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5화 그리하여 복될 것이며 (8)
“꺼져라·”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이로군·”
사탄의 제안을 두고 우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부터 뱉었다· 뇌를 통하지 않고 척수에서부터 우러 나온 순수한 반응이었다·
경멸을 담은 눈동자가 사탄의 양쪽에서 쏘아졌다·
[그거 매우 안타까운 이야기로군·]
안타깝기는 개뿔 애초에 이도 안 박힐 것쯤은 이미 예상했을 거면서·
나는 빈말이나 내뱉는 사탄을 두고 검을 재차 휘둘렀다· 케이프 안에서 무엇이 비치건 일단 가면이 깨지고 색다른 반응이 나왔으니 좀 더 압박을 가해 보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과연 이것이 정답일지 아닐지 옳은 선택일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나 내 다음 공격이 이어지기도 전 사탄의 케이프가 둥글게 떠올랐다· 파앙! 띄워진 케이프 사이로 보이는 고리 태양은 그 선을 따라 악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중이다·
[그러나 그대는 결국 나를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유하는 케이프가 사탄의 깨진 가면과 실크 햇마저 가렸을 즈음 케이프가 빨랫줄로부터 해방되는 빨랫감처럼 저 하늘로 날아올랐다·
툭 투둑·
반면 바닥으로는 주인을 잃은 하얀 면장갑이 구두 위로 막 떨어졌다· 가면과 실크 햇은 어디로 갔는지 케이프가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는 시점에도 보이질 않았다· 추락한 면장갑과는 참 대비되는 것이었다·
“후우·”
물론 나는 면장갑이 추락하건 말건 실크 햇과 가면이 실종되건 말건 그 모든 걸 그저 지켜만 보지 않았다· 아동 만화에선 변신 타임을 지켜 주는 게 국룰이지만 현실에서는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렴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다고 적이 강해지는 걸 그저 지켜만 본단 말인가? 나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안전하게 저놈을 해치우고 집에 가고 싶었다·
서걱!
해서 내 검이 사라진 케이프 아래 둥둥 떠 있던 고리 태양을 갈랐다· 마르지 않은 물감을 붓으로 그은 것처럼 고리 태양의 불꽃이 검의 궤적을 따라 두 줄기 꼬리를 만들었다·
‘···베이지 않았어·’
다만 그것은 정말 찰나간의 일이었다· 어긋났던 태양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며 더욱 강렬하게 불타올랐다·
내 눈썹이 살짝 들렸다·
“모험가님!”
그때 인퀴지터가 나를 불렀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금빛 광채가 진짜 금이라도 된 것처럼 농밀하게 응축되어 있다· 나 같은 건 단숨에 피1이 되어 버릴 농도였다·
「그레첸···!」
‘알아!’
덕분에 생존 본능인지 뭔지 내 머리가 평소보다 더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며 인퀴지터가 나를 부른 이유를 도출해 냈다·
맞고 뒈지지 말고 당장 빠져라· 금빛이 너무 선명해서 다른 답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내 다리가 선명한 족적을 남기며 뒤로 빠졌다·
콰앙!
그사이 인퀴지터의 메이스가 고리 태양이 있는 자리를 내려찍었다· 움푹 파이는 땅 사이로 스며드는 금빛은 세계의 모든 신성함을 끌어모은 힘 그 자체다·
균열을 따라 새어 나오는 노란 광채가 꼭 대지 아래에 금이 흐르는 것 같은 착각을 주었다·
고리 태양보다 더한 광명이 이 땅에 임했다·
「더 물러나야 해요!」
‘안다니까!’
통각을 제한한 상태임에도 신성력에 맞으면 어마어마하게 아프다· 그걸 걱정해 준 것인지 소년이 평소보다 끊기는 목소리로 외쳤다·
“신이시여!!”
그런데 대체 어디까지 물러나야 하는 거지?
나는 한 번에 십여 미터씩 뒤로 물러난 끝에 구덩이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여기서 더 물러나려면 경사진 땅을 올라 이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뭐 해? 당장 안 나가고!]
