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화 그리하여 복될 것이며 (9)
[그대의 힘이 바닥을 치고 더는 저항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대도 자신의 아둔함을 돌아볼 수 있게 될 테지·]
사악·
내 검이 허공을 갈랐다· 하나 내 손에 들어오는 묵직한 감촉 따윈 없었다· 벤 대상이 가볍고 무른 것을 떠나서 아예 공기만을 가른 느낌이었다·
[내가 할 일은 오직 그것을 기다리는 것뿐·]
물론 섬격은 상대방을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힘이 아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력을 휘둘러 부채꼴의 반경을 지워 내는 힘이지·
그렇지만 되레 그렇기에 섬격을 사용했을 시 손목에 가해지는 부담은 꽤 큰 편이었다· 무게는 없을지언정 압축된 에너지를 고르게 휘둘러야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걱정 말라· 나는 능력 있는 자를 우대하니 나는 그대가 올바른 것을 볼 때까지 기다려 줄 의향이 있노라·]
그런데 그 반동이 오지 않는다· 섬격이 상대를 증발시킨 게 아니라 마치 섬격 자체가 증발한 기분이었다· 왕관의 고리 태양이 내 눈앞에서 빙글빙글 회전했다·
[아울러 어리고 우둔한 용사에게도 내 친히 기회를 주겠노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생으로 날아간 마력을 아까워할 틈도 없이 나는 우선 사탄에게서 떨어질 준비를 했다· 다행인지 뭔지 사탄도 그런 내게 추가적인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다·
공격할 능력이 없는 것인지 그의 말마따나 정말 여유가 넘쳐서인지는 잘 모를 일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부디 전자이길 바라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거짓을 속삭이고 희생을 논하는 존재로부터 벗어나라· 그리하여 나의 대업에 참여하라·]
“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헤아리고 또 따져 봐도 도무지 가늠되는 게 없다·
“꺼져라 악마!!”
결국 나는 우렁찬 인퀴지터의 외침을 뒤로한 채 정말 부르고 싶지 않았던 놈을 부르기로 했다·
‘야 이거 뭔 일이야·’
[내가 불리할 때만 입 열어서 빡친다던 사람 어디 갔지?]
‘너는 사탄과 싸워 봤잖아·’
[하· 그래서 뭐? 네가 이긴다고 해서 내가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굳이 말해야 할 이유 있나?]
그래· 이 망할 놈이 어디 순순하게 협조해 줄 놈인가· 자기 목숨이 걸린 게 아니면 절대 도와주지 않는 정말 생존에만 아득바득 몸을 붙이는 놈인데·
[물론 또 모르지· 네가 나를 살려 줄 의향이 있다면─]
‘어 일 없어· 꺼져·’
[개자식·]
예상했던 일이기에 실망도 없다· 나는 곧바로 정보 얻기를 포기했다·
「잘 하셨어요· 저놈은 저놈은 결코 기회를 받아선 안 돼요·」
파우스트도 드물게 기뻐했다· 빈정거림에 더 가까울지라도 약속하게나마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내 행위를 긍정한 것이다·
정말이지 자기가 죽더라도 저놈만큼은 반드시 끌고 가겠다는 공멸의 의지가 참 선명했다· 이 모든 일이 끝난 후 뭐 하고 살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주제에 빌어먹을 꼬맹이가·
[끝없이 경고해 주고 있거늘··· 어리석은지고·]
“하아압!!”
각설하고 내가 사탄의 거대한 몸에서 뛰어내렸을 때 인퀴지터가 단두대를 완전히 튕겨 낸 후 바닥에 발을 꽝 찍었다· 해일과 같은 신성력이 사탄에게로 쏘아졌다·
콰앙!
