서도 그녀의 주먹이 사슬과 말뚝을 끝없이 가격했다·
기우뚱·
그리고 끝내 대지의 균열에 힘입어 약간이나마 기울어졌던 대못이 조금씩 조금씩 넘어갔다· 마법진 바깥쪽을 향하는 사슬이 날아온 쪽과 정반대 되는 방향이었다·
[하· 실로 불쾌하도다·]
창!
자연히 말뚝을 휘감은 쇠사슬도 팽팽해졌다· 지반의 갈라짐이 조금만 더 심해지면 혹은 사슬이나 못의 내구도가 다하기만 하면 완전히 풀려 버릴 수준이었다·
“기사 꼬맹이!!”
─꼬맹이··· 아닙니다!
“가자!”
하면 더 한다·
크러셔는 어린 기사에 대한 걱정을 잠시 접어 둔 채 말뚝을 다시 걷어찼다· 뱀과 거북이가 난입한 시점부터 그녀를 향해 날아오는 공격이 급격하게 줄어든지라 그 행위는 더욱 쉬웠다·
─조심 하십시오·
심지어 그녀에겐 어린 기사의 보조도 있었다· 그녀가 맡기고 간 스크롤을 아낌없이 퍼붓기로 한 것인지 흙의 틈새로 충격파가 연속해서 터진 거다·
파스스스·
여기에 끝없이 솟아오르는 넝쿨까지 있어서야·
결국 넝쿨 사이로 모래처럼 흩어지기 시작한 땅덩이가 말뚝과 함께 추락했다· 마법진을 구성─추정이지만─하던 족쇄 하나가 박살 나는 찰나였다·
쿠우웅!
일순 지진이 격해졌다· 넝쿨이 꾸준히 성장하고는 있다지만 너무 공교로운 타이밍었다· 역시 이 말뚝은 마왕을 보조하는 마법의 일부인 것 같다·
[너희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아느냐?]
마왕 말하는 꼬라지를 봐도 거의 99%의 사실이었다· 크러셔의 다리가 부서지는 땅을 박차고 다른 족쇄로 달려갔다· 다음 타자는 처음 폭탄을 시험했던 말뚝이다·
콰앙!
그렇게 크러셔가 달려가는 가운데 인퀴지터는 그녀의 방패로 마왕을 밀어붙였다·
처음엔 크러셔가 걱정되기도 했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크러셔는 혼자서도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사람이었고 인퀴지터는 그녀의 할 일에 집중만 하면 됐다·
“네가 좆됐다는 건 알고 있다· 그 이상이 필요한가?”
하므로 그녀는 자신의 팔다리가 찢겨 나가고 안구나 내장이 짓이겨져도 절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신이 그녀와 함께 하는 이상 동료들이 그녀의 등을 지지해 주는 이상 그녀는 무너지려야 무너질 수 없었다·
신성력과 마기가 끝없이 부딪치고 터지며 그들이 디딘 자리를 조금씩 조금씩 분쇄하기 시작했다· 너무 강한 힘이 충돌하며 벌어진 사태였다·
공간이 늘어지고 좁아지며 시야 저편을 아득한 백색으로 물들였다·
[너는 나를 죽이지 못한다·]
콰앙!
다시 폭발· 아스러지는 세계와 비틀리는 사위가 백색 사이로 아질아질 검은색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밤처럼 검고 별처럼 반짝이는 어둠이었다·
퍼억!
“좋았어!”
또한 크러셔가 또 하나의 족쇄를 걷어찼을 때 그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어둠이 꺾이고 부풀며 인퀴지터의 지평선을 잡아먹었다· 거리감이 비틀린 까닭에 가까운 크러셔조차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보다 더 먼 위치의 산군과 육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저 말뚝들을 전부 부순대도 마찬가지다·]
“혓바닥이 길군·”
하지만 맞선다· 설사 저 왜곡이 그녀를 삼킬지라도 상관없다·
인퀴지터는 재차 마기와 정면 대결을 했다· 우직한 힘겨루기는 그녀의 장기나 다름없었으므로 더욱 좋았다· 가루로 화하며 소멸해 가는 세계 대신 알 수 없는 개념들이 그녀의 발밑에 차기 시작했다·
[좋다· 이리된 것 아예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아울러 그것이 그녀의 주위에 있던 모든 것을 걷어차 대신 메웠을 때· 크러셔가 세 번째 대못을 무너트렸을 때·
[장소 변경이다 용사·]
사탄은 넘쳐 오는 어둠으로 주변을 둘러쌌다· 상대의 말마따나 장소가 통째로 뒤집히는 듯한 풍경이었다·
“바보 같은!”
흑백의 저편 청록색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가 어렴풋하게 반짝였다·
“공간 박리다· 당장 저 여자를 끌어와라·”
그리고 인퀴지터가 반짝임을 보았다 생각했던 그곳 아슬아슬하게 이곳으로 당도한 세 사람이 각자의 일을 수행했다·
“우왁!”
먼저 계명 그녀는 모험가에게 지시를 내렸다· 크러셔가 선 곳이 하필이면 조금만 방치해도 몸 반쪽이 소멸해 버릴 애매모호한 경계선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
채찍 형태로 변환된 라텔이 크러셔를 휘감고 그대로 쭉 당겨 왔다·
“아 깜짝 놀랐잖아·”
“미안하군· 그보다 해결 방법은?”
“없다· 저것은 강제로 중첩된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현상일 뿐이니·”
“그럼 이대로 손 놓고 봐야 하나?”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텐데도 크러셔는 불만 한 번만 내뱉고 입을 꾹 다물었다· 감사 인사를 하지 않는 건 두 사람의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눈치껏 파악했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면 너 혼자서는 가능하다·”
“하겠다·”
“늦게 돌입하는 수도 있다·”
“당장 가겠다·”
그런 그녀의 배려 속에서 계명과 모험가는 아주 짧고 간결한 대화를 마쳤다· “온몸에 마력을 두르고 뛰어들어라·” 계명의 손이 모험가의 등을 밀었다·
“네 용사가 있는 곳까지 달리되 공간에 진입하기 전까지 마력을 풀지 마라· 그것이 끝이다·”
“그래·”
또한 계명의 신호에 맞춰 모험가도 땅을 박찼다· 그의 앞에 있는 것은 산산이 부서지는 세계와 기묘하게 일그러지고 요동치는 혼돈뿐이었음에도 망설임 하나 없었다·
“다녀오지·”
산화하는 초신성처럼 빨갛게 물든 눈이 그의 아이를 좇았다·
[야 저거 잡─!]
[우 우째····]
[아 저 미친놈이! 시공간 갈리는 곳으로 들어가면 어쩌잔 거야!!]
그의 뒤로 어느 두 존재의 비명이 울려 퍼지는 것조차 모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