하나 분노가 나를 재촉하듯 인퀴지터의 힘은 내 근처까지 단계적으로 다가왔다· 마치 허공에 뜬 고리뿐만 아니라 이 땅이 머금은 마기를 모조리 뜯어내겠다는 심보 같았다·
그 무엇보다 찬란하되 나를 배격하는 광명 앞에서 결국 내 다리가 구덩이 바깥으로 구르듯 나갔다·
콰아아앙!
기다렸다는 듯 빛의 기둥이 구덩이의 중앙으로부터 솟구쳐 올랐다· 밤을 밝히는 여명이었다·
“와····”
저거 맞았으면 진짜 훅 갔겠는데·
나는 나랑 인퀴지터가 상성이 이렇게 안 맞아도 되는 건지 고찰하며 혹시 모를 다음을 준비했다· 이걸로도 고리가 사라지지 않으면 그땐 갈고리 및 밧줄로 변형시킨 라텔로 인퀴지터를 꺼낸 후 바로 섬격을 갈겨 버릴 생각이었다·
라텔 위로 일렁일렁 까만 불꽃이 흘러 들어갔다·
[보아라 진실을 깨달은 자의 힘을·]
그리고 인퀴지터의 힘이 잦아들었을 때 나는 그 계획을 바로 실행시켰다·
“우왓!”
갑자기 끌어당겨진 나머지 인퀴지터가 비명을 질렀으나 나도 한시가 급했다· 인퀴지터가 알아서 착지해 주길 바라며 뒤로 대충 내던진 손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인퀴지터가 연결된 밧줄을 대충 끊어 비게 된 손까지 더한 양잡이었다·
세상을 지우는 불꽃이 구덩이가 있던 자리를 삼켰다·
[이런 그대여· 그대는 그 힘의 근원이 어디라 여기는가?]
[저 시발 새끼가···!]
그러나 처음으로 이 불꽃이 지우지 못하는 존재가 나왔다· 머리카락 삼은 흑색 하늘에 고리 태양이라는 왕관을 쓰고 붉은 바위로 짜낸 옷을 입었으며 단두대와 같은 칼을 한 손으로 쥔 거인이었다·
그 크기가 어찌나 큰지 등장한 건 상반신뿐이었음에도 고개를 완전히 젖혀야만 얼굴이 겨우 눈에 보였다·
“모험가님!”
와중에 인퀴지터의 부름은 한발 늦었다· 분노의 욕설은 그나마 타이밍이 맞았지만 그 역시 완벽하진 못했다· 분노가 욕을 박던 시점은 검을 수습하기도 전일뿐더러 마력 붕괴로 무릎 관절이 녹아 버린 까닭이다·
콰직!
하여 사탄의 단두대가 내게 닿았다· 칼이 너무나도 거대했던 탓에 몸이 베인다기보다 짓뭉개졌다는 느낌이었다· 성장통처럼 아릿하면서도 기분 나쁜 통증이 사지 말단까지 퍼졌다·
“모험가니임─!”
그 상태로 단두대가 땅을 긁으며 후퇴했다· 칼날이 매끄럽지 못하고 이가 듬성듬성 나가 있는 구조라 내 몸은 그 사이에 낑겨 같이 끌려갔다· 콰지지직· 남은 몸뚱이가 으직으직 갈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레트헨··· 고 생하셨 어요·」
[미친 새끼야 정신 안 차려!?]
「정 말 죄송 해요· 제가 제가 좀 더··· 조금 만 더····」
[아직 안 끝났어 아직 안 끝났다고!]
섬격을 날린 후라 마력은 거의 다 떨어졌다· 회복하려면 라텔과 연결된 주머니에서 액상 포션이나 단약을 꺼내야 한다·
그런데 그걸 꺼내려면 손이 필요하고 손을 쓰려면 몸의 회복이 필요한데 여기서 몸을 회복하면 의미가····
[이 멍청한 자식아! 고통에 미쳐서 뇌가 우동사리로 돌아가 버린 거냐?! 이 몸은 육체가 있고 마기가 있는 몸이 아니야! 마기가 있는 곳에 몸이 생기는 구조다!]
아·
[너라면 할 수 있잖아! 그 잘난 재능으로 어떻게든 해 보라고!]