그를 두고 사탄이 한 대처는 하나였다· 단두대가 꼭 방패라도 되는 것처럼 사탄을 가리고 섰다·
‘섬격이 안 된다면····’
나는 그 충돌에 휘말리지 않도록 적당한 구석에 착지하며 라텔을 단단히 붙들었다· 섬격이 안 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찰나간 든 고민이 금방 답으로 이어졌다·
“씁 숟가락 딜로 보스 잡기는 귀찮은데·”
궁극기가 막혔으니 일반 스킬이나 평타로 간다· 들어가는 대미지가 천지 차이지만 그건 뭐 감수해야 할 일이다· 궁이 증발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해 놓고 그 짓거릴 또 반복할 수는 없었다·
타다다닥!
나는 인퀴지터와 사탄이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사탄을 기점으로 뱅글 돌아갔다· 전부 후방을 노리기 위해서였다·
‘후측에 보너스 대미지가 없다는 건 아쉽네·’
「네?」
‘아니야·’
기실 뒤치기에 보너스가 붙든 말든 앞에서 알짱거리다 공격을 같이 맞느니 뒤로 돌아가 있는 게 현실적으로도 더 나았다· 탱커의 공격이 나까지 불사르는 속성이라면 더욱 그랬다·
고래 사이에 끼어 죽는 새우 꼴은 절대 사양이다·
“후우·”
됐고 섬격 다음으로 만만한 건 역시 참격이다· 봄바드는 소모 마력 대비 공격 면적이 적고 마력창은 대미지 자체가 너무 낮으니까·
‘문제는 아까처럼 공격이 싹 증발하는 경우인데····’
나는 사탄의 등이 보일 즈음 몸에 힘을 풀었다· 촤아악! 관성이 스키드 마크와 함께 몸을 좀 더 미끄러트렸으나 군화는 여전히 유지하고 있어서 발이 다치는 일은 없었다·
‘어디 소멸의 잣대가 어느쯤에 있는지 시험해 볼까·’
나는 그 상태에서 라텔에 적당히 마력을 덧입혔다· 섬격에는 결코 미치지 못하지만 보통 참격을 날릴 때보단 조금 더 담은 정도의 양이었다·
서걱!
이어 새까만 선이 허공을 지나 사탄의 등을 베었다· 그 과정에서 저항이라 할 만한 건 거의 없다시피 하다·
“···허·”
그러나 상대가 피하지 않고 소멸시키지도 않고 그저 맞아 준 것엔 이유가 있었다· 평소보다 짙은 참격이 얕은 실금 하나만을 남긴 채 스러졌다·
중도에 힘 일부가 삭제당한 것도 아니고 전부 정타로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나온 결과물이었다·
“진짜 숟가락 딜이냐고·”
이러면 공격의 세기를 어디까지 올려야 상처라 할 만한 게 생기지? 그 이전에 아까처럼 일격 자체가 소멸당하지 않으려면 얼마만큼의 힘을 써야 하지?
[그 힘을 가지고도 어째서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단 말인가?]
공격 삭제가 모든 공격에 적용될 수 있다면 내 섬격뿐 아니라 인퀴지터의 힘도 전부 사라져야 마땅하다· 섬격에는 못 미칠지언정 한 방 한 방이 위력적인 건 인퀴지터도 마찬가지니까·
그러니 사탄의 무적기에도 분명 제약이 있다· 아직 내가 알 수 없는 규칙이·
‘제약에 신성력이 있는 거라면 인퀴지터와 내 역할을 바꿔야 하는데····’
신성력만 못 막는 거라면 탱과 딜의 역을 교체하는 게 맞다· 내가 암만 공격해 봤자 의미가 없어진다는 거니까·
하나 일정 이상의 출력만 삭제시키는 쪽이라면 역할 변환보다는 서둘러 그 선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일에는 인퀴지터보다는 내가 좀 더 적격이다· 나름의 갈림길인 셈이었다·
[눈을 떠라· 거짓된 신을 직시해라· 그것은 진정한 신이 아니니·]
“아까부터 듣자 듣자 하니까···!”
[그들은 오직 멋대로 판단을 내리고 멋대로 세상을 휘두를 뿐인 위선자이니라·]
“신성모독자여 나는 너를 반드시 심판할 것이다!!”
아까보다 강도를 올린 두 번째 참격을 날리며 나는 바닥을 굴렀다·
‘끝나면 열매 얘기도 전해 줘야 하긴 하는데····’
서로 일정도 안 맞고 신에 향한 인퀴지터의 신앙심이 너무 커서 차일피일 미루던 게 여기까지 왔다·
나는 내 업보를 두고 혀를 차며 세 번째 참격을 날렸다· 서걱· 이제야 좀 봐 줄 만한 상처가 났다· 이마저도 경상이라고는 차마 표현 못 할 수준이었지만·
“쓰읍·”
결국 밝혀진 건 하나다· 제대로 상처를 내려면 최소 섬격의 절반만큼은 힘을 써야 한다· 하지만 그만큼의 힘을 동원했을 때 과연 지워지지 않을 수 있는가?
“지워지면 바로 역할 전환이다·”
나는 단약 부작용으로 촛농처럼 녹아내리는 한쪽 눈을 두고 검을 다시 붙잡았다· 시야 한쪽이 정말 사라진 거라 거리 감각이 이상해졌지만 별로 문제 되진 않았다·
사탄은 너무 컸고 그만큼 맞힐 곳도 많았다·
[실로 한탄을 금치 못하겠구나·]
그리고 고리 태양이 회전했다·
‘···지워졌어·’
그에 맞춰 팔 하나를 자를 의도로 날렸던 참격도 허공에서 실종되었다· 조금씩 바스러지며 없어지는 게 아니라 한순간에 도려내지듯 사라지는 증발이었다·
[어째서 이리 반항하는가?]
그것의 원리는 글쎄·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여파 없이 공격만 싹 소멸시키는 걸 보건대 어지간해선 시공간 계열 쪽일 것 같다·
상도덕 없게 전조도 없이 날려 버려서 딱히 확신할 만한 증거는 없지만 말이다·
[나를 죽이고 세상을 구해 보았자 이 세상을 위해 사후마저 저당 잡히는 미래뿐이거늘·]
각설하고 나는 사탄이 지껄이는 말을 두고 잠시 마력을 가다듬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아니면 알고도 비꼬는 건가· 그 잠깐의 시간동안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건 불필요한 잡념 따위다·
[설마 그대는 진정 그것을 바라고 있는가?]
더불어 사탄이 애매하게 보지 못하는 각도의 하늘에서 붉디붉은 빛이 잡혔다· 벌써 새벽이 오는 건가 싶을 정도로 밝고 찬란한 빛이었다·
“인퀴지터!”
“네!”
“잠깐 역할 변경이다! 네가 공격에 집중해 봐라!”
“예?!”
저걸 사탄이 보았을까? 하지만 나조차 인퀴지터의 강렬한 신성에 온 감각이 끌리는 상황이다· 나보다 마기에 더 절여진 사탄이라고 상황이 다르진 않을 것이다·
“아까 구덩이에서 썼던 것 두 배만큼은 모아 던져라!”
“네 네!”
나는 붉은 노을로부터 사탄이 완벽하게 등질 수 있도록 내 위치를 조정했다· 사탄은 여전히 나보다 인퀴지터를 우선순위 삼았지만 그거야 내가 손을 쓰면 해결될 일이었다·
[이런 대놓고 작전 회의라니·]
“꼬우면 너도 동료 데리고 와라·”
그렇다고 진짜 쫄 부르면 알지? 엄청 아니꼬울 테니까 그냥 당해라· 지금도 더러운 맷집에 완전 질렸다고·
[아니 왜 잘 가다가 갑자기···!]