내가 생각을 잘못했다· 지금까지는 몸이 통째로 날아가거나 날아가도 무언가에 막힌 적이 없어서 미처 상상해 보지 못한 문제였는데··· 따지고 보면 재생의 기준은 꼭 복원이 될 필요가 없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급해지니까 쫑알쫑알 충고하는 것 봐라· 태세 전환도 이 정도면 한국 일교차급인 듯·’
그러고 보니 지구 쪽은 슬슬 11월 끝물이려나· 아니면 11월 중반쯤이거나···· 음 이왕이면 후자가 좋겠다· 생일 전에 일어나면 다들 기뻐할 테니까·
각설하고 지구로 돌아가면 낮 20도 밤 영하 20도의 일교차가 매일매일 이어질 터· 여기는 어딜 가도 일교차가 심하지 않았다 보니 돌아갔을 때 적응이 되긴 할까 싶다·
[···네 비꼬는 실력이 하늘에 닿았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그만하고 몸이나 수복하지?]
뭐 이것도 마지막이 다가오니까 할 수 있는 걱정이다· 뒷맛이 좋게 끝나지 않으면 들지도 않을 상념이기도 하고·
‘안 그래도 하려 했어 재촉하지 마·’
화륵!
내 고민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최소한의 행동을 위한 마력이 모두 모였다· 내 몸 절반이 으스러짐과 동시에 반대쪽 손끝에서 불티가 일었다·
“네놈 감히 모험가님을···!”
마침 인퀴지터도 내게 약간의 도움을 건넸다· 사탄이 단두대를 회수하도록 그리하여 내 육체가 더 파손되지 않도록 사탄의 본체에게 거대한 신성 망치를 휘두른 것이다·
화르르륵!
그에 맞춰 내 손끝에 붙은 화염이 더욱 강해졌다· 장작에 불을 붙이기는 어렵지만 한번 붙으면 장작이 있는 만큼 번지는 것과 동일한 원리였다·
손끝의 작은 불씨가 붕괴된 몸을 버리고 옆으로 이동해 몸집을 부풀렸다· 버려진 것은 잿더미조차 되지 못하여 그대로 전소하고 만다·
떨어진 곳에서 크게 인 불꽃이 곧 사람의 형상을 띠었다·
“헛! 모험가님?!”
“적에게서 시선을 떼지 마라·”
음 이거 잘하면 이동기도 될 것 같은데· 나는 이 꿀팁을 이제서야 알려 준 쓰레기버러지악마를 욕하며 단약을 씹었다·
이제 단약은 2개에서 단 하나· 마음 속에서 세고 있던 카운트가 줄었다·
“다시 옵니다!”
그때 사탄이 재차 단두대를 휘둘렀다· 신성 망치를 쳐 내며 나를 노리는 참 교묘하기 짝이 없는 경로였다· 거대한 덩치에 맞지 않게 속도가 제법 빠르단 것도 유의할 지점이었다·
내 다리가 가볍게 땅을 박차려다가 이내 내부의 힘을 먼저 움직였다· 반 박자 늦게 뛰어도 피할 수 있는 공격이니 이참에 상상해 본 걸 먼저 시험해 볼 심산이었다·
후욱!
그리고 내가 내 몸을 구성하는 요소를 강제로 무너트린 순간 내 몸이 한낱 마기로 화했다· 몸이 붕 뜨는 감각· 내가 몸을 재구성할 때 항상 느끼는 그 감각이었다·
[이 미친····]
그 힘을 그대로 이동시킨다· 단두대의 궤적에서 벗어난 공간까지 하나의 흘림도 없이 전부·
[이래서 재능 넘치는 새끼들은···!]