‘쫄리면 돕든가·’
일부러 사탄의 어그로를 끌어오는 내 행동에 분노가 기겁했다· 그러나 분노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는 딱히 내가 신경 써 줄 부분이 아니다·
내 손이 라텔을 앞으로 내밀었다· 파앙! 봇물 터지듯 라텔의 검날이 하얀 액체가 되어 앞으로 쏟아졌다·
“어디 네 같잖은 수작이 신성력에도 통하는지 보지·”
[그대의 도발 내 친히 받아들여 주마·]
하얀 점액질이 사탄의 몸을 타고 놈의 몸을 강제로 고정시켰다· 콰직! 사탄이 움직일 때마다 굳어진 표면이 부서지고 단두대에 잘려 나갔으나 그것조차도 나는 받아들였다·
어차피 라텔은 나와 접촉만 하고 있으면 어떻게든 형태를 변환 및 수복할 수 있는 도구였다·
[호·]
[미친 내 애검으로 지금 뭐 하는···!]
“이건 삭제 못 하나 보지?”
만약 사탄이 이걸 회복도 못 시킬 정도로 박살 내 버리면··· 그땐 겸손하게 딜러로 돌아가 예비용 검을 쓰면 될 거다· 잃어버린 라텔이야 내 갈비뼈로 만든 것도 아니니 아쉬운 것 정도로 그칠 테고·
나는 그런 마인드로 분노의 비명을 씹으며 손과 연결된 라텔의 끝을 쥔 채 앞으로 달려갔다·
[이것으로 나를 막는 게 가능하리라 여기는가?]
콰지직!
계속해서 부서지고 부서진 그 틈을 다시 불어난 라텔이 메우고· 나는 라텔을 흡사 슬라임처럼 사용해 사탄을 옭아매며 다른 손엔 검을 들었다·
아쉽게도 라텔의 부피가 간당간당해서 이번에 든 검은 예비로 준비해 둔 일반 검이다·
[하물며 이것이 나를 막는다 한들 저자가 힘을 잘못 쓰면 그대마저 휩쓸릴진저·]
나는 일반 검에 쇳소리가 나도록 마기를 불어넣으며 사탄에게로 다시 접근했다· 내가 사탄을 견제해 주는 덕에 인퀴지터는 착실히 신성력을 자신의 몸으로 끌어당기는 중이다·
사탄의 좌측에서 끔찍하고도 황홀한 금빛이 덩치를 불렸다·
[그대는 그것이 두렵지도 않은가?]
“너는 유대를 모르는가? 아 동료랄 게 없는 인생이었을 테니 당연히 모르겠군·”
저 강렬한 존재감을 두고 사탄이 어떤 생각을 할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인퀴지터를 믿는다· 그녀가 고의로 나를 다치게 할 리 없다는 걸 내가 휩쓸리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해 줄 거라는 걸·
“그리고 아까 미처 말 못 했는데·”
하므로 나는 날아오는 정화의 새와 불어나는 정화의 힘을 두고 힘껏 웃었다·
“게스타스가 개자식인 것도 맞고 멋대로 세상을 휘두르는 것도 맞지만 최소한 네게 위선자 소리를 들을 존재는 아니다·”
[···어떻게 그 이름을·]
참격으로 던져지지 않은 내 검이 사탄의 단두대에 박혔다· 라텔을 단번에 소멸시키지 않는 걸로 보아 물질은 못 날리는 건가 싶었는데 이것으로 심증 하나가 더 생겼다·
내 몸이 주우욱 미끄러지며 사탄의 단두대를 둘로 쪼갰다·
[그렇다면 너는 진실을 알면서도─!]
“오 이제 주제를 깨달았나?”
단두대를 자른 내 몸이 사탄의 팔에 맞아 부웅 날아갔다· 온몸의 뼈와 내장이 단번에 으스러졌지만 고통보다는 유쾌함이 더 컸다·
내 몸이 불꽃으로 녹아 날아가는 운동에너지를 초기화한 후 땅에 착지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언해 주지·”
동시에 내 손이 라텔을 빠르게 회수했다· “흐아아압!” 그를 갈음하듯 태양을 대신하는 광채 두 개가 사탄에게 돌진했다·
“네놈이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절대 네놈 편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너무도 눈부셨던 나머지 나는 라텔을 들지 않은 손으로 중지를 치켜세웠다·
“하니 이 진리를 머리에 박아 놓고 얌전히 죽어라 악마새끼·”
콰앙· 세상에 빛이 임했다·