“흠· 이 정도면 쓸 만한가·”
몸을 일부러 붕괴시키는 작업이 좀 애매하긴 한데 그래도 감은 어찌어찌 잡힌다· 아까부터 몸이 녹았다 회복됐다 무너졌다 재생됐다 하던 게 있던 까닭이다·
아울러 마력 소모도 예상보다 더 적었다· 재생은 없던 것을 새로 생성하는 것이기에 힘이 많이 들지만 이건 겉 형태만 무너트렸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 후 복원하는 것이기에 그런 것 같았다·
세밀하게 따지고 보면 신체를 강화해서 뜀박질하는 거랑 큰 차이가 없다· 역시 많이 어렵진 않다·
‘반복 숙달되면 괜찮겠네·’
오히려 어떤 순간에는 몸을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 가령 좁은 틈을 통과해야 할 때나 너무 오밀조밀한 공격을 당할 때··· 아니면 표면적 자체를 줄일 때 써도 되겠다· 몸을 마력으로 화할 수 있다면 그 상태에서 응축을 시도해 보는 것도 가능할 테니까·
‘아니 이걸 진즉에 알았으면 얼마나 좋아· 악마새끼 진짜 지가 불리할 때만 입 여는 거 빡치네·’
[시발 지금 뭔 개소리를···!]
「어··· 어····」
왜 뭐 왜·
이걸 진즉 알았으면 지금까지 한 고생 중 몇 개를 덜 수 있었는데· 하다못해 오만이랑 싸울 때라도 이걸 알았으면 단약과 포션을 얼마나 아꼈겠어·
나는 오징어포처럼 분노를 다시 한번 씹으며 가볍게 뛰었다· 쾅! 곧이어 내가 있던 자리에 단두대가 떨어졌다· 그새 신성 망치와 격돌하여 튕겨져 나온 단두대였다·
탁·
하지만 새롭게 회피기를 장착한 나다· 이젠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다· 떠올랐던 내 몸이 단두대를 밟고 그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호오 광대의 역할은 완전히 잊지 않았는가· 재미난 묘기로다·]
그러자 사탄이 분노와 관련되었을 소리를 지껄였다· 그러니까 전대 메피스토펠레스라고 해야 하나? 내 기억하기로 그놈 칭호가 분명 궁정의 어릿광대였으니까·
[하지만 묘기는 묘기로 그칠 뿐·]
뭐 내 알 바 아니지· 나는 딛고 있는 단두대의 경사가 급격히 가팔라지는 걸 느끼며 내 몸을 불꽃으로 바꾸었다· 인간보다는 마기로 변해있는 상태가 단두대에 매달려 있기 편할 거란 판단이었다·
휘이이익!
그때 사탄이 단두대를 양손으로 잡고 인퀴지터의 방패 위로 내려쳤다· 크기로만 따지면 인간이 작은 동산만 한 검을 홀로 견뎌 내야 하는 꼴이었다·
“흐아아압!!”
그러나 인퀴지터는 그것을 이겨 냈고 도리어 조금씩 밀어냈다· 딜을 맡고 있는 입장으로서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탱커가 저렇게 일해 주는데 딜을 못 넣으면 그건 쓰레기지·’
내 몸이 달리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검을 타고 이동한 후 단두대의 끝자락에서 원래의 몸으로 화했다·
“아까 근원을 부르짖었나?”
이동하는 과정에서 마력을 압축하는 게 안 되는 건 아쉽지만 그건 팔을 타고 머리통까지 달려가는 동안 하면 되겠지·
나는 사탄의 붉은 옷자락을 카펫처럼 짓밟으며 놈의 몸통을 타고 올랐다· 닿는다고 대미지를 주는 타입은 아니란 게 참 편했다· 전에 탐욕 상대할 땐 그놈의 용암 때문에 애 좀 먹었었는데·
“근원을 뛰어넘는다는 게 뭔지 보여 주지·”
사탄은 내 등반을 막으려는 듯 단두대를 회수하며 두 손 중 하나를 회수하려 들었다·
“어딜!”
그걸 막은 것은 인퀴지터였다·
단두대를 덮듯 생성된 구의 결계가 사탄이 검을 회수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들어 매었다· 바깥의 침입을 막는다는 방어막의 개념을 뒤집어 사용한 응용기였다·
정말이지 우리 김치만두는 아주 똑똑하고 대견하고 자랑스러우며 빛이 나는 천재 김치만두였다·
“머리통을 날려 버려 주마·”
그리고 그녀의 활약 덕에 내 다리가 기어이 사탄의 어깨를 밟고 뛰었다· 태양 고리가 금방이라도 나와 닿을 것 같았다·
[그것을 기다렸다·]
검이 휘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